낮은대로 임한 불멸의 장군

고 채명신 장로의 삶과 리더십

글|송기태, 사진|권순형 | 입력 : 2013/12/23 [11:38]
이 글은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로의 소천에 즈음하여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호주지부(지부장 이윤화), 재호한인파월동지회(회장 김영길) 임원들과의 인터뷰, 채명신 장로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를 바탕으로 현대 리더십 이론을 접목하여 쓴 것이다. 인터뷰에 응해준 임원 제위들과 각종 자료를 제공해준 김영길 회장에게 사의를 표한다.  <필자주>
 
▲ 베트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군이 생전에 호주 안작데이 행사에 참석했다.(2007년 4월)      © 크리스찬리뷰
 
군인의 리더십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식민지 코르시카 출생으로 한때 독립운동에도 몸담았던 그가 병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비결은 두 가지였다. 군사적 재능과 솔선수범이다. 명성을 날린 최초의 전투인 왕당파 반군과의 툴롱 전투에서는 수학실력을 바탕으로 정밀한 포격을 퍼부어 전세를 뒤집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군기를 잡고 전열 선두에 섰다. 병사들에게 ‘우리들의 꼬마 하사’라는 애정이 담뿍 담긴 별명으로 불렸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유럽을 휩쓸었다.

▲ 채명신 장로는 장군 묘역을 마다하고 사병묘역에 뼈를 묻었다.      © 국민일보

손자병법을 남긴 손무와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장 오기(吳起) 장군 역시 병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덕장으로 유명하다. 대장군의 지위에도 병졸들과 같이 먹고 자며 빨래까지 손수 챙겼던 그는 종기 때문에 고통받는 무명 병졸을 보고는 입으로 상처를 빨아 고름을 빼냈다. 오기가 지휘하는 초나라는 연전연승 가도를 달렸다. 승리의 비결은 ‘병사의 종기를 직접 빨아주는 어진 마음’의 힘에서 나왔다.

맥아더와 니미츠는 둘 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다. 그러나 출신성분이나 성격은 판이했다. 맥아더는 명문 군인가문 출신으로 육사에 입교, 육참총장이 되었으며, 니미츠는 시골 여관집 아들로 해사에 들어가 해참총장이 됐다.

태평양전쟁 중 동경 156도를 기준으로 서태평양은 맥아더가 총사령관으로 장악, 그 나머지 중앙태평양은 니미츠가 총사령관으로 관할했다. 맥아더가 외향적인 카리스마형인데 반해 니미츠는 조용한 카리스마형이었다. 특히 니미츠는 자신에 엄격, 부하들에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개성이 강한 장군들을 잘 조율함으로써 ‘장군 중의 장군’으로 불렸다.

맥아더가 자서전에서 니미츠의 전공을 자기 공으로 돌렸지만 니미츠는 “그 사람 기억력 좋네”하며 웃어넘길 정도로 대범했다. “최선을 다하라. 걱정 따위는 하지마라”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니미츠의 좌우명이었다.

니미츠의 리더십은 동기유발능력, 실수에 대한 관용, 경청, 불간섭주의, 외유내강으로 요약되지만, 무엇보다도 전우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었다. 새카만 부하의 말도 끊지 않고 귀 기울여 항상 자부심을 갖게 했다. 사령관 시절에도 철두철미하게 부하를 믿고 임무와 책임을 맡겼다.

니미츠의 지극한 전우애는 그의 사후에 확연히 드러났다. 미 해군 종신원수로 미 해군 주력항모 ‘니미츠호’의 주인공이며 태평양전쟁 승리의 주역인 니미츠제독은 알링턴국립묘지가 아닌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국립묘지에 묻혔다.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해군들이 가장 많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묻히기를 희망한 본인 뜻에 따른 것이다.

그는 전역 후 기업과 대학의 고액 스카우트 제의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국가에서 주는 연금만으로 생활, 장군의 품위를 지켰다.

▲ 채명신 장로는 초대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일시 귀국할 때마다, 대통령에게 중장 진급을 신고하기 위해 청와대로 갈 때도 사병묘소에 가서  눈물로 지휘관 휘장이 다 젖을 정도로 대성통곡하고 나오며 “나도 죽으면 이 사병묘역에 같이 있겠다”라고 한 약속을 지켰다.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사선을 넘은 불사조
 
이렇게 언급한 장군들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명장이 한국 최근세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가 바로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베트남전의 영웅’으로 불리다 2013년 11월 25일 소천한 채명신 장로이다.

그는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진남포 소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46년 북한군 사관학교격인 ‘평양학원’ 개교식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하지만 이상과 다른 공산주의 사회의 현실을 목도한 그는 같이 일해보자는 김일성의 권유를 뿌리쳤다.

소련군 주둔 이후인 1947년 공산주의를 피해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홀로 월남,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제5기로 입교했다.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그의 첫 직책은 제주도 9연대의 소대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군생활의 통솔철학이 된 ‘골육지정의 리더십’을 터득하게 된다. 광복 직후 첨예한 사상적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제주도에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 덕분에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경험을 했다. 그 결과 지휘관이 늘 장병들과 함께하며 형제처럼 돌보다 보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2007년 4월 안작데이에 시드니를 방문한 채명신 장군(왼쪽 두 번째 줄 두 번째)이 이윤화 회장과 함께 마틴 플레이스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했다.      © 크리스찬리뷰

그는 첫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서 “부하가 생명을 바쳐 상관을 위하게 만드는 건 바로 ‘골육지정’의 통솔뿐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을 따르는 부하가 많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가장 완벽한 축복이었다”고 기록했다. 4.3사태의 와중에서 경험한 군 내부의 좌익과 우익간의 갈등으로 암살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황에서 부하 사랑으로 얻어낸 신임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하들의 경호 속에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사례는 적대적 부하까지 포용해서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는 헌신적 리더십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런 경험은 채 장로로 하여금 하여금 부하들과의 결속력과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전투부대를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휘관으로 만들었다. 그는 늘 후배들에게 “전장에서 부하들의 피를 덜 흘리게 하기 위해서는 평시 철저한 교육훈련을 통해 강한 군인으로 육성해야 하며, 전투에 임해서는 솔선해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야전 사무실에서의 채명신 장군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또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군인정신’이 전투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전장의 불사조’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6ㆍ25전쟁 당시 한국군 최초 정규 유격전 부대인 ‘백골병단’이었다. 부대의 첫 출정을 앞두고 그는 장병들에게 “이제 우리는 적 후방으로 침투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중득생(死中得生)’, 즉 죽음 가운데 생을 쟁취하자”고 강조했다.

당시 중령이었던 그는 ‘백골병단’이라고 불리는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1951년 1월 30일 대구를 출발, 3월 29일 귀환할 때까지, 북한군 점령지를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펴며, 대남 유격부대 총사령관 길원팔(吉元八)을 생포하는 등 놀라운 전과를 거뒀다(길원팔 생포와 자결 등의 에피소드는 후술함).

▲ 베트남전에서 작전지휘하는 채명신 장군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박정희와의 만남
 
채 장로와 아홉 살 연상인 박정희와의 ‘운명적 만남’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다닐 때다. 그는 생도였고 박정희 대위는 후보생 중대장이었다. 그는 당시 박정희를 이렇게 회고했다. “작달막한 키지만 곧은 자세와 근엄한 표정으로 후보생들 모두를 위엄으로 압도했다. 나는 늘 먼 발치에서 박정희 대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후 6ㆍ25 전쟁 때 백골병단을 이끌고 적지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그는 천신만고 끝에 남하, 강릉 9사단 사령부에서 사단 참모장이던 박정희 대령과 재회했다. 그날 밤 박정희는 강릉시내 불고기집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채 중령, 그 잠바에 웬 피인가?”

그가 게릴라전을 하면서 인민군의 피와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잠바를 가리키며 의아해했다. 인민군의 피임을 확인한 박 대령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잠바를 벗었다.

“자, 채 중령! 내 것 하고 바꿔 입자.”

“아니, 이렇게 더러운 것을...”

“그게 기념 아닌가, 역사적인 잠바인데...”

이를 계기로 전 대통령 박정희와 채 장로는 ‘숙명적 관계’가 되었다. 5ㆍ16 군사정변 때 그는 철원 5사단장이었다. 그가 쿠데타에 가담한 건 박정희에 대한 신뢰와 우국충정 때문이었지 정치적 야심은 없었다. 그게 두 사람의 차이였다. 쿠데타에 참여한 많은 군인들이 옷을 벗고 정치에 참여했지만 그는 끝까지 군에 남았다.

▲ 베트남전 당시 각 부대에 설치했던 채 장군의 좌우명 팻말.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군인’으로서 채 장로의 ‘인생 최고의 순간’은 1965년 8월부터 3년 8개월간의 주월 한국군사령관 시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을 ‘명분 없는 전쟁’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6ㆍ25전쟁에서 게릴라전법으로 적을 교란했던 채 장로는 그야말로 베트남전을 지휘하기에 가장 적합한 ‘준비된 지휘관’이었다.

▲  베트남 위문공연에서 노래하는 패티김(왼쪽)과 오른쪽은 채명신 장군의 영결식에서 조가를 부르며 애도를 표한 패티김.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베트남전의 영웅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명령하자 국가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파견된 베트남전에서는 안티 게릴라 전법으로 한국군의 용맹을 세계에 알렸다. 그가 6ㆍ25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한 ‘중대전술기지’라는 개념을 활용해 승리한 ‘두코 전투’와 ‘짜빈동 전투’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66년 8월 5일, 캄보디아 국경 4㎞ 지점 두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맹호기갑연대 소속 제9중대는 6배나 많은 북베트남군 2개 대대를 맞아 대승을 거뒀다. 1개 중대 병력으로 6배나 많은 월맹군을 괴멸시킨 전사(戰史)에 남을 대첩인 두코 전투의 승리 이후 미군은 한국군이 적용했던 ‘중대전술기지’ 개념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교리로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하기도 했다. 이로써 그는 ‘베트남전쟁 중대전술기지 전략의 대가’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미군들은 그를 군신(軍神)으로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또 그는 주민으로부터 고립된 약화된 적을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섬멸한다는 새로운 전술개념을 도입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를 미군도 애초에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다 그의 능력에 탄복해 작전권을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때 “만약 미국이 채 장군의 ‘양민과 베트콩의 분리 정책’과 ‘중대기지 전술’을 일찍 따랐다면 베트남전을 승리로 끝냈을 것이다. 채명신 사령관이 이끄는 한국군에게 베트남전을 맡긴다면 이 전쟁은 6개월이면 끝날 수 있는 전쟁” 등등의 보도가 외신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다.

▲ 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힌 채명신 장군의 묘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당시 채 장로의 유명한 좌우명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드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였다고 한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채 사령관의 가족들을 한 달 동안 베트남에 보냈는데, 바로 전투가 벌어지니 오랜만에 만난 가족을 앞두고, 가족에게 말 한마디 없이 권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갔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전쟁 당시 장교 숙소를 거부하고, 소대원들과 함께 막사에서 지내 후배 군인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그는 1969년 4월 베트남전 당시 헬리콥터로 이동 도중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국군 28연대 주둔지역인 투이 호아에서 헬기가 추락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69년 귀국한 이후 2군사령관으로 부임, 한국군의 위상을 세계에 떨친 주역으로 유명하다.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사생관(死生觀)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는 "나에겐 철모가 필요치 않다"며 평생 천으로 만든 군모를 고집했다.

▲ 베트남전 당시 사용하던 주월한국군 수첩.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베트남전쟁을 온몸으로 체험한 그는 전쟁에 대해 두 가지 의미있는 피력을 했다.

첫째, 전쟁은 대의명분, 즉 전쟁의 목적이 정당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월맹은 ‘외세 배격’이라는 명확한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자유베트남 정권의 경우 월맹과의 전쟁에서 뚜렷한 목적이 없었기에 질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둘째, 전쟁은 리더가 누구이냐가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월맹은 청렴한 지도자 호치민이 이끌었지만, 자유 베트남 정권은 사리사욕에 의한 잦은 쿠데타로 정정이 불안했고, 부패한 지도자가 이끌었기에 패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었다.

▲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사령관의 ‘장병 사랑’과 삶을 옛 부하들이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증언했다. 왼쪽부터 김영길 회장(재호한인파월동지회), 이윤화 회장(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김건 회원, 변영옥 회원(채 장군 운전병으로 9년 반 근무)      © 크리스찬리뷰
 
한번 맺은 인연
 
채 장로는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꼭 기억하고 소중히 여긴다. 대표적인 예로 베트남전 위문공연으로 인연을 맺었던 가수 패티김과의 관계이다. 1966년 작곡가 길옥윤과 결혼한 가수 패티김은 당시 최고 화제를 모은 사건을 일으켰다. 바로 길옥윤과 패티김이 결혼 후 신혼여행을 베트남으로 가기로 결정, 자비를 털어 베트남으로 떠난 것이다. 베트남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많은 파월장병들이 현지에서 목숨을 잃고 싸우고 있기에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그곳으로 가서 한국 군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부여하자는 취지였다.

당시 많은 가수들이 베트남 위문공연을 갔지만, 패티김은 자비로 베트남 방문을 자청했고 가수들이 방문하는 무대가 아닌 더 적진으로 들어가 적군의 공격을 받으며 헬기를 타고 한국 군인들이 있는 구석구석을 방문해 위문공연했다. 위문공연이라기보다는 장기자랑 수준의 노래 부르기란 표현이 맞을 정도로 무대나 음향 시설 등이 없거나 열악한 곳에서 길옥윤이 준비한 통기타 하나만 가지고 공연을 했다.

▲ 호주 시드니에 살고있는 이윤화, 김건, 고영환 등 옛 부하들의 손을 꼭 잡고 사랑을 표하는 채명신 사령관.     ©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항상 적진의 전방에 있어야만 하는 채 장로는 패티김의 위문공연이 우리 한국 군인들에게 정말 많은 큰 힘이 되었다고 항상 감사하게 기억했다. 전쟁 후 고국으로 돌아온 채 장로는 베트남에서 큰 힘이 되어준 패티김 부부에게 항상 감사하다는 표현과 함께 사적인 자리를 종종 갖게 되었으며, 세상 끝날까지 아름다운 관계로 서로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패티김의 콘서트에 자주 참석한 채 장로 부부는 패티김의 무대를 응원해 주는 열혈 팬으로 가족같은 사이로 지내왔다. 또 패티김은 채 장로 부부의 금혼식에도 축가를 부르는가 하면, 채 장로의 영결식에서 채 장로가 가장 좋아했던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부르며 애도를 표했다.

▲ 한국기독실업인회 시드니지회  정기월례회에서 채명신 장로가 간증을 전한 후 회원들과 기념촬영 (1995. 3.13)     © 크리스찬리뷰
 
장군의 사병 묘역 안장
 
채 장로의 소천과 관련에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예비역 중장으로 당연히 장군 묘역에 묻힐 자격이 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베트남전에서 생사를 함께 나누다 전사한 사병묘역에 묻히기를 고집하고, 그렇게 안장된 자체가 파격이요, 충격이다. 이 사실 하나로도 ‘참군인의 사표’ ‘진정한 군인’이란 국민의 칭송이 넘친다.

유해를 안장하고 봉분도 만들 수 있는 장군묘역과 달리 유골만 안장할 수 있고, 넓이도 8분의 1인 3.33㎡(약1평) 넓이에 지나지 않는 사병묘역, 비석 크기 또한 훨씬 작고, 장군묘역에 설치되는 가로 106㎝ㆍ세로 91㎝ㆍ높이 15㎝의 단은 아예 없다. 그런데도 장군묘역을 마다하는 것은 뼛속 깊이 몸에 밴 전우애가 아니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39세 때인 1965년 초대 주월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베트남전에 부임해 1969년까지 4년 8개월 간 현지 최고지휘관으로 활약하면서 일시 귀국할 때마다, 대통령에게 중장 진급을 신고하기 위해 청와대로 서둘러 가야 할 때까지도 사병묘소에 가서 눈물로 지휘관 휘장이 다 젖을 정도로 대성통곡하고 나오며, “나도 앞으로 죽으면 이 사병묘역에 여러분과 같이 있겠소”라고 되뇌었다고 한다.

청춘을 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전사한 ‘자식같은 병사들’의 부모를 생각하며 항상 마음 아파한 채 장로였다. 채 장로의 부인 문정인 권사도 “(채 장군이) 집(동부이촌동)에서 국립현충원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전역 직후부터 그런 얘길 했고 병상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언급을 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진정한 명예와 리더십은 만인의 공감 속에서 빛을 발한다. 전사한 ‘아들’ 옆자리에 전투에 같이 참전했던 장군의 묘가 함께 자리한다면 그 가족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들은 함께 싸운 혈맹의 전우요, 한 가족임을 증언한다. 삶이 끝난 뒤 남겨 둔 화려한 무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삶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채 장로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 보면, 좌우 이념을 떠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그의 삶은 흠모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은 뒤 묻힐 곳을 마련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중대한 일이다. 그러나 사자(死者)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예도 흔하다. 어머니 묘 옆에 묻어달라고 한 소련의 레닌, 조국 산하에 유골을 뿌려달라고 한 중국 마오쩌둥과 베트남 호찌민 등의 시신이 냉동 또는 방부 처리돼 붉은광장, 톈안먼, 하노이 영묘 등에 안치된 것이 그런 경우다.

반면 프랑스의 영웅 드골은 유언을 따라 국립묘지가 아니라 고향 콜롱베 공동묘지의 딸 곁에 묻혔다. 채 장로 역시 “(장군이 사병묘역에 묻힌)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뜻대로 안될 가능성이 컸었다.

또 하나 채 장로가 우리에게 준 가르침은 묘지 크기가 다르게 구획된 신분별 묘역이란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준 것이다. 국립묘지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군인묘역은 장군ㆍ장교ㆍ사병 묘역으로 각각 나뉘어 있다. 사후에도 생전 계급에 따라 예우하는 ‘이상한’ 구획 조성이다. 나라사랑에도 귀천이 있다는 것인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한국만의 특이한 경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결코 멀리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채 장로처럼 ‘장병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이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그 전쟁에서 희생된 971명의 사병들과 더불어 영원한 오(伍)와 열(列)을 맞춰 마지막 길에서까지 군인의 표상을 보여줬다. 그의 영결식에서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이 조사를 통해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 채명신 장군님 깊이 흠모합니다”라며, 채 장로의 위국헌신 일념으로 국가와 군을 위해 바친 일평생에 경의를 표하고 추모한 것이 결코 과분한 찬사가 아님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  2007년 안작데이에 호주를 방문한 채명신 장군이 마틴 플레이스 호주군 전사자 추모비 앞에서 한국 전쟁의 영웅 찰스 그린 중령의 미망인 올윈 그린 여사와 함께 했다.          © 크리스찬리뷰
 
장병 사랑, 나라 사랑의 진심
 
그의 ‘장병사랑’은 삶의 곳곳에서 묻어난다. 한번은 청와대에서 냉면 대접을 받고는 “베트남의 전우들에게 이 냉면을 보낼 수 있으면 한이 없겠다”고 하며 눈물지었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는 채 장로와 직접 경험한 시드니에 거주하는 참전유공자회와 파월동지회 임원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김건 : “베트남 전쟁 때 우리의 군복은 무명천이었습니다. 땀에 감기는 옷이었지요. 그러니 정글복, 특수복이 없었습니다. 채 사령관께서 미군 측에 ‘땀에 휘감기는 군복을 입고 전쟁하는 것은 전투력 손실이다. 병사들에게 산뜻하고 통풍이 잘되는 군복을 입혀야 된다’고 주장하여 열대지방에 맞는 특수 정글복을 공급받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정작 사령관께서는 안입으시는 거예요. ‘사령관님 안 더우세요?’하며 주변 부하들이 안절부절 못하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군복이 일본공장에서 생산한 것이었습니다. 그걸 아신 사령관께서는 정글복이 아무리 시원해도 1년 가까이 입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사령관께서 군복은 물론 런닝, 팬티, 정글화, 군복은 물론 벨트까지 100%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을 쓰도록 하여 60년대 한국 외화벌이에 큰 역할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베트남에 가서 6개월~1년 동안은 뭐나 잘 먹어요. 당시 얼마나 굶주리던 시대였습니까? 그러다 점점 지나면 김치 한 쪽만 먹어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이 막 일어나지요. 그때 사령관께서 청와대와 통화 끝에 ‘각하! 저희들이 김치가 먹고 싶습니다’하여, 대통령께서 ‘보내라’하여 김치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 실정은 캔 하나 제대로 못만들었습니다. 캔김치가 베트남에 도착해서 막상 따보니 시뻘건 녹물이 핏물처럼 쏟아졌습니다. 다 버리게 되었습니다. 서울농대 식품공학과 교수에게 의뢰하여 새로 보내온 김치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사령관께서 녹물을 빼고 병사들 앞에서 손수 잡수시며, ‘녹물을 먹어도 우리 김치 맞다. 못먹어도 일본에 주문하지 말도록 하자’라고 하셔서 씻어서 먹기도 하고, 국에 끓여서 먹기도 했습니다.”

이윤화 : 사령관께서는 파월 현지기술자(민간인)들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또 군인들이 전역하면 현지 미군회사에 취업을 알선하기도 하여 수백 명이 취업했습니다. 베트남 패망 후 호주에 오신 분들도 많이 계시지요.

변영옥(채 장로 운전병으로 9년반 근무) : “하사 때부터 1군 사령부 작전참모 대령이던 사령관을 모셨습니다. 5사단장일 때 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남 출신의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육사 8기생들과 이북 출신이 대부분인 육사 5기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암투가 시작됐습니다. 김종필 계열의 8기생들이 5기생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령관께서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정치적 야심이 없었기 때문이고, 서울에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으셨습니다. 주체세력의 5인방 중에 한 명으로 혁명정부의 감찰위원장을 하셨지만 끝까지 군 복귀공약을 지키며 군인으로 남기 위해 미육군지휘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사령관을 모시는 동안 한 달도 용돈을 안받은 적이 없을 정도로 마음을 써주셨습니다.”

이윤화 : “사령관께서는 근검 절약 겸손이 몸에 배인 분이셨습니다. 동부이촌동 적산가옥에 사시면서 실내장식, 가구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십년 된 가구, 소파도 짝이 맞지 않고, 사령관께서 앉으신 곳은 다 터졌습니다. 한번은 곽규석 씨가 인터뷰하러 방문했다가 응접세트와 냉장고가 너무 낡은 것을 보고 ‘여기가 채 장군 댁 맞느냐? 대한민국에 이런 분이 계시는 한 희망이 있다’고 했답니다. 보일러도 세게 틀지 않으시고 점퍼를 입고 계시고, 와이셔츠 깃도 야들야들하고, 양말도 오래 신어 살이 보일 정도로 닳을 때까지 신으세요. 보다 못해 저희가 ‘양말 좀 제대로 된 것 신으세요’하면, ‘이거면 족해’해요, 거의 매일 점심은 국수를 드셨습니다. 선물로 들어온 것들은 방문객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베트남에서 사령관께서 ‘평화로운 월남촌 건설’ 등 대민 봉사와 양민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셨는데, 한국에서는 보지도 않고 ‘양민학살’이란 루머가 떠돌았습니다. 그러자 돌아가시기 전에 ‘전쟁이란 천재지변과 같은 것이다. 지진 홍수가 개개인을 가려가면서 덮치느냐? 전쟁도 천재지변처럼 잔혹하게 덮치는 경우가 있다. 베트남도 전후방 구별도 없었고 부득이한 면은 있었지만 어떻게 양민학살이냐? 언어도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엽제를 앓고 있는 전우들을 안타까워하며 ‘우리 전우는 하나가 돼야 해’라고 평소에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당시 한국은 아주 최빈민국에서 벗어나고자 ‘잘 살아보세’라는 한마디가 전국민적 공명을 일으킬 때였다. 베트남전에서 달러화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본국으로 보내라 할 정도로 나라의 경제를 걱정하고, 사병들의 봉급은 80% 이상 저축하도록 독려하여 그것 또한 외화획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평생 묻어둔 비밀
 
앞서 언급한 대로, 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로(당시 중령)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로는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 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육박전 끝에 생포했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와 마주 앉아 심문하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대뜸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채 장로 :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다.

길원팔 :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

채 장로 : (전향을 권하며) 당신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다.

길원팔 : (한 마디로 일축하며)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로는 그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로는 “늘 하나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채 장로는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로는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여기에 숨겨진 ‘삽화’가 하나 있다. 길원팔은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자결하면서 유언처럼 부탁 하나를 했다.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를 시켜달라.”

비록 적장이었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로는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로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H대 화학과 교수를 지내다 10년 전 은퇴했다.

필자가 채 교수를 만난 건 25년 전이다. 그는 한국창조과학회 창립멤버였고, 신학교까지 졸업한 기독교지성이었다. 당시 <빛과소금>에서 ‘그분이 주신 선물’이란 권두화보에 ‘시인의 감성을 가진 과학자’들이 글을 실었다. ‘별’을 제목으로 그 달에 Y대 천문기상학과 N교수가 쓴 글이 진화론에 가까워 실을 수가 없었다.

부득이 그 글을 취소하고 창조과학회 회장이던 김영길 박사에게 의뢰하여 찾은 필자가 채 교수였다.

“채명신 장군 동생 채XX 교수에게 부탁해보세요.”

마감시간 하루를 앞둔 전 날, 그는 힘든 부탁을 잘 들어주었다.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 직접 원고를 받으러 달렸다. 글 마무리를 하는 30분 동안 그의 책장을 구경하며 기다리는데 중국음식이 배달돼 왔다. 필자의 몫까지 ‘알아서 주문해놓은 저녁’이었다. 따뜻한 우동국물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의 첫인상이었다.

문정인 권사 : “채 장로가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입니다. 채 장로는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습니다”고 했다.

그리고 채 장로가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로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채 장로는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결혼했다.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 채 장로는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로는 이 사연을 끝까지 지키다 지난해 5월 초, 마지막 언론 인터뷰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길원팔이 자결하면서 데리고 있던 10대 남녀 아이를 돌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졌으나 남자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사랑으로 키웠다. 대학 교수가 됐다. 그(채 교수)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문 권사도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다.

그렇게 의형제가 된 두 사람의 우애는 끝없이 깊고 넓었다. 채 교수는 채 장로의 별세에 크게 슬퍼하며 빈소를 지켰다고 한다. 채 장로에겐 친동생 명세 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로가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영웅의 기억
 
고대 로마에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뒤따르는 전쟁 포로들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끊임없이 외치는 풍속이 있었다. 라틴어인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전쟁 포로들이 그토록 크게 울부짖는 ‘메멘토 모리’는 바로 영광과 환희로 인생의 최정점에 선 개선장군한테 하는 교훈의 말이었다.

“지금 네가 전쟁에서 승리해 우쭐하며 교만스럽게 개선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들(전쟁의 패배자)처럼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끌려갈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의 뜻이 담겨 있다. 감히 전쟁 포로 주제에, 개선장군한테 이런 말을 하도록 하는 로마의 풍습이 놀랍다.

“군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가장 참담한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라”는 이런 풍습이 로마를 세계 대제국으로 키운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용맹한 장군은 나라의 기둥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살펴본 채 장로의 삶을 돌아보면 큰 의문에 붙잡힌다. ‘군사혁명(주동자 입장에선) 5인방의 동지이자, 전쟁 영웅인 채 장로 정도면, 주월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2군사령관으로 영전, 참모총장 후보 영순위로 꼽힐 만하다. 국방장관과 총리를 지내도 몇 번을 지낼 만한 인물인데 왜 중장으로 예편했지?’ 그렇다고 채 장군이 비리에 연루됐다는 풍문조차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사선을 몇 번이나 넘나들며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항상 기억했을 것이다.

죽음 앞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분의 심판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분명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비록 (국가를 위한) 혁명동지였지만, 박정희의 구심력과 채명신의 원심력이 마찰을 일으킨 건 1972년이다. 유신헌법을 추진하던 박 대통령은 그에게 집권연장의 뜻을 보이면서 군부의 지지를 이끌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신의가 정치인의 생명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각하!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집권 연장을 하면 각하 생명을 끊는 것입니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에도 거리낌 없이 ‘돌직구’를 날린 것이다. 이미 전쟁에서 생사를 초월한 사생관을 갖고 있던 그는 명백한 불의 앞에 구차하게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었다. 이로 인해 그는 이후 대장 진급에서 탈락해 예편하고 만다.

부인 문정인 권사가 “남편은 항상 박 대통령에게 직언하면서도 원망을 하지는 않았다”고 회고하는 것도 그 단면에 대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에게 5ㆍ16은 권력을 잡아 출세하기 위한 쿠데타라기보다 ‘국가를 살리는’ 혁명에 가까웠다는 생각이다. 혁명의 진정성을 그는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목사가 되려다 군인으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채 장로는 군인으로서는 물론 삶에서도 모든 이의 귀감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앙도 큰 몫을 했다. 영결식에서 기독교 예식을 거행한 김태식 목사(육군 군종실장)는 “신앙과 삶이 일치하기가 쉽지 않은데, 고 채명신 장군이야말로 일치했던 분이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셨다”고 밝혔다.

초기 선교사들의 눈물이 심겨진 황해도 출신인 채 장로는 목회자가 되고 싶었지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공산주의자들을 보고, 군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전쟁에 참전하면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목사가 되려고 했다가 군인이 된 것도,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증하기도 했다.

채 장로를 잘 아는 국방부 관계자는 “전쟁영웅이 일반 삶에서 귀감이 되기가 쉽지 않은데 채 장로는 타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었다.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채 장군이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간증을 통해 전도를 많이 했다”고 밝혔다.

그의 삶 굽이굽이를 현미경으로 살피듯 살피면 예수님을 닮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의에 살고 참에 살았던 그의 삶은 낮은 곳으로 임하면서 별처럼 높아지는 역설의 교훈을 다시 확인케 한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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