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탐욕과 중동 분쟁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1/27 [12:08]
▲ 전설적인 이스라엘의 명장 모세 다얀 장군(왼쪽)과 후일 이스라엘 총리가 된 아리엘 샤론(가운데)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 1월 11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2006년초 제2기 총리직을 위한 선거유세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8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는 1928년 2월 27일 텔 아비브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군인이 되었고 1948년 제1차 중동전쟁부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모든 전쟁에 참가하여 조국을 위해 싸웠다. 퇴역 이후에는 정치에 투신하여 동지들과 함께 리쿠드당을 창당하였고 제11대 이스라엘의  수상으로(2001-2006) 지칠줄 모르고 일한 불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적대적인 아랍국가들에 맞서 이스라엘을 지킨 영웅으로,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이스라엘의 온건파들로부터는 중동의 평화를 깨는 불도저로, 비교적 중립적인 세계의 언론으로부터는 더글라스 맥아더와  리챠드 닉슨을 섞어 놓은 수류탄으로 매김되던 그 샤론이 죽은 것이다.

1998년 외무장관으로서 벤쟈민 네타냐후 총리와 함께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을 만났을 때 끝내 악수도 않고 말도 않던 그 뚝심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다.

아리엘 샤론의 죽음은  역시 얼마 전에 타계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스타 피터 오툴(Peter O’toole)과  겹쳐지면서  오늘도 분쟁이 그치지 않는 중동으로 필자의 시선을 돌리게 했고 그 근원을 추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영국이 중동분쟁의 불씨를 심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영국은 독일편에 가담한 터키를 제압하기 위해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부족들에게 접근한다. 터키의 지배 아래 있던 그들에게 독립을 보장하며 봉기를 부추긴 것이다. 알 사우드(Al  Saud) 가문은 그 중의 하나이다. 

현재 알 사우드 부족의 지배 아래 있는 영토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하고 향후 건설될 나라의 영토로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알 사우드 가문은 터키와 동맹관계에 있는 알 라시드 가문과 전쟁을 계속한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이 1915년에 나온 <다린조약>이다. 어차피 알 라시드 가문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던 알 사우드 가문으로서는 영국의 도움을 받는 것 자체가 하나도 나쁠 것이 없는 괜찮은 거래였다. 동시에 영국은 메카를 본거지로 세력을 떨치던 하시미테 가문과도 접촉하여 비슷한 거래를 한다.

영국은 아라비아의 두 부족과 조약을 맺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1916년 영국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조르주 피코는 파리에서 비밀리에 만나 <사이크스-피코협정>을 체결한다. 전후 중동을 자신들의 영토로 삼아 분할 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아가 영국은 1917년 외무부 장관 아서 벨푸어가 유대인 은행가 라이오닐 로스차일드에게 시오니즘을 공인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허용한다는 <벨푸어 선언>을 한다.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고 유대인 자본을 이용하려는 고도의 계산에서 나온 정략이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시오니즘 추종자들에게 는 복음이었다. 그때부터 세계각지로부터 유대인 이민자들이 귀향하게 되고 본격적인 이스라엘 건국작업이 시작된다.

이 4중 계약은 아랍제국들과 이스라엘은 물론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먼저 알 사우드 가문은 압둘 아지즈의 영도 아래 오랜 동지 와하비 가문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아 알 라시드 가문을 제압하고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건설한다. 하시미테 부족은  알 사우드 가문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하시미테의 수장 이븐 알리는 두 아들 파이잘과 압둘라를 앞세워 영국이 다마서커스에서 바그다드까지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알 사우드가문과  하시미테의 충돌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알 사우드의 승리로 끝난다.

이슬람 최고 성지 메카까지 수중에 넣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압둘 아지즈는 서구열강들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걸프만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않고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지대를 영토로 삼았는데 그 사막에서 세계최대의 유전이 발견되면서 굴지의 석유생산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동지 와하비 가문과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국가의 현대화를 추진하던 정치세력과 현대화 자체를 교리의 위반으로 보는 종교세력(와하비)의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하시미테 가문의 수장 이븐 알리는 알사우드와의 싸움에서 패해 갈 곳 없는 신세가 된다. 대신 영국으로부터 큰 아들 압둘라가 요르단을 , 작은 아들 파이잘이 이라크를 할양받는다. 더 이상 중동을 직접통치할 수 없게 된 영국으로 부터 적지않은 호의를 입은 셈이다.

영국의 이중계약이 가져온 알 사우드와  알 라시드 가문의 갈등, 알 사우드와 하시미테 가문의 갈등, 알 사우드와  와하비 가문의 갈등이 오늘날 중동과 아프칸 문제를 이해하는 키이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계획을 채택하여 그 중 56%의 땅을 유대인들에게 배분한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마침내 건국을 선포하였으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시작된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전쟁은 그 후 4차례나 계속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주민들 간에도 끊임없는 유혈의 폭동이 이어진다.  1993년에 이르러  오슬로 협정를 맺고 웨스터 뱅크와 가지지구에  PLO 자치정부가 들어섰으나 유대인 정착촌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을을 격리하는 높고 긴 철조망이 보여주듯 분쟁은 오늘도 끊이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아랍제국과 이스라엘, 아랍국가간의 갈등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영국의  중동정책에서 기인한다. 그 정책들은 중동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탐욕에서 나온 것이었다. 진실되지 않고 기만적인 것이었다.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아리엘 샤론의 죽음을 놓고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은 “아리크는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사랑을 받은 용맹스러운 군인이자 용감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수호자요 가장 중요한 설계자 가운데 하나였다. 두려움을 몰랐고 결코 비전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 그를 정말 그리워 할 것이다”라고 애도한 반면 PLO의 무장단체 하마스는 “그는 팔레스타인 인에게 재앙을 안겨준 범죄자였다. 지옥에나 가라!”고 저주하였다.           
                                                                                                                      
망자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아니라 영국의 탐욕이 낳은 기만적인 정책에 대한 상반된 평가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환청일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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