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위기와 해결책

손봉호/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4/29 [11:22]

1. 타락한 한국교회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보다 더 타락한 교회는 없었을 것 같다. 교회사 학자 몇 분에게 물어봐도 그런 예를 제시하지 못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성적 스캔들을 일으키고, 수 억을 횡령하여 감옥에 들어가고,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자식에게 세습하는 예가 빈번하다.

어떤 교단의 총회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기관이 억대의 돈이 오고가는 선거로 회장을 뽑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어떤 교단 총회에는 조폭이 동원되고 가스총이 등장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 개신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인하는 교회와 총회들이 이렇게 많은 나라도 한국 외에는 없다.

어느 다른 나라에서도 교인들 목회자의 세습을 절대다수로 찬동한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적 수준보다 낮은 나라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해 1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개신교인들을 포함한 시민 1천 명을 대상으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조사할 결과 17.6%만이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개신교인이 인구의 약 19%를 차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개신교인들 가운데도 개신교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09년 18.4%보다 떨어졌을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41.4%, 불교 33.5%에 비해서도 월등하게 낮다. 한 NGO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신을 받는 집단이 정치인들이고 두 번째로 불신을 받는 사람들이 종교인으로 드러났는데, 그 종교인들 가운데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장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1+1=2란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다. 따라서 누가 그것을 주장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기꾼이 1+1=라 주장한다 하여 그 사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1= 3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보통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계시의 종교는 마치 1+1=3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3위 1체, 예수님의 양성, 부활, 동정녀 탄생 같은 것은 모두 1+1=3이란 것과 같이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2세기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 absurdum)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계시의 종교를 전파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거짓말을 잘하고 이기적이라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충선된 증인’, 즉 ‘믿을 만한’ (pistos) 중인인지가 중요하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들이었으며 모든 신자들도 믿을 만한 증인이 되어야 복음을 올바로 증거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지 못하는 교회와 교인은 계시에 근거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한국 교회가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일재시대의 신사참배나 6.25 전쟁 때 공산군의 핍박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이다. 과거의 위기는 외부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교회와 신앙을 정화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교회 내부에서 부패로 인한 것이고 성경적인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기 때문에 회복을 매우 어렵게 하는 성질의 것이다.

교회의 타락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을 때는 주위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다. 주위 이방 나라들과 다른 방법으로 타락하는 경우는 결코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 구교가 타락했을 때는 성경의 가르침과 도덕적 원칙을 어겨가며 그때 세상이 섬기던 우상, 즉 돈과 권력을 추구했다. 한국 교회가 타락하는 것도 한국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세상이 은을 섬길 때 타락한 교회는 금을 섬기는 경우는 없다.

우상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바울이 분명히 가르친다(고전 8:4).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거나 하나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인 줄 알고 믿는 것이 우상숭배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들이 섬기는 것이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나 교인도 자신이 우상을 섬긴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은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상인 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 대부분은 ‘우리 교회’란 우상을 섬긴다. 개교회주의가 정도를 넘어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에 해가 되더라도 ‘우리 교회’ 성장이나 명예에 이익이 되면 감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높이는 것이라도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은 누가 봐도 비신사적이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양 훔치기’(sheep snatching)나 대형버스가 온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교인 실어 나르는 것을 보고 ‘교회 장사’한다고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렇게 더럽혀지고 교회 전체의 사역이 큰 방해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자행된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교회의 명예보다 ‘우리 교회’의 성장과 영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하나님 사랑이 교회 사랑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수억 원의 돈을 부정하게 쓰면서 총회장이 되거나 기독교 단체의 대표가 되는 것,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비난과 냉소는 정당하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나 교회를 오해해서 그것을 비판한다고 주장한다. 궤변 중에 궤변이다. 하나님 영광과 전체 교회의 명예와 신임도에 큰 해가 되는 것이 자명한데도 그것을 감행하는 것은 명예와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파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인데도 자신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세습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것이 우상숭배고, 그것은 신사참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우상숭배다. 신사참배는 외부 세력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천황을 신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아무 압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직을 매매하며 세습을 감행하는 것은 자발적인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우리 교회 우상’나 성직매매, 세습 등의 배후에 작용하는 것은 ‘탐심의 우상’이다. 바울사도는 엡 5:5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 했고 주님도 마 6:24에서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한국 교회가 섬기는 우상은 대부분 한국 사회가 섬기는 돈, 명예, 권력의 우상과 같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울처럼 세상적인 이익이나 특권을 배설물로 치부한다면 탐심의 우상숭배가 생겨날 수가 없다.


2. 차세중심적 한국적 세계관


돈, 권력, 명예는 오늘날 전 세계,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열심히 추구한다. 그것들은 공유가 불가능한 (zero-sum) 가치들이다. 즉 한 사람이 많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경쟁심이 가장 강한 것과 돈, 권력, 명예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한국인의 이 엄청난 경쟁심 덕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불과 60년 만에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성취하지 못한 두 가지를 거뜬히 이룩했다.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했고 민주화를 이룩했다.

2009년에는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의 회원이 됨으로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6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Korean Dream을 쫓아 한국에 찾아왔다. 과학기술 수준도 세계에서 7위 정도를 유지하고 교육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문화적으로도 한류가 전 세계에 휩쓸고 싸이가 세계 방방곡곡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매우 불행하다. 영국의 레가툼연구소 (Legatum Institute)가 발표한 2011년도 번영지수 (Prosperity Index)에 의하면 한국의 생활만족도 (Average Life Satisfaction)는 세계 110개국 가운데 104번째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8.4명으로 OECD 국가들에서 1위이며 2위인 헝가리의 19.4명과의 차이가 9명이나 된다는 객관적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의 노인들의 경우 10만 명당 81.4명이 자살해서 일본의 일본 17.9명, 미국의 14.1명의 거의 5배나 된다. 경제가 아무리 좋아지고 과학기술과 문화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민이 불행하면 그 모든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데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불행한가?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경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그 경쟁이 공정하게만 이뤄지면 억울한 사람이 생겨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에는 경쟁심은 유난히 강한데도 도덕적 수준은 너무 낮아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질투가 생기고 억울한 사람이 많아지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국제투명성기구는 2012년 한국의 투명성이 세계에서 45위로 아프리카의 보츠와나 30위보다 15위나 뒤떨어진다 했다. 김승규 전 법무부 장관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2000년 한국에서 위증으로 기소된 사람의 수는 일본의 671배이며 무고로 기소된 사람은 무려 4151배나 된다 한다. 탈세율은 26.8%로 그리스나 스페인과 비슷하고 사기보험지출은 일본의 14배, 교통사고 입원율은 일본의 9.5배나 된다. 다른 분야에서는 선진국이나 윤리에 있어서는 후진국이 아니라 야만국에 가깝다. 일본에는 기독교인이 가톨릭을 포함해서 전 인구의 1%정도인데 한국에는 천주교인을 포함하면 27%나 된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이렇게 불투명하고 불공정하다.

이렇게 경쟁심이 강하고 도덕적 수준이 낮은 것은 한국의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간 사회는 이런 저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대부분의 경우 그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종교에 의하여 형성된다.

한국의 세계관은 주로 무속종교와 유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던 것은 불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에 끼친 불교의 영향은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다. 세계문화 분류에서 한국은 불교 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유교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가 가장 최근까지 근 500년을 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가장 크게 남아 있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가장 최근의 지배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이 유일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무속신앙의 세계관과 비슷한 요소가 많기 때문에 유교의 영향이 큰 것이 아닌가 한다.〠 <계속>


손봉호 박사|2014 시드니성시화대회 주강사. 윤리학자이며 사회운동가. 철학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성대학교 이사장과 동덕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에 나눔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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