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사역의 방향을 바꾸라

이민교회교육 갱신전략II-청소년 신학(2)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6/30 [12:15]

지난 호에 ‘청소년’이란 구분이 가지는 문제와 이민사회가 가진 추가 이슈들을 살펴보면서 여섯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이 중에서 처음 세 가지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본다.

1. 전인적 성숙을 위해 원리와 관계를 강조하라

청소년기가 질풍노도의 시기란 말은 급격한 성장으로 자기 몸에 대한 조정 능력이 떨어지고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지적, 정서적으로 주변의 도전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조용히 '순종하는' 십대가 드물다. 문제는 배꼽에 귀걸이를 달고 다니는 아이뿐 아니라 겉으로는 조용한 아이 안에서도 질풍노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들어나지 않으면 나중에 터지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이 점에서 관심은 순종 반응을 가지고 시비하기보다는, 정작 성숙해야 할 부분들이 고루 성숙하고 있는 지에 쏠려야 한다. 당장 눈에 띄는 육체적 성숙과 지적 성숙뿐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잘 다루고 반응할 줄 아는 정서적 성숙,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영적 성숙까지 다 포함된다.
 
육체적 성숙은 충분한 운동과 몸 관리(성교육 포함) 등이 필요하고 지적 성숙은 건강한 정보 접촉기회 제공, 정서적 성숙은 감정표현과 계발기회 제공, 영적 성숙은 신앙이 말하는 다양한 영적 도전을 통해 자신의 영적 소명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분야의 균형있는 발전이 없이는 ‘전인적 성숙’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교회학교와 부모의 역할은? 극단적인 '구조주의적 교육철학'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녀들의 주체적 발달 능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바른 ‘울타리’의 역할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울타리란 따라야 할 (& 넘지 않아야 할) 원리를 제시하고, 좋은 관계를 격려하는 역할이다. 원리 주지란 추구해야 할 목표와 내용을 계속적으로 제시하고 설득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몸의 바른 관리법, 바른 성에 대한 정보, (경제, 정치 등) 세상의 현실에 대해 바른 이해, 다양한 감정의 존재와 장단점에 대한 바른 대처법, 신앙의 기본 원리와 자신의 영적 특성을 발굴하도록 돕는 것이 포함된다. 이를 위해서는 활동 구룹과 배움의 장을 제공하고, 성교육, 몸관리 교육 같은 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신앙적으로 멘토 역할을 할 동지와 선배들을 연결해 주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성문화의 영향 때문에라도 교회학교나 부모의 더 많은 주목이 필요하다. 미디어와 소비문화 속에서 왜곡된 '감각적이고 도구적인' 성문화에 대하여 바른 관점으로 무장시키지 않으면, 성생활, 가정, 건강뿐 아니라 개인 심리에도 큰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성적 욕구에 대한 바른 관리법(육체), 성의 실상에 대한 이해(지식), 성과 관련된 욕구와 감정을 조절(감정), 성의 창조원리에서의 의미와 목적(신앙)을 청소년뿐 아니라, 교사와 부모를 대상으로 한 훈련과 지속적 지원이 간절한 실정이다.

2. 청소년의 영적 자율성, 독립성을 인정하라

지난 호에 언급한 것처럼 그동안 청소년 신학을 정립하려는 시도에서 ‘성경적 토대’를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은 실제로 성경적 관점에서는 청소년기를 다루는 부분이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도리어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청소년기는 두 개로 나눠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아동기’ 말기에 속하는 기간으로, 둘째는 사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 이후다. 전자는 여전히 어린이 신학의 관점, 주로 가정교육을 중심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고, 후자는 성인신앙훈련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시기라는 뜻이다.
 
물론 청소년기 자체가 아동기와 성인기의 ‘혼재’를 의미하기에, 양쪽 모두의 다리를 걸쳐야 하는 부분은 있지만 전반적인 흐름에서는 어느 한쪽을 중심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특히 영적으로 청소년기는 성인으로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성경적 세계관에서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영적 위인들이 청소년기를 기점으로 신앙 여정을 시작했다. 이때 시작된 신앙발전과정은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복음의 약속을 붙들고 씨름하고, 실패하고, 이를 반성하고 다시 은혜 속에서 회복을 시도하고.... 이 점에서 청소년이나 70살 먹은 노인이나 공감할 수 있는 영적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래서 청소년을 ‘아이’로 취급하는 한국문화와 이민교회는 보다 과감한 ‘성인 취급’이 필요하다. 특히 이들의 독립적인 영적 욕구를 존중하고 자율적 기회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울타리’로서 긴장을 풀지 않고 바른 진리로 '보호하려는' 의지는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주도권과 실수'에 대한 보다 큰 관용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실수가 배움의 기회가 된다'는 확신으로 엉성한 이들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받아주고, 용서해주고, 다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 보면 기대치에 못미치고, 반응 속도가 늦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 기성 프로그램의 무조건적 반복이 아니라, 청소년이 주도하고 기획하고 실험하는 활동을 관용하고 격려하고 투자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혼란'의 위험이 분명히 있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학생 중에서 좀 더 '신앙적 성숙'으로 무장된 핵심 리더구룹이 자리를 잡아주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히 모태신앙이 많은 경우에도, 구체적인 복음 전도와 결단을 끌어 내고, 엄밀한 제자훈련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개성이 강한 세대적 특성상, 다수를 대상으로 한 훈련보다는 개인별, 소구룹별 훈련과 계속적인 멘토링을 통한 신앙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3. 건강한 친구 구룹 형성을 위해 지원하고 투자하라
 
이것은 앞에서 말한 첫 번째 제안 중에서 이미 언급한 세부사항이기도 하다. 많은 교육심리학자들은 청소년 시기에 가장 큰 영향력은 '소속 집단'에게서 온다는 점을 자주 지적해 왔다. 정서적 기초를 놓는 유아기나 지성적 기초를 놓은 아동기에는 주로 부모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청소년기에는 이런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또래 집단에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
 
여기서 말하는 또래 집단은 자기와 비슷한 관심나 목표, 이해를 나누는 집단을 말한다. 그러나 반드시 같은 연배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서열문화가 약한 서구사회에서는 나이보다는 실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정서에 의해 구룹이 만들지기도 한다. 어쨌든 청소년기 성장의 핵심은 '어떤 친구'를 만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신앙적으로도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가정이나 교회학교가 청소년들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건강한 구룹'에 속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 말은 중고등부 행사를 더 지원하라는 이야기와는 같은 뜻이 아니다. 지금까지 청소년 관련 교회지출은 주로 중고등부 예배, 선교, 캠프 같은 활동에 집중되어 왔다.
 
다시 말해 평가의 기준이 '활동'과 그 활동이 만들어내는 (주로 분위기와 숫자로 표현되는) 성과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활동은 도구일 뿐이다. 초점은 '좋은 구룹'이 만들어지는데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평가하는 것은 구체적 기준을 세우기 쉽지 않지만, 필자의 경험상 주로 네 가지 요소로 정리해 본다. 1) 모임의 원리가 바로 선포되고 공동체 안에서 공감이 확인되었는가? 2) 모임의 리더쉽(모델)이 건강하게 세워졌는가? 3) 모임이 서로를 섬기며 배려하고 있는가? 4) 모임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배워나가고 헌신하려고 하는가? 어떤 모임이나 활동을 해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을 통해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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