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보며 서울 읽기

편집인의 모국 방문기

김명동/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6/30 [12:33]
시드니서 서울은 8,635km 떨어져 있다. 점보기로 열 시간은 날아가야 하니 멀기는 참 먼 곳이다. 한국서 호주에 이주한 분들의 시계는 그분들이 온 시점에 멈춰있다는 말을 한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한국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가 떠나온 시점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80년에 이민 온 분들은 80년의 사고를, 90년에 이민 온 분들은 90년의 사고를 갖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지구촌이 한 울타리가 되고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호흡한다 해도 시간적 거리감을 메우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한국처럼 변화가 심한 사회는 외국에 사는 이민자들을 어리벙벙하게 하기 일쑤다. 기자가 이런저런 일로 수차례 한국을 갔지만 갈 때마다 달라지는 모국의 풍경과 문화에 당황하는 일이 생긴다. 덕분에 한국에 들어갈 때면 ‘이번엔 뭐가 달라졌을까’하며 궁금해지는 버릇이 생겼다.
 
지난 5월 10일부터 6월 7일까지 모국방문을 하면서 다양한 풍경들을 수첩에 담았다. 한국에서 줄곧 살았다면 대수로울 게 없겠지만 객지 생활을 하다 들어간 기자의 눈에는 흥미진진한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서울의 입구를 들여다보다


서울역과 남대문 사진을 뺀 서울의 화보를 상상할 수 있을까?
 
▲ 지난 2008년 방화로 소실되었던 숭례문(남대문)이 5년여 간의 복원공사 끝에 지난해 5월 완공됐으나 숭례문 복원에 온갖 비리와 불법이 총동원되어 관계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 크리스찬리뷰

금세 외로워진다는 서울역 앞에 섰다. 서울역의 역사는 경성역으로 시작한다. 1925년 9월 지은 경성역은 광복 후 서울역이 되어 근현대사의 질곡을 겪어냈다. 지상 2층에 지하 1층의 건물 중앙엔 비잔틴식 돔을 얹고, 지름 1m가 넘는 시계가 걸렸다. 경성역이 지어질 당시 모습과 주변 풍경은 박태원의 단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자세히 묘사되었다.
 
1930년대 경성 거리를 쏘다니던 구보 씨의 발걸음은 경성역 3등 대합실까지 미친다. 구보 씨는 지게꾼, 유랑민 등 고독하고 쓸쓸한 이들과 조우한다. 소설가 박태원의 눈에 비친 경성역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소외된 이들의 슬픔 아픔이 북적거리며 공존하던 곳이다.
 
이제는 경성역도, 서울역도 없다. 서울역의 업무는 새로 지은 서울 통합민자역사 건물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당시 붐비던 옛 역사는 시민들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재 단장됐다. 그래서 지금은 ‘문화역서울 284’라고 불린다. 284란 사적 284호로 지정된 국가문화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옛 서울역사에는 떠나지 않은 이들이 머물고 있다. 노숙자들이다. 그들의 슬픈 눈빛을 뒤로 하고 남대문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숭례문은 지난 2008년 초 화재로 소실됐다가 5년간의 복원 공사 끝에 지난해 5월 완공했다.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랬던 숭례문이 곧 기둥이 갈라지고 단청이 떨어져 내렸다. 나라의 자존심이었던 숭례문은 세계인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 국민은 숭례문이 불탔을 때만큼이나 속이 타들어갔다. 숭례문 복원에 많은 국민들이 성금을 보냈던 터라 분노는 더욱 컸다.
 
결국 검찰의 조사가 시작됐다. 조사결과 숭례문 복원에 온갖 비리와 불법이 총동원됐다. 완공을 앞당기기 위한 무리한 공사단축과 공사담당자의 부정부패, 이를 감독해야 할 공무원과 업자 간에 뇌물수수 등 각종 비리가 드러났다. 참으로 망연한 심정이다.
 
홍창원 단청장(중요문화재 제48호)은 단청 복원과정에서 값싼 화학접착제를 사용하면서 3억여 원의 부당이익을 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기 등의 혐의로 현재 불구속 기소됐고, 신응수 대목장(중요문화재 제74호)도 숭례문에 쓰일 나무를 빼돌린 혐의(횡령)로 재판 중이다. 참으로 역사적인 유적에 대한 우리의 안목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재는 적게는 수백 년, 많게는 수천 년 세월의 풍상을 용케도 견뎌낸 살아있는 화석이다. 우리의 발자취이며 옛 조상들의 숨결이다
 
프라하에는 소설가 카프카가 살았다. 카프카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프라하의 뒷골목에는 가난에 쪼들려 살았던 그의 손위 누이의 집과 더불어 좁디좁은 골목길 전체를 그대로 보존시키고 있다. 그 좁은 골목은 언제나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로 몸 돌릴 틈조차 없다.
 
중국 북경에 자리 잡은 자금성에 비해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들이 대만에 있다지만 우리는 차라리 보물을 보러 대만을 가기보다는 텅 빈 자금성 쪽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그 보물들을 간직했던 공간의 역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중국인들의 숨결을 느끼고 찾기 위함이 아닌가.
문화재에 대한 수리 및 보수를 국가에서 직영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문화재 보수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공사형태 회사를 만드는 것도 좋을듯싶다. 그런데 정부는 문화재 수리를 영리 추구를 앞세운 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사실상 문화재가 돈벌이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익을 추구하는 민간에게 넘긴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지 않은가.
▲ 교통카드  

멋진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

모국 방문을 하면서 가장 큰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 서울의 대중교통 시스템일 것이다. 한 장의 교통카드로 버스, 지하철, 택시 심지어 공중전화까지도 이용이 가능하다. 교통카드는 충전하여 계속 사용할 수 있고, 인천ㆍ경기 심지어 천안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 엄청난 혜택이다. 뿐만 아니라 버스 정류장에는 컴퓨터 스크린이 있어 버스의 행선지와 현재 위치, 도착하는 버스번호와 함께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 등을 알려준다. 교통이 불편한 곳에는 마을버스가 있는 것도 장점이다.
▲ 서울의 출퇴근 거리와 지하철은 공짜 신문들이 넘친다.  

서울에서 출퇴근 시간 지하철을 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공짜 신문들이다. 메트로와 포커스 등인데 초기 공짜 신문들은 사람들이 직접 배포했지만 이젠 대부분 전용거치대에 신문들을 놓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집어간다. 서울엔 이 같은 공짜 신문들이 아침에 대 여섯 종류 저녁에 두 종이 배포되고 있는데 이 공짜 신문들 때문에 스포츠신문을 비롯한 레저성격의 신문들이 큰 타격을 입고 있다고 한다.
 
글쎄, 공짜라고는 하지만 광고 비중이 70%에 달하고 정보의 가치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공짜 신문의 홍수는 자원낭비의 측면에서 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폐지 처리에 골머리를 앓는 지하철에는 선반에 신문을 올려놓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고 있었다.
 
▲ 약냉방차  

전동차 공간은 참 널찍널찍하고 아주 쾌적해 보인다. 그런데 대부분이 고개를 숙인 채 뭔가에 몰두하고 있다. 스마트 폰과 노느라 바쁘다.
 
그런데 지하철 역사엔 근무자를 보기가 어려웠다. 모든 시스템이 기계화 자동화되다보니 사령부에서 기계작동을 하고 모니터만 관찰하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사람의 눈길이 없다 보니 늦은 밤이나 새벽녘 한산한 시간대에 지하철의 안전범죄가 빈발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또 한가지 문제는 기자처럼 장기간 외국에 있다가 온 동포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이다.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바뀐 시스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교통카드 구입부터 교통카드 충전까지 물어볼 사람이 없다. 그나마 동포들은 살아본 경험이 있고 모니터에 또는 한글 안내를 보고 대충 해보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쓰러 왔으니 택시타고 다녀라, 하면 될까? 하지만 지하철 문화도 좋은 관광거리인데 국가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면 좀 더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약냉방차’라는데 시선이 꽂힌다. 어라, 저건 무슨 뜻일까? 약이 되는 냉방차라는 소리인가. 순간 머리를 굴렸다. 혹시 그런 뜻이 아닐까. 역시나 맞다. 약 냉방차(弱冷房車), 약한 냉방을 원하는 승객들이 골라 탈 수 있도록 친절한 표시를 한 것이다. 서울사람들에겐 익숙한 것이지만 시드니 같은 촌 동네서 살다온 동포들의 입장에선 오호라, 감탄사가 나올 만한 고품격의 서비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는 법, 서울역에서 1호선과 4호선 지하철 타는 곳에 가기 위해선 밖으로 나가 계단을 한참 올라간 후 200m 이상 이동해야 지하철역에 갈 수 있었다. 장애인은 물론이고 노약자도 쉽지 않은 이동거리이다. 이처럼 환승구간의 이동거리도 긴 곳이 많았다. 그러고 보면 시드니 전철의 장점은 효율성이다. 환승하기가 편리하다는 것이다. 가령 승강장에서 내려서 맞은편으로 몸만 돌리면 갈아탈 수 있는 곳들이 꽤 된다. 복복선 체제여서 급행과 보통열차가 승강장 양옆으로 동시에 진입하기 때문에 목적지에 빠른 접근이 가능하다.

▲ 스크린 도어  

예나 지금이나 서울은 복잡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서울 지하철 역사 대부분에 마련된 스크린 도어이다. 이것이 설치되고 승강장에서 떨어져 전동차에 치이는 끔찍한 사고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됐다. 가까이 다가갔다. 아름다운 시 한편이 새겨져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지하철을 기다리다 이렇게 시 한편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 강촌역  

사실 강원도 강촌역에는 기자의 졸시 ‘불법체류자’라는 시화가 걸려있다. 작년 4월 세계한인언론인대회 참석차 서울에 갔을 때 잠시 강촌역에 들러 시화 앞에서 사진을 찍고 몇 번이나 시를 읽으며 가슴이 훈훈했는지 모른다. 지나가는 여행객을 붙들어 놓고 설명을 해주면서.
 
서울 지하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쾌적하고 위생적인 화장실이다. 특히 한국철도공사(Korail)가 관리하는 수도권 신규 역사의 화장실은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훌륭했다. 특급호텔 화장실이 아닌 가 착각할 정도였다.

고향의 먹거리

모국을 방문한 즐거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먹거리이다. 특히 이민 살이란 아무리 사는 곳에서 맛난 것을 먹어도 모국 땅에서 먹는 것과는 견줄 수 없는 법이다.
 
모국의 음식에서 맛 못지않게 감동적인 것은 역시 가격이 아닐까 싶다. 일단 세계에서 물가가 비싼 곳 중 하나인 시드니에서 날아온지라 음식가격에 대한 ‘체감온도’는 아주 리얼했다. 달러와 원화의 환율까지 고려하면 어지간한 가격도 별게 아니네 하고 휘파람이 나왔으니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얘기지만 시드니의 식당가에서 싸다고 할 수 있는 우동, 짜장면이 보통 12달러, 우리 돈으로 만 원이 훨씬 넘는다.
 
그런데 동대문의 한 식당에서 선전하는 콩나물밥 웰빙 식사 가격이 3천 원이다. 해장국 종류는 보통 8천 원 정도이고 짜장면이 5천 원 정도다. 길거리에서 파는 오징어 군밤이며 추억의 노점상도 모처럼 대할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시드니에선 김밥이 보통 한 줄에 4달러 한다. 우리 돈으로 4천 원이 좀 안 되는데 한국에서라면 기절초풍할 가격이다. 그나마 이것은 보통 김밥이고 참치나 오징어 볶음 등 재료가 업그레이드된 김밥은 5달러로 더 뛰기 마련이다.
 
한국에 온지 며칠 안 되어 약간 시장기가 돌아서 눈에 띄는 분식집에 들어가서 김밥을 먹었다. 김밥 한 줄에 1500원이다. 정말 착한 가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김치와 단무지를 곁들어 편하게 앉아서 먹었다.
 
그런데 다음날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전율했다. 단속반이 한 단무지 제조업체에 들이닥쳐 단속하는 장면을 방송했다. 공장 안에 들어서자 시큼한 식초 냄새가 풍겼다. 바닥에는 단무지 제조과정에서 나온 노란 물과 흙탕물이 흥건하게 고여 걸음을 뗄 때마다 철벅거렸다. 마스크나 장갑 등 위생장비는 갖추지 않고 작업 중이던 여직원 3명은 단속반이 방문하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공장 한 켠 작은 골방에서는 색소를 탄 물을 단무지에 부어 노란 물을 들이는 공정이 진행 중이었다. 색소물이 담긴 검은색 고무 수조 옆에는 빙초산 등 각종 식품첨가물이 뜯겨진 채 포대째 놓여있었다. 색소 물을 휘저은 것으로 보이는 막대에는 각종 이물질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청소되지 않은 바닥에는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고 작업이 한창이던 기계는 이물질이 곳곳에 끼어 녹이 슬어있었다. 공장장은 변명하고 있었다.
 
“우리만 이러느냐, 다 이렇게 한다”
 
요즘 한국 텔레비전에서는 건강과 먹거리에 대한 프로를 많이 방영한다. 몰래카메라도 등장해 현장을 리얼하게 고발한다. ‘먹거리 X파일’이란 프로가 공개한 설렁탕과 육개장 그리고 갈비탕과 떡갈비 등은 충격적이었다. 식당 80% 이상이 인스턴트 육개장과 설렁탕이라는 것이다. 즉 진공 포장된 설렁탕과 육개장을 구입해 끓이기만 하는 것이다. 유명식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제는 가공 업체였다. 이 프로에 나와 고발하는 한 전문가는 포장된 그곳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가 문제라면서 가공업체를 급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생시설은 엉망이었고 육개장에 들어가는 기름은 값 싼 소 콩팥기름이었다. 전문가가 소 콩팥기름을 실험했다. 소 콩팥기름을 그릇에 붓고 5분 정도 지나자 숟가락으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해졌다. 여기에서 전문가는 이것이 우리 몸에 들어가면 비만은 물론 협심증, 중풍 등을 일으킨다고 경고했다.
 
갈비탕에 들어가는 갈비는 갈비가 아니었고 떡갈비는 토끼고기도 섞어 있었다. 심지어는 호주산 소고기에 한우 기름을 주사기로 넣는다고 했다. 폐사된 돼지, 병든 돼지와 오리 등도 적발되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이 불가사의 일

기자는 뜨끔한 가슴과 철렁 내려앉는 심사를 감추지 못했다. 모국을 방문하면서 너무 육개장을 많이 먹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막말로 기자가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면 그 가공업체를 걸어 목숨 값 내어놓으라고 송사를 벌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보건복지부인지 보건사살부인지 기다렸다는 듯이 업자 편을 들고 나서겠지. 그동안 얻어먹은 게 많은지 어떤지 그놈의 뱃속을 알 길은 없지만 국민의 보건을 위해 존재하는 보건복지부가 업자를 감싸고도는 걸 보니 그런 뱃심이 아니면 왜 불구경만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러나저러나 심심찮게 터지는 불량식품 사건을 지켜보는 국민들이 매일매일 무엇을 먹기에 저리 멀쩡하게 살아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설마 대한민국의 인구가 너무 많아 부동산이 저 지경이고 젊은이들의 목청이 저리 높으며 근로자들의 혈기가 방만하다고 여겨 얼마쯤은 인구를 감소해야할 복안을 정부와 기업이 세운 건 아니겠지.  
 
▲ 서울에서 유통되는 고급 외국산 양주는 상당수가 가짜라고 한다. 사진은 경찰에 적발된 가짜 양주 제조기.    

“서울에 있는 고급 외국산 양주 가운데 상당수가 가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렇게 말문을 꺼낸 사람은 소비자 고발 프로에 나온 전직 양주 취급업자였다.
 
“진짜 양주 한 병이면 가짜를 네다섯 병 만들죠. 병 밑을 기술적으로 달구어서 주사기로 진짜 양주를 빼내는 겁니다.”
 
부정주류 유통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손님들이 먹다 남긴 양주를 섞어 완벽하게 새 제품같이 만든 후 다시 손님에게 내놓는 업소도 많다는 것이다.
 
아나운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습니까? 술맛을 아는 사람이나 전문가라면 쉽게 알아낼 거 아니냐고요”
“가짜 휘발유를 넣고 자동차가 쌩쌩 굴러가는 세상입니다. 실험실에 가서 정밀검사를 하기 전에는 웬만큼 그 바닥에서 굴러먹은 사람도 분간 못할 정돕니다.”
 
껌이 이빨에 유해한지 정밀검사를 해보았는가? 어린이들이 먹는 과자와 사탕이 어린이의 건강을 해치는지 검사해 보았는가? 수돗물이 얼마나 인체에 영향을 끼치는지 목숨을 걸고 조사해 보았는가? 공해 배출하는 업체를 정밀진단하고 항시 감시해 보았는가? 화장품이 인체에 해로운 것인지 과학적인 조사방법으로 연구하고 검토해 보았는가?
 
의약품이 품고 있는 독극성을 충분히 실험하고, 적정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실체 파악을 양심적으로 하고 있는가? 담배처럼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국민건강을 지켜야 할 정부가 관리하여 세수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게 진정 선진화인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진다면 석 달 열흘 가지고도 모자랄 것이다. 과학자들은 무슨 흥정이 오갔는지 입을 다물고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기에 뒷짐을 지고 있으며 정부 당국자는 무슨 뱃심이 있어 예산타령만 하는지 모르겠다.
 
▲ 채널A 프로그램. 외식업계에 만연한 불량 식재료 사용 실태를 고발하며 좋은 재료를 쓰는 ‘착한 식당’을 찾아내 소개한다.    

한 때는 갓난애들이 먹는 베이비 이유식을 가짜로 제조하여 방부제를 듬뿍 넣어 유통시킨 독한 상술도 있었고, 비료 주어 키운 콩나물, 대장균 득실거리는 음료수, 벌레와 머리카락 든 과자, 석회 섞은 두부, 물감 탄 가짜 고추 가루, 바닷물에 유해색소 푼 간장, 물감주사 놓은 수박, 유해물감 칠한 생선 따위가 판을 쳤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상품들이 사라졌다고 장담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니 어쩌면 더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유해 상품을 만들지도 모른다. 양잿물 든 식초가 유통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들은 사람을 천천히 죽이고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국민들은 현미경과 가짜방지를 위한 실험도구와 방독면 따위를 소지한 채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시간이 멈춘 종로이발소

빨간 페인트로 ‘이발소’라고 적힌 간판 아래 낡은 이발소 표시등이 어지럽게 빙빙 돌아간다. 창문에는 이발 3천 원 염색 2천500원이라고 쓰여 있다. 시드니에서는 이발비가 15달러, 우리 돈으로 1만 4천 원쯤이다. 염색 약값도 15불이다. 이게 웬 떡이냐며 이가 맞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푹신한 이발의자 앞에는 제법 잘 닦아놓은 대형 거울이 걸려있고, 거울 밑으로는 바리캉(프랑스 바리캉 제조회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면도기 같은 이발기구들이 즐비하게 놓아져 있다.
▲ 남이섬에 전시되고 있는 추억의 모습들 중에서 종로이발소. 이곳에는 60-70년대 일상생활에 사용하던 각 분야의 소품 1만여 점이 2000년 3월부터 ‘추억의 그 시절’이란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서울 시내 한복판, 예전의 이발소의 모습을 그대로간직하고 있는 종로 3가 옛 단성사극장 뒷골목의 종로이발소에 들어섰다. 이발사는 머리를 다듬느라 정신없다.
 
이발사: 요즘 정치인들은 다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손님: 그러게 말이야. 뭐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만 손해보고 사는 거지 뭐.
 
이발사: 사람들을 뽑을 때 잘 뽑아야 해요. 나는 무조건 귀가 큰 사람만 뽑습니다.
 
손님: 왜? 우리같이 어렵게 사는 사람들 얘기 많이 들으라고?
 
이발사: 아뇨. 귀가 큰 사람들이 대체로 머리가 좋아요. 제가 관상학 좀 공부했거든요.
 
손님: 그럼 한번 내 관상 좀 봐줘 봐.
 
이발사: 할아버님은 인상이 좋으셔서 항상 복이 따르네요.
 
손님: 허허. 머리 깎으면서 이래저래 좋은 얘기도 듣고 재밌네 그려. 원래 이렇게 아는 게 많아요?
 
이발사: 아뇨. 할아버님이 복 받으신 거지. 나 아무한테나 이런 얘기 안 해요.
 
정치인 이야기에서 갑자기 관상학으로 화제가 바뀌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이곳의 풍경이다. 이발사의 손을 몇 번 거치자 기자의 얼굴이 훤해졌다. 그런데 온갖 옛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책 한 권과도 같은 추억의 이발관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 죽암고속도로 휴게소    

서울 방문 중에 꼭 한번 들르고 싶었던 곳 중 하나는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이것저것 거리들이 있는 옛 추억의 정취도 있지만 갈 때마다 산뜻하게 진화하는 풍경 때문이다. 십수년 전만 해도 고속도로 휴게소는 복잡하고 깨끗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이젠 놀라울 정도로 청결하고 세련된 곳으로 변했다. 화장실의 핸드 드라이어도 처음엔 이게 뭔가 했다. 휴게소에는 너무 먹을 게 많아서 눈으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울 정도다.
 
▲ 금강 휴게소의 만물상

요기를 달랜 후 밖으로 나오니 주차장 한 편에 수십 년 전이나 변함없는 풍경이 있었다.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만물상 가게이다. 이런 곳의 수입이 상당이 짭짤하다고 하는데 기자는 이곳에서 CD 한 장을 샀다. 김지애 히트곡 모음집이다. 시드니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 내에서 김지애 노래를 들었는데 그렇게 기자의 가슴을 울렸던 것이다.

김옥균의 후손은 없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배우 신성일이 ‘한밤의 TV연예’ 리포트와 인터뷰한 것이 방영됐다. 집을 비운 사이에 도둑이 들어 금품을 훔쳐갔다고 전했다.
 
▲ 김옥균  

그러면서 김옥균의 친필 액자도 도둑이 다 가져갔다며 울분을 토했다.
 
기자는 TV를 시청하면서 한 장의 사진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시골집 벽에 유일하게 걸려있던 한 장의 사진, 그 사진 밑에는 고균 김옥균이라는 글씨가 함께 붙어있었다. 그러나 그가 누군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을 텐데 의사였던 아버지는 6. 25전쟁 때 북으로 끌려가셨다. 내 나이 한 살 때였다. 그리고 그 사진은 지금도 내 서재에 걸려있다.

김옥균이 누구던가?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혁파 정치인 김옥균(1851- 1894)은 ‘역사의 혁명가’로 ‘시대의 이단아’로 평가가 엇갈린다. ‘근대화의 선각자’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 있기도 하다.
 
공주시 정안면에서 태어난 김옥균은 학문과 시서화에 두루 탁월했다. 22세에 장원급제해 관료로 나섰고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갑신정변은 일본과 중국의 선진 문물을 보고 조선의 현실을 깨달은 그가 조선의 개화를 추진하다가 수구파에 의해 좌절되자 일으켰던 무력혁명이다. 김옥균은 그 후 일본으로 망명해 낭인처럼 떠돌다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살해당해 능지처참 됐다.
 
▲ 충남 공주시가 김옥균을 조명하기 위해 개최한 특별전 포스터  

그런데 최근 충남 공주시가 그를 조명하기 위한 ‘김옥균 일본망명 10년의 기록’ 특별전을 마련했다. 생애를 소개한 코너에는 1935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옥균은 일본이 동방의 영국이라면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유일한 야심이었다’는 서재필 박사의 글 ‘회고 갑신정변’이 소개돼 있다.
 
공주시는 전시에서 다양한 사료를 통해 김옥균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전시관 한 쪽에는 김옥균이 1889년 고종에게 올렸다는 상소문의 내용이 내걸렸다.
 
 ‘갑신년의 거사는 나라를 위한 거사였거니와 일본의 힘을 빌린 것에 대해 비평하는 자가 있으니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 부득이하여 한 일입니다. 신을 역적이라고 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청은 조선을 보호해 줄 힘이 없거니와 일본도 믿을 바는 못 됩니다. 지금 폐하는 어떤 방책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어 가십니까.’
 
한편 김옥균은 박영효와 함께 우리나라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해 태극사괘로 ‘태극기’를 고안해 내, 1883년 1월에 정식 우리나라 국기로 공포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필자는 기회가 된다면 김옥균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다. 김좌진에 대해서도.
 
어쨌든 시드니는 오후 5-6시만 되면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렇게 썰렁할 수가 없다. 반면 서울은 24시간 오픈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최소 200m 간격으로 하나씩 있는 편의점의 엄청난 근접성은 실로 대단하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스타킹에 구멍이 나거나 휴대폰이 꺼져도 걱정 없는 무적의 도시, 서울! 〠

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