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이스라엘아!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7/28 [11:05]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교전이 13일째로 접어들었다.  양측의 사망자수가 4백 명을 넘어서고 부상자수도 3천200명이나 된다. 사태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세계의 여론도 급속히 우려 일변도로 방향을 잡고 있다. 이집트도 프랑스도  화해를 성사시키지 못한 그곳을 향하여 지금 미국무장관이 날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절제를 잃고 거의 학살수준의 만행을 계속하고 있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스라엘인들 중에는 가자가 내려다 보이는 스데롯 언덕에 소파와  의자를 놓고 맥주를 마셔가며 가자에 명중되는 자국의 포탄들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있다. 해외 언론들은 이를 스데롯 시네마라고 부른다. 뜻있는 유대인들이 가자를 해방하고 학살을 중지하라고 외치지만 이들의 외침은  강경파 유대인들의  함성에 묻혀 어떤 반향도 가져 오지 못하고 있다.
 
1994년 양측의 평화를 위해 노력한 대가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바 있는 시몬 페레스 대통령은  임기만료 1주일 정도를 남겨 놓고 있긴 하지만 벤쟈민 네타냐후 수상의 강경일변도 댓쉬에 아무런 제동도 걸지 못하고 있다. 열차는 속절없이 폭주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 오랜 세월동안 명멸한 세계의 모든 강대국들로부터 빠짐없이 짓밟힘을 받고 고난과 형극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 세계 전역에 마치 씨뿌림을 당하기나 한 것처럼 흩어졌다고 하여 디아스포라라는 슬픈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운 것일까. 당한 만큼 반드시 되돌려주겠다는 피의 보복의 당위성만을 배운 것일까. 함께 살고 함께 어우러지는 기쁨은 결코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백성들이 끌려가거나 쫓겨나고 나라 땅은 앗수르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유대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을 때도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고국으로부터 쫓겨나고 끌려가 바벨론의 강가에 세워진 난민촌 텐트에서 눈물흘리며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 은과 놋과 철의 나라.
 
이들로부터 이스라엘은  또 한 번 모진 시련을 당해야 했다. 로마에 대한 투쟁이 마사다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리자 소요를 우려한 로마는 그들을 모두 해외로 추방시켜버렸다. 이후 아랍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정복되고 통치받으면서 그 땅은 완전히 아랍화되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은 그곳에 없었다. 유대인들도 없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가 되어 러시아에서부터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  뿔뿔히 산개되었다. 히틀러와 독일로 인한 홀로코스트는 유럽에 자리잡은 그들에게 가해진 믿을 수 없는 폭력이었다.
 
정복자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을 그들만큼 뼈저리게 체험한 민족이  없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하여 무차별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게토속에 갇혀 살았던 그들이 가자지구나 서안에 콘크리트로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치고 출입을 제한하고 물과 전기와 돈과 물자를 차단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 철조망 울타리 안에서 입추의 여지가 없는 인구밀도와  50%가 넘는 살인적인 실업률과 하루 1$에 불과한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들이 믿는 구약 성경을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있다. 그 속에는 그들의 조상들이 해낸 가나안 정복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어렸을 때 나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스토리가  너무나 재미있었다. 여리고성을 빼앗는 이야기나 기브온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전투에서 태양을 멈추게 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원주민들을 완전히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지시도 전혀 거부감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전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어릴 때 내가 하던 땅따먹기가 아니었다. 사이다 뚜껑으로 영토를 넓혀 가며 놀다 해가 지면 발로 슥슥 치열했던 금을 지워버리고 엄마가 부르는 집으로 뛰어가면 그만인 그런 놀이가 아니었다. 사람이 피를 흘리며 비명 가운데 죽어 가고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지고  모든 것이 파괴되는 그런 것이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을 지시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자기 백성에게 미칠 가나안의 영향을 우려한 하나님의 지혜였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택한 백성을 위해 일반사람들이 누릴 보편적 은혜를 잠시 유보시키는 하나님의 행위(Praxis Dei)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볼 때  그때의 가나안은 선진국이었다.
 
그들에게는 안정된 산업이 있었다. 견고한 성과 집이 있었다. 그들은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문명인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후진국의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하나 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그 신앙마저 가나안의 부유를 낳게 한 잡신들에게 현혹되어 버릴까봐  하나님은 불가피하게 그들을 멸절케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이 선진국이다. 그들의 국민소득은 3만 불이 넘는다.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자랑한다. 그들에게는 알차고 안정된 산업이 있다. 우세한 국방력을 가졌다. 전 세계의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디를 보나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문명의 온기를 버리고 야만의 폭력으로 상대를 학살하고 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탈리오의 법칙은 원래 보복과 응징에 개입되기 마련인 과도한 흥분을 제거시켜 일정 정도의 보복 혹은 동일한 상해 이상을 가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지나친 보복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그어놓은 선마저 아무런 가책없이 넘어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절제를 잃었다.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분별없이 행동한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고 철없는 아이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필요 이상  잔인한 나라들에 대하여 경고했다.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한 다메섹(앗수르),  계약을 저버리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긴 가사(블레셋)와  두로,  긍휼을 버리고 형제를 칼로 쫓으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끝없이 분을  품는 에돔,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른 암몬,  에돔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든 모압  등등이 도에 지나치는 잔인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불을 받은 나라들이다.
 
공교롭게도 이 잔인한 나라들의 행위가 하나같이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과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하나님의 불이 가차없이 이스라엘에 쏟아지지는 않을까.
 
나는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가 잃어 버린 것 중의 하나가 눈물이며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하고 필요한 일인지를 설교했다. 예레미야를 이야기하면서 그는 멸망을 목전에 둔 조국을 위해 얼마나 울었던지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오늘 이스라엘에는 예레미야 같은 이가 없는가. 없다면  좋다. 내가 대신 울어 줄게. 이제 그만해라.〠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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