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멀티센서리 예배인가?

양념 찍어 먹기 식 종교 A Dip-Dip Religion

문문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7/28 [11:34]

폭발 직전의 무도회장(舞蹈會場), 하지만 진수성찬에 잘 익어 향취 나는 와인에다 흥겨운 음악과 춤도 있는데 이 무대를 어찌 떠난단 말인가?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즐기자. 그러다 폭발할 기미가 보이면 그때는 비상구 문 쪽에서 계속 춤을 추면 된다. 시드니 목회 시절, 매주일 소개한 나의 주보 반쪽자리 칼럼 중 한 구절이다.
 
독버섯이 자라고 있다
 
프랑스의 자크 아딸리(Jacques Attali)는 21세기 사회를 마치 위험을 무릅쓴 채 달콤한 재미에 빠진 ‘폭발 직전의 무도회장’에 비유한다.
 
배가 뒤집히고 배 안에 갇힌 젊은이들이 살려달라 외쳐도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수많은 영혼들을 잃어버린 우리 한국사회 리더들의 수치... 아딸리가 염려하는 사회 한 면을 보는듯하여 참으로 안타깝다. 이 시대 사람들의 신조(信條)에 독버섯이 자라고 있다. 돈이 신경(信經)이요 신조(信條)가 되었다.
 
한국 사회 정서, 중증 상태에 빠졌다. 돈이 얼굴을 내미는 곳이면 신앙도 맥없이 고개를 떨군다. 하여 우리는 요즈음 뼈아픈 교훈을 배우는 중이다. 차제에 지난 30년 동안 한국사회 울타리 밖에서 살아온 한 사람으로 한국교회를 향해 질문한다.
 
“비리왕국 사회 가운데서 교회는 혹 바리새인들과 손잡고 교회당을 건축하지는 아니하였나?” “과연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지친 영혼들을 살리는 감동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가?” “오늘의 한국 강단, 영양부족 상태를 만난 것은 아닌가?”
 
소위 ‘멀티센서리 예배’(Multisensory Worship) 를 소개하기 전 목회의 현장인 이 시대 사회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
 
마이클 거버(Michael Gerber)는 지난 20년간 지구촌 변화는 과거의 2천 년 동안 일어났던 변화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오는 세대는 비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사회신조에 큰 변화가 일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의 의식구조 변화는 놀랍게도 가속화되고 있다고 사회 전문가들은 말한다. 조지 바나(George Barna)의 통계는 이 시대 교회제도를 혐오하여 사이버 신자로 전향하는 이들을 일컬어 ‘망명(亡命)중인 신자들’(The Exiled Believers)이라는 별명까지 붙어주었다. 국가 간의 분쟁, 자연재난과 환경파괴, 그릇된 사회 구조 등으로 쌓아 올린 지구촌 물질주의 바벨탑 무너지는 소리에 이 시대 현대인들은 두려움으로 혼란스럽다.
 
문화의 충격 시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믿지 않는다.” 
 
얼마 전 영국의 보도처럼, 교회보다는 경찰과 병원 그리고 헬스클럽이 더 신뢰할 수 있는 사회적 믿음의 대상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는 마치 “방에 갇힌 거대한 코끼리(The great elephant in the room)가 신음하는 모습과도 같다”고 비유한다. 
 
사회학자들은 “기독교 왕국의 시대는 죽고, 후기 기독교시대가 도래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 2의 아테네 무대’가 도래하게 된다는 말이다. 각자 믿는 신조가 너무나 많고 달라, 바울 당시 3만여 개에 달하는 우상이 즐비했던 아테네 마르스 언덕(Mars Hill in Athens) 바로 그 시대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당시 “아테네에는 우상 찾기가 사람 찾기보다 더 쉬었다”라는 말도 있었던 것처럼, 이 시대 인류는 종교를 선택하되 어쩌면 제 입맛에 따라 ‘양념 찍어 먹기 식 종교’(A dip-dip religion) 혹은 ‘퓨전종교’(A fusion religion)를 선호한다. 이러한 이유로 21세기의 기독교는 ‘럭비경기 시대’가 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길쭉한 럭비공이 날아올 때는 다른 공과 별다른 것이 없지만 일단 땅에 떨어져 한두 번 튀기 시작하면 그때는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가속화된 사회적 증상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 문화의 충격 시대를 의미한다. 이 말이 맞는다면, 교회는 포기할 수 없는 사목을 위해 럭비 선수들처럼 훈련에 임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목회, 결코 방심할 수 없다. 과연 미래의 목회, 대책은 있는가? 아딸리(Jacques Attali)의 해답은 사회학적 박애의 사목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갈수록 더욱 더 발전하는 인류 사회 가운데 인간의 정서와 사랑에 가뭄을 만나 향수(鄕愁)에 심각한 고통을 겪는 사회를 내다본다. 이러한 사회를 치료하기 위한 종교는 인간의 정(情)에 호소하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정한 정보홍수와 멀티미디어 파도 가운데서 종교는 정서적 파도타기 서핑을 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학적 진단이다.
 
파도타기 목회
 
예수님의 목회 역시 파도타기 목회를 실천하셨다. 정통파라 자부하는 유대인과 심지어 종교 실세자들 앞에서 하찮은 사마리아 사람을 치켜세워주셨다. 온갖 불륜의 여주인공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 토닥토닥 대화를 주고받으셨다. 뇌물과 비리의 사도 대명사격인 삭개오를 만나 오찬을 즐기셨다.
 
당시 전통적 유대사회(교회)가 설래설래 고개 흔들며 무시했던 한국 연속극 <장보리>의 유행어인 ‘찌끄레기 인간들’을 만나 그들의 상처를 싸매어 주셨던 그러한 스캔들 수준의 사목활동들이 아니고서는 별다른 감동을 줄 수 없는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지친 영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신개념 목회 서핑이라야 이 시대와 오는 시대 소위 약발이 받는 목회가 가능하다. 이러한 예수님의 목회가 바로 유대식 서핑 목회였다. 필자가 번역한 <상자 속에서 나오라>(Beyond the Box)에서 톰 스터키(Tom Stuckey)는 이러한 목회를 “시궁창 사람들을 만나는 목회”로 표현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쩌면 ‘왕족 목회’(A ministry of royal families)를 탐하는 것은 아닌가? 성직자는 왕족처럼 권위와 모양새를 내고, 신도들은 버킹험 궁전 앞에 모여 손 흔들며 환호하고 숭상하는 그러한 모습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분명히 형식적인 제사보다는 구체적인 자비를 주문하신 목회가 예수님의 목회다(마 12:7).
 
더 거슬러 올라가면, 찌끄레기 고멜을 사랑한 파격적인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의 목회가 당시 신개념 종교개혁이었다. 왕족 목회는 거창한 형식이나 사업으로 기름진 제물을 준비하지만 감동 수준으로 보면 예배당 천정을 뚫고 하늘 보좌를 울리기에는 힘에 부대낄 것이다.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시대를 만난 이 시대 교회,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교회와 예배를 채비해야 할까?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 파격적인 사랑의 주연 호세아처럼, 찌끄레기 인간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여인의 가슴에 감동을 주신 예수님의 감동 목회라야 미래가 보일 것이다.
 
에드위나 게이틀리(Edwina Gateley)가 말하는 바, 이 시대 상처받은 영혼들이 종교 의무와 짐에 억눌러 힘들어하기보다는 ‘따뜻하고 촉촉하고 짭쪼롬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정에 넘치는 교회와 예배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각주 생략함.


문문찬|크리스찬리뷰 영국 지사장, 영국 감리교회 런던연회 포리스트지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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