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을 함께 한 하나님의 도구들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10/27 [11:23]

종교개혁 497주년을 맞이 하였다.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앨리스터 맥그레스가 말한 대로 종교개혁은 "기독교 신앙에 필요했던 교정이자 오랫동안 지체되었던 갱신으로써 지나간 중세지성과 사회질서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해방시켜 준 것이요 유럽이 중세의 봉건제도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맞이하는 도전들에 그 신앙이 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기독교는 새롭게 등장하는 세계질서에 맞설 수 있는 새 힘과 역량을 갖추고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기념할 때는 언제나 루터나 칼빈을 떠올린다. 그런 만큼 그분들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늘은 비교적 주목받지 못한 그러나 종교개혁을 성공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하나님이 쓰신 것들에 눈을 돌려 보고자 한다.
 
선구자들과 번역된 성경들
 
종교개혁의 선구자들로는 우선 프랑스의 왈도파, 영국의 롤라드파, 보헤미아의 보헤미아 형제단을 꼽을 수 있다.
 
왈도파는 페트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난 왈도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300년 전에 이미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이고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성인들은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성례는 주님이 직접 제정한 세례와 성찬뿐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깨달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1170년경 사제들을 시켜 복음서와 몇몇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이 성경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에는 열렬한 환영을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왈도는 성경적인 바른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신실한 사람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들은 행상을 가장하여 각 지방을 다니며 장신구를 팔면서 동시에 값비싼 진주, 즉 복음을 소개하고 번역된 성경을 읽어 주었다.
 
롤라드파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핍박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롤라드가 <게으른 놈들> 정도의 욕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하던 독특한 표현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대학 출신으로 명석한 두뇌와 굽히지 않는 용기를 가졌고 능숙한 달변가에 금솜씨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수도승들의 나태와 시주행위를 책망했고 진리를 왜곡하는 교회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우상과 유품숭배, 면죄부 판매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는 비성경적이며 이를 강행하는 교황을 적 그리스도로 규정하였다. 로마교회가 영국에 요구한 헌금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글로 왕의 눈에 든 위클리프는 왕의 지지를 받으면서 많은 일을 하였지만 가장 뛰어난 업적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만년에 위클리프는 청빈한 사람들로 전도단을 조직하여 영국인들에게 바른 진리를 전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붉은 갈색의 긴 가운을 입고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로마교회는 그의 가르침을 정죄하고 번역된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였으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로마교회가 위클리프를 얼마나 미워했던지 롤라드파를 화형시킬 수 있는 법이 통과되자마자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을 꺼내어 불태우고 가루로 만들어 강에 뿌렸다고 한다.
 
보헤미아 형제단 혹은 모라비안 형제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보헤미아(체코)의 요한 후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후스는 후에 프라하 대학의 총장을 지낼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어릴 때 존 위클리프의 책을 읽으면서 진리를 깨달았고 특별히 책에 실려 있던 두 그림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는 주님은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교황은 금면류관을 쓰고 값비싼 자주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림이었다.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에게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하시는 뒷편에서 교황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고 있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교회의 현실이 후스의 눈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당에서 설교자로 봉직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의 불의와 죄를 폭로하고 우상숭배를 질타하였다.
 
교황은 그에게 성삼위 하나님에 이어 자신을 제4위로 칭하였다는 터무니 없는 신성모독죄를 씌워 화형에 처하였다. 그는 이를 마다하지 않고 <주님, 주님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하였다. 후스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추종자들은 믿음을 굳게 지켰다. 처음에 그들은 다볼파라 불리다 보헤미아 형제단 혹은 모라비안 형제단이라 불림을 받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1516년 헬라어로 된 신약성경을 발행하였다. 이 성경이 지성계의 열렬한 환영을 받아 숙독되고 탐구되면서 로마교회의 비진리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성경으로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설명한 본래의 복음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성경으로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요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성 경을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어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발하게。ア 한 것이다.
 
제지술과 인쇄술의 발달
 
종이의 발명과 제지술의 발달은 종교개혁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신이다. 아울러 금속활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 또한 종교개혁의 성공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인류는 종이를 발명하기 전에 바위나 점토판, 파피루스나 거북이의 배나 등, 나무조각이나 대쪽, 양피지 등에 글을 적었다.
 
이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요구한다. 예컨대 성경 한 권을 만들려면 200-300마리의 양이 필요하고 두 명의 전문서기관이 5년 동안 꼬박 매달려야 하는 작업이었다. 1세기 중반 중국에서 종이를 세계 최초로 만들고 이것이 중동에 전달되고 유럽에 소개되면서 대량생산의 기술이 개발되었고 책을 만드는 일에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다 금속활자가 개발되고 대량인쇄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세상이 바뀌게 된 것이다. 루터의 95개조 항의문은 즉시 번역되고 인쇄되어 2주 만에 독일전역에 보급되고 2달 만에 유럽전역에 보급되어 종교개혁을 성공시키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루터나 칼빈의 책들이 즉시 인쇄되어 보급되지 못했다면 종교개혁도 신학없는 몸부림으로 전락하여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
 
칼5세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루터를 보름스 의회로 소환한 당사자이다. 이 황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를 놓고 다른 사람과 경쟁을 벌였는데 그가 바로 작센의 현자 프레데릭이다. 황제와 경쟁관계에 있던 프레데릭은 황제가 루터의 공민권을 박탈하자 즉시 자기의 영지로 데려와 보호해 주었다.
 
루터는 프레데릭의 보호를 받는 10개월간 바르트부르그 성에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사람들이 자국어로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518년부터 1521년까지 초기 3년간 종교개혁자들로는 황금의 시간대에 황제의 미숙한 정치와 국제관계를 활용하여 루터는 종교개혁을 위한 유리한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에는 루터나 칼빈 같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보다 한발 앞선 선구자들의 헌신과 희생, 그들이 번역한 성경들, 제지술과 인쇄술이라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 칼 5세를 정점으로 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움직임 등 하나님의 주권이 세밀하게 개입했음을 알 수 있고 우리는 이를 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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