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12/01 [11:43]
▲ 고 김자옥 권사    

 
김자옥 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밝고 명랑했고 너무 젊었다(63세). 비로소 로빈 윌리암스(영화배우), 신해철(가수), 마이크 니콜스(영화감독)의 죽음까지 실감할 수 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죽음이 많은 한해였다. 4월 16일 한국의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는 충격적이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꽃같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모두 304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나라를 통채로 바꿀듯하던 처음의 열기가 무색하게 아무것도 달라진 것없이 해를 넘기는 걸 보면 정작 죽은 것은 <성찰과 개조>라는 반성자체가 아닌가 싶다.
 
7월 7일부터 8월 26일까지 50일간 이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가자지구) 간의 갈등은 2천 216명의 죄없는 목숨을 희생시켰다. 암스테르담을 떠나 쿠알라룸푸르로 가던 말레이시아 여객기는(MH17)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피격되어 탑승자 298명 전원이 사망했다.
 
서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등지에서 창궐한 에볼라 바이러스에 총 1만 5351명이 감염되었는데 그 중에서 5천 459명이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다.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WHO를 비롯한 세계 각국 의료진들의 적극적인 대처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고 조만간 상황을 끝낼 수도 있다고 하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이 외에도 많은 죽음이 일 년 내내 천하에 있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예외가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지 모를 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성경도 이 사실을 적시하는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한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이 대표적일 것이다.
 
죽음은 끝인가. 1995년 이래 무려 20년 동안 예일대학교의 인기강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강의하는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은 끝이다.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저명한 물리학 교수 스티븐 호킹도 비슷한 말을 했다.

“천국은 없다. 사후세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동화일 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뇌는 부속품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와 같다. 고장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다”. 그들이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모르는 과학적인 근거라도 찾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무신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 신념이다.
 
인간은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성경도 우리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후세계를 경험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신뢰할 수 없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하는 심신의 고통과 더불어 이 정보의 부족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공포를 일으킨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살아 온 이야기를 하나님께 직고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가 믿은 대로 또 그가 행한 대로 심판할 것이고 그 심판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당하고 공의로운 심판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 죽음 이후에 있을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의 태도이다. 오직 오늘의 삶에만 급급한 현재적 삶이 아니라 죽음과 심판을 염두에 둔 종말론적인 삶이 성경적인 삶의 태도이다.
 
종말론적 삶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나그네와 외국인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본향을 바라보는 삶은 그곳을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삶이다. 오트만 목사님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 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 봅니다>라고 노래한 것은 참으로 정곡을 찌른 것이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본향을 바라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교과서이다. 그는 떠나 온 고향 갈대아 우르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는 동일한 약속을 함께 유업으로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다. 목축업이 이동이 많은 직업이긴 하나 꼭 그 이유만 아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날마다 그곳으로 나아가는 삶을 위해서였다. <장막살이>는 아브라함의 본향을 바라고 나아가는 그의 신앙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주는 절묘한 상징어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사니 하나님이 좋아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
 
종말론적 삶은 상주시는 이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다. 믿은 대로 구원을 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이런 삶을 살아간 이로는 모세와 바울이 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생각했다. 이유는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기를 기뻐하였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 여러 번 잠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춥고 헐벗었다. 게다가 교회를 위한 눌림이 날마다 그 마음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기뻐하며 앞으로 달려 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빌 3:14).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속담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와 연합된다. 예수님과 연합되어야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고 그의 의가 나의 의가 되어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길 외에 죽음에서 벗어나는 다른 길은 없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에 주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을 연결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 년 동안 지면으로 독자들과 만난 것은 분에 넘치는 기쁨이었다. 독자들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내년에는 <기독교 인문학 산책>으로 독자들을 찾아 갈 예정이다.〠

최성은|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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