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D-숭실대학교 공동학술심포지움

독일 제국에서 문화개신교의 사회적 실천

글|이용주,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2/24 [09:32]
▲ 시드니신학대학 한국신학부와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가 공동 개최한 제1차 학술심포지움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이용주 교수.     © 크리스찬리뷰

I. 들어가는 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독일에서 유행하던 신학적, 교회적 경향으로서의 문화개신교는 그다지 환영받는 신학적 주제는 아니다. 일반적인 평가에 의하면 문화개신교란 하나님의 주권성을 주목하지 않았고, 도덕적 개인들의 주체성을 종교 자체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던 잘못된 신학적 사조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주의신학과 동일시되는 문화개신교는 개인적 도덕에 집중함으로 인해 공적 도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만일 문화개신교가 공적 도덕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민족주의적 의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일반적인 평가는 문화개신교라는 사태 자체와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본 연구는, 문화개신교는 그 처음부터 사회적 실천에 참여하고자 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적 실천을 향한 강한 동기는 -그것이 민족주의적인 것이건 혹은 사회적 질문이건 간에- 모두가 문화개신교의 주요 신학적 관심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면성 혹은 개별성이다. 독일제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살펴 보았을 때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문화개신교의 신학적, 실천적 반응은 문화개신교가 복음의 본질로 간주하였던 것을 토대로 근대 문화를 재형성하고자 했던 시도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II. 독일제국의 사회적 상황
 
1.독일제국의 수립과 민족주의의 발흥
 
독일제국은 1871년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에 의해 수립되어 1919년까지 지속되었던 독일 최초의 근대적 민족국가를 가리킨다. 프랑스의 왕 나폴레옹 3세가 독일에 대해 선언한 선전포고로 인해 촉발된 프랑스에 대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빌헬름 1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독일제국의 왕좌에 올랐다.
 
독일제국은 그 수립과 더불어 경제, 교육, 실질임금, 군사력 등에 있어서 놀라운 발전을 이룬다. 이러한 발전과 국력의 증진은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데 기여하기에 충분하였다.
 
2. 자본주의와 사회-경제적 갈등들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를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민족기원 신화와 구두전승이 기층 민중들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상향적으로 수렴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상 19세기 독일의 민족주의는 그와는 정반대로, 철저히 ‘위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적으로 각성된 지식인들의 문화적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발전과 산업화의 결과로 형성된 경제 발전의 수혜자들이었으며, 자신들 자신의 관심사를 민족적 정체성과 동일시하였다. 당시 중산층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향유하게 된 고급 문화(Hochkultur)야말로 그들을 봉건귀족주의와 하위계층으로부터 구별 지을 뿐만 아니라, 천박한 서구의 ‘문명’과 구별 짓게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바로 이 같은 문화야말로 독일 민족성의 정체성이며, 이런 의미에서 독일문화와 그 민족성은 서구의 그것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하나의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리고 민족성과 문화를 융합함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요소는 무엇보다도 개신교였다.
 
특별히 ‘독일적’인 것, 그것은 바로 루터와 종교개혁을 포함하는 개신교였다. 독일 내적인 종교적, 문화적 분열을 개신교 문화를 토대로 극복해 내고, 다양한 가치들이 갈등하고 있는 사회를 하나의 단일한 가치체계 안으로 통합하는 것이 당시 중산층 지식인들의 목표였다.
 
지금까지 언급했듯이 독일제국에서 민족주의는 중산층 지식인들에 의해, 그들을 위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비록 그것이 민족적 통일성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과정은 거꾸로 이러한 일방적인 과정에 통합될 수 없었던 이들에 대한 소외와 배제를 초래하였다.
 
예를 들어, 비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점증하는 자본화에 반하여 저항하였고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개신교 문화 속에서 범죄시되었던 로마 가톨릭 역시 당시 진행되던 국가의 개신교화 과정을 수용할 수 없었다. 독일제국 시기에는 이처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 등이 이런 식으로 지속적으로 점증해 가는 상황이었다. 
 
III. 독일제국의 교회적 상황
 
1. 민족주의 개신교의 우위
독일에서 민족주의는 이미 19세기 초엽부터 주창되었고, 당시 독일 개신교 안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후일 근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게 될 슐라이에르마허이다.
 
그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해방전쟁을 촉구하면서 신앙심은 국가를 위한 애국심 안에서만 구현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자기 민족의 자립 및 발전에 대한 기대와 결합되어 있는 개신교 신앙을 가리켜 ‘민족주의 개신교’(Nationalprotestantismus)라 부른다.
 
독일의 민족주의 개신교는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독일 대부분의 영토가 침탈당한 이래 점점 심화되어갔다. 이제 독일에서는 프랑스에 대한 해방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마치 오순절에 교회가 처음 탄생했던 것처럼 ‘독일의 오순절’ 즉 독일민족의 탄생순간 그 자체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독일 전역의 개신교회의 설교단에서는 프로이센의 왕을 중심으로 종교적, 민족적 단일성을 추구할 것이 외쳐진다. ‘신과 더불어 왕과 조국을 위하여!’라는 당시의 경구는 얼마나 독일 내부에서 민족주의 개신교가 성행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지속적으로 강화되어가던 민족주의 개신교는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와 독일제국의 수립 등을 통해 만개한다. 이제 독일제국은 스스로를 ‘개신교 황제국’ 또는 ‘거룩한 개신교 독일국’으로 이해하는 등 ‘권좌와 제단의 결합’은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2. 사회적 질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독일제국의 수립과 더불어 피어났던 자본주의의 성장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불건전한 투자와 경제적 거품의 제거 등으로 인해 독일의 경제가 쇠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해고와 소득감소 등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권위주의적 정부와 냉혹한 자본주의에 대해 변화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항거에 대한 더욱 강화된 억압이었다. 정부는 ‘반사회주의법’을 발효시켰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주의자들을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항거에 대한 억압만으로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이 해결될 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이에 반발하여 사회주의 진영은 급성장을 이루었고, 이러한 사회상황에 대한 관심이 개신교 교회 안에서도 점차 커져갔다.
 
개신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질문’(Soziale Frage)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가해 갔으며, 베를린의 궁정목사 슈퇴커(Stöcker)가 이 같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하여 1890년에 ‘개신교-사회 회의’(Evangelisch -Sozialer-Kongress)를 조직하면서 문화개신교 진영의 동참을 호소한다.
 
이에 하르낙, 헤르만, 막스 베버 같은 이들이 동참하게 되는데, 이로써 자유주의적 문화개신교 진영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안적 모색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문화개신교의 대표자였던 하르낙은 교회가 서로 대립하는 관심사들 간의 투쟁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평화의 상징이 될 것이지, 그리고 사회적 질문을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은 ‘핵심적인 과제’(brennende Aufgabe)라고 보았다.
 
IV. 문화개신교: 그 시작과 주요 내용
 
1. 문화개신교: 그 정의와 목표들
 
일반적으로 ‘문화개신교’라는 개념은 ‘자유주의 신학’과 동의어로 이해된다. 그것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하나의 신학사조를 가리킨다. 일반적 평가에 의하면 문화개신교는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바탕으로 종교와 당시의 문화를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했던 신학적 경향을 뜻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위한 신학적 토대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문화개신교의 신학적 오류가 드러난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문화개신교에 대한 막연하고도 일반적인 수준의 이해에 불과하다. 보다 정교하게 말하자면, 문화개신교란 다음과 같은 신학적, 교회적 경향을 가리킨다:
 
첫째, 이 개념은 슐라이에르마허부터 트뢸치에 이르는 개신교 신학 전체를 가리키는 “시기에 대한 개념”(Epochenbegriff)이다. 둘째, 문화개신교는 리츨의 영향을 받고 「기독교 세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학운동을 가리킨다. 셋째, 문화개신교란 독일제국 시기 독일의 교육받은 시민계층(Bildungsbürgertum) 사이에 공유되던 개신교적 가치를 규정하는 사회적 범주이다.
 
문화개신교 연구의 권위자인 그라프는 이중 특히 세 번째 정의를 강조하면서, 문화개신교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 야기된 새로운 삶의 질서를 수용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규범과 문화에 일치하여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갱신’하기를 추구했던 신학적-교회적 시도를 의미한다.
 
문화개신교 진영의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 개신교’ 혹은 ‘개신교자유주의자’로, 자신들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Liberale Theologie)이라고 불렀다. 이들 ‘자유주의’ 진영은 ‘교육받은 자유주의적 개신교 시민계층’(das liberal-protestantische Bildungsbürgertum)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교육받은 개인들만이 자율적인 인격성에로 성숙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고, 아울러 법치국가, 입헌주의, 사적소유에 대한 인정 등 정치적 자유주의를 수용하였다.
 
문화개신교 진영이 당시의 문화와 기독교를 동일시하였다는 오해는 이들이 이처럼 당시 사회의 자유주의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자유주의 진영은 “종교와 문화의 화해”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였던 종교와 근대 문화의 ‘화해’란 기독교를 강화하여 급속히 변화하는 독일사회 안에서 주도적인 문화주체가 되게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지, 단지 근대 문화를 종교적으로 긍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낡아버린 신앙전통과 교의에 매여 있으면서 사회의 변화를 거부하는 “개신교회를 갱신”하는 것, 그리고 기독교 복음의 정신을 따라 세속문화를 재형성하는 것, 그것이 자유주의 개신교도들의 포괄적인 목표였다.
 
종교와 문화의 화해는 기독교 신앙을 통한 문화변혁의 전제로서의 교회 갱신에 대한 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정통주의적 교회는 정치적으로는 해방지향적인 자유주의적 시민계층으로부터 유리된 채 반동주의적 성향을 점점 노골화 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역동적인 사회발전을 추동해 가던 사회진영은 교리적으로 경직되고 정치적으로 반동적인 교회로부터 점차 이탈하여 갔다.
 
이에 문화개신교는, 교회가 전통적인 과거의 가치에만 집착하고 사회의 시민화를 거부함으로써 ‘촌부의 종교’로 추락하고 마는 것에 맞서서 개신교회를 지키고자 했다. 내적으로는 개신교회를 갱신하고, 외적으로는 세속문화를 재형성하는 것이 소위 문화개신교의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다. 
 
2.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문화종합의 시도들
 
독일제국이 수립되던 당시 개신교회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던 것은 민족주의 개신교였으며, 교육받은 중산층 진영에서 비롯된 개신교 자유주의자들 역시 이 민족주의적 경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19세기 말 경부터 이미 문화개신교의 주요 관심사는 민족주의적 관심으로부터 사회적 질문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같은 이행은 문화개신교 자체의 내재적인 신학적 원리, 한때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원리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개신교 원리로서의 ‘내면성’의 원리이다.
 
문화개신교의 신학적 특징은 그 대표적 인물인 하르낙의 경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주체성과 종교의 종합’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하르낙은 개신교 종교개혁에 이르러 종교가 그 자신의 본질적인 요소 즉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에 도달했다고 여겼다.
 
이제 더 이상 가톨릭 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교리적 가르침이나 위계질서적 조직, 교회 전통이 아니라, 개인들의 ‘내적’ 경험이 종교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종교는 “신앙하는 주체의 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종교는 개인들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개별화의 원리”를 가진다. 하르낙에 의하면, 이것이야 말로 “근대 종교” 자체의 독특성이며, 문화개신교와 개신교 종교개혁의 연속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부터는 더 이상 전통적 교리의 수용이 아니라, 개별 주체의 실천이 종교의 주요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 실천이라는 좁은 영역 안에 제한되어서는 안되며, 사회적, 문화적 컨텍스트 안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이처럼 ‘자율성과’자발성’을 발전시키는 일, 세속적 영역에서 ‘도덕적 삶을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형식이 되었다. 따라서 개신교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가진다. 
 
하나는 내면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공공성’이다. 문화개신교도들은 그 초기에 민족주의적 실천에 관심을 두었고, 그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회적 질문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내면성이라는 이들의 신학적 원리의 발전의 귀결이라 볼 수 있다.
 
독일의 자본주의화와 권위주의적인 민족주의적 경향에 의해 초래된 사회적 문제들에 직면하여 모든 개별적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질문들을 실천적으로 풀어야만 한다”. 사회적 관계를 도덕적으로 개선하고, 착취, 불의, 경제적 불평등 같은 사회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모색하는 것은 복음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후기의 문화개신교에 있어서 사회적 질문과 관련한 실질적인 실천은 복음의 ‘적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포기될 수 없는 요소이다. 하르낙은 복음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복음이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인적’이다. 하지만, 복음이 “인간들 사이의 친교를 구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회적’이다. 사실, 복음이 사회생활에 대한 법적 규율이나 구체적인 사회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복음은 “가난한 자를 위한 연대성과 형제애”를 토대로 한 인간의 친교를 요구한다. 자신의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또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이웃의 고난과 죽음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누구건 간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다. 사회적 실천은 하나님의 선포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그런 바로서 복음 그 자체가 이야기 하는 “인간영혼의 무한한 가치”와 결합되어 있다고 하르낙은 선언한다. 
 

▲ 이용주 교수     © 크리스찬리뷰

V. 나가는 말
 
문화개신교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회적 실천에 참여할 것을 시도해 왔다. 독일제국초기의 그 민족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문화개신교는 독일제국 내의 민족주의적 경향과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체제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갈등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사회적 실천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인 참여가 개별성에 대한 신학적 집중의 결과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개별적인 영혼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 신앙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사회적 질문에 대한 관심은 개별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강조하는 복음의 바로 그 정수이다. 개인적인 신앙과 사회적 실천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복음의 두 측면이다.〠

글/이용주|숭실대학교, 조직신학, 독일 튜빙겐대학 Dr.Theol.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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