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있는 신학 컨퍼런스

칼빈이 말하는 경험적 개혁주의는 생각보다 따뜻하다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11/24 [12:44]
▲ 시드니영락교회에서 열린 ‘신앙이 있는 신학' 컨퍼런스 참석자들이 마틴 윌리암스 교수 부부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크리스찬리뷰
 

지난 11월 12일~13일, 성경신학을 기초로 한 성숙한 신학정립과 지속적인 개혁주의 운동을 목적으로, 교육선교회 로뎀나무아래 주관으로 ‘제1회 삶이 있는 신학 컨퍼런스’가 시드니 남부를 대표해 시드니하나로장로교회, 북부를 대표해 시드니영락교회에서 열렸다.
 
본지는 이번에 발표된 3개의 주제 강의 중 마틴 윌리암 교수(Reformed Theological College)가 발표한 ‘칼빈이 말하는 경험적 개혁주의’ 내용을 번역 편집하여 전제한다.
 
마틴 윌리암스 교수(Dr. Martin Williams)는 뉴질랜드 출신의 신약학자로서, 성결교 출신 간호 선교사였던 한국인 아내 사이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카메룬 선교사로 일할 때부터 한국교회에 동역해 본 경험이 있는 마틴 교수는 ‘머리와 가슴’이 살아있는 개혁주의 운동에 열심인 목회자 출신의 학자이자, 타고난 설교가로서 이번 강좌에서도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원칙부재와 성장지상주의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한국교회의 위기 앞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신학적 기초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 열강하는 마틴 윌리암스 교수.     © 크리스찬리뷰
 

서론
 
개혁주의는 인간이 만든 또 다른 발명품이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고, 형성된 체계라고 나는 믿는다. 동시에 하나님 중심적이며, 십자가를 잘 드러내면서도 (일반적인 선입견과는 달리) 감성적인 성격도 있다. 내가 현대 교회 일반에 개혁주의 신학이 필요하다고 믿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혁주의자로 자부한다면 삶 속에서 하나님과 복음을 가슴으로 누려야 정상이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는 성경에 근거하고, 성경은 신학적 내용뿐 아니라 감성과 실제, 열정을 담은 메시지를 던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혁주의자는 살아있는 성령의 영감 아래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며, 복음을 사랑하고, 삼위일체에 중심을 맞추고, 은혜 안에 겸손하며, (주님께) 복종하기를 기뻐하고, 복음 중심의 진리를 삶 속에서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점에서 개혁주의는 신학 체계로 이해하기 앞서, 먼저 ‘신앙적인 태도’로 이해해야 한다.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참다운 기독교는 종교적 활동을 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과 삶 속에서 기독교의 능력을 알게 한다. 기독교가 (삶 속의) 거룩과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으로 적용되지 못할 때, 모든 종교적 활동은 의미를 잃게 된다.’라고 지적한다.
▲ 주제 강연하는 마틴 윌리암스 교수와 통역하는 김석원 목사.     © 크리스찬리뷰
 

감성적, 체험적 기독교
 
자칭 개혁주의자라면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내가 믿는 기독교는 신학적 내용을 갖추면서도, 체험적, 감성적, 실제적인 믿음인가?’ 18세기 미국의 개혁주의 목회자,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도 ‘참다운 기독교는 거룩한 감정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라고 말한다. 에드워드는 성령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분일 뿐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고 강조한다. 내가 ‘주님을 섬기고 복종’한다고 해서, 그분께서 항상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어떤 동기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결혼기념일에 깜짝 선물로 화환을 준비했다 하자. 아내가 "왠 화환이야?"라고 물었을 때, "남편으로서 의무니까" 라든지 "좋은 남편은 이렇게 하라고 어떤 책에서 읽었어"라고 대답한다면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까?
 
정답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너무 주고 싶었어. 당신에게 이렇게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가 더 맞다. 겉으로 표현된 행동 만큼이나 동기도 중요하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 속의 바람에서 나온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에게 기뻐하며 서로를 사랑하시며,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도 이분들을 사랑하고 기뻐하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은 어리석은 장님처럼 다른 대상을 통해 그 사랑과 기쁨을 채우려고 하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성령은 먼저 우리의 ‘동기’를 바로 잡고, 눈을 열어 준다. 먼저 성자를 기쁘게 받으신 성부의 마음과 성부와의 관계를 기뻐하는 성자의 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도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신다.
▲ 마틴 윌리암스 교수(왼쪽)와 통역하는 김석원 목사.     © 크리스찬리뷰
 

하이델버그 요리 문답(1563)도 이것을 잘 표현한다.
 
‘질문: 구원으로 새롭게 된 인간은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가?
 
답: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진심으로 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기쁨을 누린다’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외적인 선한 일’을 하도록 하는 것 이상에 관심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과 가슴으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리기 원하신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고, 그분을 슬프게 할 어떤 것도 거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의 감정적 특징이자, 현대교회가 필요한 신학이다.
 
내 개인 경험이 증언하듯,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사랑, 영광, 배려를 나에게 보여주시고, 이를 통해 내 안에서 더 깊고 더 신실한 하나님의 대한 사랑의 불을 점화시켜 주셨다. 그분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감동이 더 깊어질수록, 나를 하나님 형상으로 더 빚어가신다: 나에 대한 집착은 멀어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애착이 더 깊어진다.
▲ 패널토의를 진행한 이명구 목사(시드니영락교회 담임).     © 크리스찬리뷰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관계적’으로 이해하기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 첫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신학적 지적 활동의 결과가 아니며, (수학을 배우는 것과는 다르게) 정말 가슴으로 깊이 경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칼빈의 말대로 ‘인간이 가진 건강하고 진리의 지혜들은’ 하나님의 대한 지식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도 포함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적 관계와 교제를 위해 지음받았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험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죄악이 만든 아수라같은 현실 때문에 ‘중재자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화해의 길을 열어주시기 전에는, 인간은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구원사의 저자로 깨닫지 못한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관계와 감점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사람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지적 이해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랑과 신뢰, 기쁨과 즐거움이 같이 해야 하며, 인격적 경험적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은 교제 속에 만들어진 지식, 그리스도 자신부터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 누렸던 그 관계에 기반한 지식이다.
 
▲ 오성광 목사     © 크리스찬리뷰
 

죄의 상태를 먼저 느껴야 한다
 
이런 지식은 나에게 집중되어 왔던 이기적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제대로 누리기 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이런 열매는 내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에서 나온다. 앞에서 칼빈이 말한 대로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뿐 아니라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
 
자신에게 만족하는 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누릴 풍성함과 기쁨을 구할 이유를 못 느낀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자신의 죄와 끔찍한 상태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하나님 안에서 구해야 할 어떤 것도 구할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죄성을 바로 이해해야 그리스도를 제대로 온전히 붙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죄도 정복할 수 있다.
 
개혁주의의 첫번째 중요한 특징은 죄의 심각성을 깊이 느끼는 것이다. 개혁주의적 신자는 바울의 말대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한다. (딤전 1:15) 조나단 에드워드도 비슷한 고백을 한다.
 
내 자신도 종종 경험해 왔듯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나는 모든 인간 중에 가장 끔찍한 존재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옥에서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야 정상이다. 내 속을 보면, 지옥보다 더 깊은 내 악함이 발견된다.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많은 현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더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많은 교회들은 실제로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 자체와 그들의 필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아마도 현대와 종교개혁/청교도 시대간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죄의 심각성에 대한 관점일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상적이고 가볍게 다루며,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토마스 굿윈의 말처럼 “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존귀하심, 주권적 영광, 그리고 하나님 자체에 대하여 상처를 내는 것이며, 바로 여기서 죄가 가장 악한 능력을 발휘한다.”
 
우리 시대는 죄를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과 세상의 문화를 통해 정의하려고 한다. 그러나 굿윈은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포함해 현대인들은 죄의 이런 근본적 성격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에게 이점을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성경본문 중 하나가 시편 51:4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이 구절도 죄의 본질과 심각성을 잘 표현한다.
 
죄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증오하고’, ‘적’으로 만든다(롬 1:30; 5:8,10) 청교들은 이 진리가 의식 속에서 뿌리내리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토마스 부룩은 ‘거룩한 성도는 어떤 죄든 모두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법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을 잘 안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기 때문에 죄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린 모두 죄인이다’ 라는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설교자, 찬양작사가인 존 뉴튼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철저하게 죄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저 죄에 대해 듣는 것만으로는 죄의 문제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직접 ‘발견’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죄성을 직접 느끼고, 치를 떨며, 존 번연의 ‘천로역정’처럼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며 울부짖어야 한다.(행 16:30) 이렇게 죄를 느끼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치유자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 먼저 내 병부터 느껴야 한다. 자기 죄성에 대한 심각성을 먼저 느낄 때, 구주 예수님을 제대로 찾고 그 분 안에 있는 온전한 답을 구하게 된다. 고통은 필요한 과정이며, 은혜가 주신 아픔이다.
 
존 뉴톤도 이렇게 말한다. “복음은 회개하는 마음과 죄 때문에 아파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희망이다. 우리가 자신의 죄 상태를 먼저 느끼지 못하면, 우리의 유일한 치료자를 바로 볼 수도 치료를 받을 수도 없다.”
▲ 손영배 목사     © 크리스찬리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자
 
앞의 내용은 개혁주의 두 번째 중요 특성으로 인도한다. 개혁주의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기뻐하고, 열정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절감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 이를 잘 표현한 것이 존 뉴톤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이다.
 
존 뉴튼은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구원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은혜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은혜는 잃었던 영혼을 구해주고, 내 자리를 다시 찾아주고, 영적인 눈을 열어 준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든다. 예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열고, 희망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도와준다.
 
존 뉴톤의 삶과 사역도 은혜의 깃발 아래서만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바울역시 고린도 후서 12장 7-10절에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그의 강조점은 이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신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에서 다 구해주고, 고통도 없애주고, 고난에서 보호해 준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우리의 모든 필요에 ‘족한’ 은혜를 주신다고만 하셨을 뿐이다. 바울은 모든 주님의 자녀들에게 풍성한 은혜가 주어질 것임을,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되었다. 단순히 적절한 은혜가 아니라, ‘족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은혜’로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모든 시험을 족히 이겨낼 만한 은혜 이상을 주시는 분이다. 개혁주의자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그 은혜 속으로 인도해 준다는 것을 깨닫고 강조하는 사람이다.
 
이 점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친절’ 이상이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사랑으로 자신에게 데려가는 손길이다. 은혜란 단어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인격적이고 사랑스런 배려를 표현하는 단축어 같은 것이다.
 
청교도 토마스 굿윗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선한 것으로 주심에서 끝나지 않으며, 직접 자신의 인격과 축복됨을 우리에게 교통하심으로서 드러난다.”
 
칼빈과 청교도들은 구원을 마치 상점에서 물건 구매하듯 ‘은혜’란 물건 얻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은혜는 대가 없이 성령, 성부, 성자를 경험하는 것이다. 성령은 무슨 배달부처럼, 은혜라는 물건을 집 앞에 던져놓고 가는 분이 아니다. 은혜와 함께 우리에게 오셔서 거하신다. 성령은 자신이 성자와 성부와 누리는 교제를 우리도 깨닫고 누릴 수 있도록, 직접 자신을 내어주신다.

▲ 강정호 사모     ©크리스찬리뷰
 
 
결론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첫째 질문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도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개혁주의 하면 흔히 TULIP으로 표기되는 오대강령-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을 떠올린다. 이것은 칼빈의 발명품이 아니라 성경적 진리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속에 나타난 진리로서,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인이시라는 점,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역사에 추가로 더 할 것이 없다는 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 받은 이들은 결코 구원에서 포기되지 않음을 강조하는 고백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진리는 성경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역사에 중심을 두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현장의 경험이 풍성하게 담겨있는 성경의 내용에 근거해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매우 차갑고 딱딱하게 학문적으로 다가오기 쉽다. 칼빈도 의식했듯이, 진정으로 개혁주의를 따르는 신자는 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개혁주의 신자는 머리(건강한 신학)과 마음(뜨거운 감성)이 따로 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머리를 없애는 실수(건강한 신학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태도)도 문제고, 가슴을 패내는 짓(뜨거운 가슴이 함께 해야 할 필요성을 평가절하하는 태도)도 곤란하다.
 
양쪽 다 결국 환자를 죽이고 말 것이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교회 마찬가지다.〠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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