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홍관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6/03/28 [12:39]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쿼바디스’라는 제목의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사도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폭정으로 인하여 로마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피신하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로마를 향해 오시는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 도미네)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네가 성도를 버리고 로마로 떠나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가노라”고 답하셨다. 결국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가서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성도들과 함께 순교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마 16:24)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성도들에게는 각자 가기가 져야 하는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이다.
 
그 말은 우리의 구원은 예수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은 십자가의 좁은 길이기에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헌신과 투자와 봉사생활이 요구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과 성도들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권 앞에서 복음과 함께 핍박과 순교를 각오해야 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모든 성도의 삶이었다.
 
예외가 없다. 다시 말해 성도가 되는 것은 견디기 힘든 핍박과 순교를 감수해야 하는 결단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져야 하는 십자가는 무거운 십자가였다. 고난없는 삶을 선택하려는 것은 꼭 복음을 포기하고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가 ‘밀라노 칙령’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겪고 있었던 핍박과 고난의 역사가 종식된 것이다. 밀라노 칙령 이후 무거운 십자가는 가벼운 십자가로 바뀌어진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의 변화로 수많은 로마의 시민들이 교회를 찾아 예배에 참석하고 세례를 받았다. 로마사회에서 황제에게 잘 보이려면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그 당시 교회가 날로 왕성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성도들이 날로 증가하였다는 표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머릿수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자들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노선에 선 사람들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고와 헌신과 희생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친히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오늘을 포함한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선뜻 대답 할 수 있을까?〠

홍관표|크리스찬리뷰 편집고문, 시드니중앙장로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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