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주년 호주 참전 용사 이메일 인터뷰 (I)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5/31 [11:06]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을 발전시킨 한국인을 존경합니다

본지는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 호주지회 노병들로부터 당시의 처참했던 전투 현장의 실상을 듣는 한편 한국 전에 참전했던 호주 노병들의 근황과 한국 전쟁의 영웅 찰스 그린 중령의 미망인 올윈 그린 여사의 삶 등을 엮어 특집기획으로 구성했다.  

호주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참전을 결정한 나라로서 육·해·공군 17,164명을 파병, 339명이 전사했으며 그 중 281구는 부산 유엔군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특히 호주군은 1951년 4월 경기도 가평에서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 등 영연방 부대와 함께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연방 4개국 주한 대사관과 재향군인회, 가평군 등은 매년 4월 가평전투 기념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편집자 주>

▲ 멜본한인교회에서 만난 한국전쟁 참전용사 호주연합회 회장 빅 데이 씨.     © 크리스찬리뷰

1952년 3월, 보병으로 한국전 참전 

저는 호주 보병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1952년 3월, 1년 동안 한국 전쟁에 참전할 것을 서명하고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일본에서 우리는 3개월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국에 있는 호주 육군 제3대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1년 동안 전투에 참여하였고, 일본을 거쳐 1954년 4월에 호주로 돌아 왔습니다.

한국에 도착 했을 때 저는 22살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전쟁의 비참함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1952년 6월에 우리는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해서 제가 처음 본 것은 비참한 피난민들의 삶이었습니다. 낡은 기차를 타고 부산을 빠져 나오는데 피난민들의 천막들과 나무 박스로 만든 엉성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이 광경은 수 십 킬로미터나 계속 되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전쟁의 비참함을 보았습니다. 서울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파괴되었고, 서울역만이 그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의정부 지역으로 갔었는데, 그곳의 피해 상황은 서울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거리는 파괴되었고, 건물들은 무너진 곳이 많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1952년 7월 12일의 전투였습니다. 미국 폭격기들이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던 진지를 집중적으로 폭격했습니다. 그 후에 뉴질랜드 포병들이 그 곳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26명의 호주 보병들이 수색 작전에 임했습니다. 저도 수색 작전에 참여했는데, 우리의 목표는 중공군을 사로 잡는 것이었습니다.

 
▲ 멜본한인교회 본당에 호주군의 한국 전쟁 참전 기념판이 설치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우리의 목표는 중공군 생포

적군의 진지를 향해 나아가다 우리는 적군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고, 여기 저기서 고함치는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정신 없이 적군과 교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상 외의 일이 일어 났습니다. 그날 우리 호주 군인들이 큰 피해를 본 것입니다. 15명의 호주 군인들이 부상을 당했고, 3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그들의 행방을 알지 못합니다. 참고로 한국 전쟁 동안 44명의 호주 군인들이 실종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오직 8명의 군인들만이 무사했는데, 그 중에 제가 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전투는 1952년 9월 어느 날에 있었던 전투입니다. 그날 우리는 적군에게 집중 포격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포탄들이 날아 들었는지 모릅니다. 제 동료였던 레리 프란시스코 (Larry Francsco)는 21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다음 날이 그의 21번째 생일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와 레리는 그 전투에서 살아 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 빅 데이 회장 부부     © 크리스찬리뷰

매우 춥고 길었던 한국 겨울 

한국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힘들었던 것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겨울철의 전투였습니다. 한국의 겨울은 너무나 추웠습니다. 특히 한밤중의 수색 작전은 우리를 무척이나 괴롭게 하였습니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안개가 자주 끼었습니다. 안개는 아침 늦게야 걷히곤 하였습니다. 새벽에 수색 작전에 투입되면 서둘러 수색 작전을 마쳐야 했습니다. 늦장을 부렸다가는 안개가 걷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적군에게 쉽게 발각이 되어 적군의 타겟이 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한국의 겨울은 매우 추웠고, 아주 길게 느껴졌습니다.

춥고 힘들고 어려운 전쟁이었지만, 함께 했던 전우들이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새로 전입해온 동료들과 금새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서로를 잘 돌보아 주었고, 깊은 전우애를 느꼈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온 후에는 전쟁의 후유증이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힘들어서 술도 많이 마시며 방황했습니다. 우리 동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의 삶으로 복귀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많은 참전 용사들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도 했고, 일부는 시골에 가서 은둔 생활을 했으며, 일부는 이일 저일 하다가 일찍 죽기도 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짧은 방황의 기간을 끝내고 일상적인 삶으로 복귀할 수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 멜본한인교회는 매년 호주 참전 용사들을 초청, 한국 전쟁 기념예배를 드린다.     © 크리스찬리뷰

눈부신 한국의 발전 놀라울 뿐 

저는 1976년과 2003년 그리고 2007년과 2008년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방문할 때마다 저는 크게 놀랐습니다.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전쟁 동안에 보았던 초토화된 거리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한국이 정말로 놀라울 뿐입니다.

1952년 6월에 보았던 부산과 서울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피난민들의 천막들과 나무 상자로 만든 집들은 저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을 보면서 한국 전쟁에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을 발전시킨 한국인들을 존경합니다. 부지런하고 끈기 있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눈물과 노력으로 한국을 발전 시킨 분들이야 말로 박수를 받아야 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멜본에 위치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호주 연합회(Korea Veterans Association of Australia Inc.)에서 1994년부터 회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호주 멜본한인교회에서 매년 6월에 한국전쟁 기념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으며, 한인회가 주관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위한 야유회에도 참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약 350명의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이 멜본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빅 데이: 한국전쟁 참전용사 호주연합회 회장|멜본 거주
번역/정지수: 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J Life Church 담임목사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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