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5/31 [11:24]
한반도는 정전상태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 3월 20일자 인터넷 판에서 “6.25 전쟁에 대해선 두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다”며 “평화조약이 공식 체결되지 않은 상태여서 엄밀히 말하면 6.25 전쟁(이하 6.25)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잡지는 덧붙여 “미국이 주도하거나 개입한 12차례의 역대 전쟁 중 최장기 기록을 가진 사례로 6.25를 꼽으며, 6.25는 지금까지 60년간 지속되고 있는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6.25는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사실상 전쟁이 끝났다고 할 수 있지만 항구적인 평화 조약은 맺어지지 않았다고 뉴스위크는 진단했다.


휴전까지 3년 1개월에 걸친 6.25는 우리의 조국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했고, 참전한 외국 병력까지 극심한 해를 입혔다.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와 맞먹는다고도 한다. 무엇보다 6.25는 정전협정 때까지 전체 참전국을 합하여 2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냈으며, 한국인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는다. 이 중에 85%는 민간인이다.

이뿐 아니다.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 1천여 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든 인명 피해를 양산했다. 6.25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폐허로 만들며, 애써서 세워놓았던 공업 시설을 45%나 파괴시켜 경제,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한 점에 비춰보면, "전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6.25 이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1·21 사태,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대청해전에 이어 아주 최근엔 천안함 침몰 사건을 들 수 있다.


 
필자가 원고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 한국 정부는 그동안 어뢰설과 피로파괴설, 좌초설, 내부폭발설 등 온갖 억측이 난무하며 46명의 꽃다운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침몰은 55일만에 '북의 소행'으로 결론지으면서 한반도는 정전(停戰)상태임을 알려주었다. 이미 46명을 전사자 처리한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올해로 60주년, 환갑을 을 맞는 6.25! '환갑'이라! 한 시대의 매듭을 상징하는 이 굵직한 숫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쩌면 6.25를 사라진 아침 안개처럼 '먼 역사 속의 전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연륜같기도 하다.

실제로 전후세대가 85%를 넘는 한국의 인구 구성에서, 국민의 33%가 6.25 발발 연도를 모르고(2008년 행정안전부의 조사결과 43.2%만 전쟁발발 연도를 알았다고 한다), 초등생 상당수가 6.25를 일본과 싸운 전쟁이라고 답했으며, 전쟁이 일어난다면 총을 들고 싸우겠다는 응답자가 10%에 불과했다는 통계가 6.25가 풀빛에 내린 아침이슬처럼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6.25는 아직도 현실

25년 전, 필자가 소위 '병아리 기자'시절, 원고료를 정산하면서 원천세 징수관계로 필자들의 주민등록번호를 받으면서 유독 50으로 시작하는 50년생이 많았던, 심지어 5060625로 시작하는, 정확히 6.25전쟁 날에 출생한 교수도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그들은 막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막 돌아온 훨훨 나는 소장학자들이었다. '전쟁 중에 어떻게 출산했을까?'하는 것을 생각하며 공연히 가슴이 아려왔던 적이 있었다.

그해 6.25 특집으로 육본 정훈장교의 안내를 받아 강원도 철원, 철의 삼각지 일대에 산재한 6.25의 흔적을 퍼담기 시작했다. 인민군 본부건물, 멈춰진 철마, 구멍난 철모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종탑이 선명한 무너진 교회터의 재래식 화장실 자리에서 피어난 꽃들을 보면서, 그리고 종탑의 꼭대기를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신앙의 선배들이 무수히 들었을 종소리의 환청으로 그 자리에 몸이 얼어붙었던 적이 있다. 6.25가 없었다면 그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서있었을까? 6.25의 상흔이 깊게 파여 있는 현장이었다.

 
사진기자가 철조망에 붉은 글씨로 붙은 '지뢰'라는 표지를 찍으려고 하니, 안내장교가 '제발 그것만은 찍지 말아달라'고 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천안함 사건 후 보도되기 시작한 '어뢰'라는 말이 자꾸만 '지뢰'라는 말과 오버랩되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후유증을 민족적 차원에서 앓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우리는 지금도 6.25가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숨쉬며, '6.25가 아직도 현실'인 산증인들을 만나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 호주지회 임원들을 만났다. 6.25란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려갈 뻔했던 조국이 운명을 생명으로 맞서온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6.25 당시 10대 청소년들이 이제는 70-80대 백발노병으로 흐르는 세월을 담아내고 있었다.  

 
 ‘가평전투’ | 이성준 부회장

그는 6.25 때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18세 청년이었다. 교과서에 배운 대로 애국심을 발휘했다.

"얼떨결에 전쟁 당했습니다. 처음에는 멍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구국의 여성 잔다크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화랑도 정신에 충의정신이 꿈틀거렸습니다. '남자인데 나이가 문제냐. 여자도 나갔는데'하는 생각으로 자진 출전했습니다.


 
그래서 50년 11월에 모병에 응모했습니다. 1.4 후퇴 때 계속 남쪽으로 남진했습니다. 그러다가 함안에 가서 훈련받고, 4월에 육군으로 전방 105사단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기간요원으로 뽑는 시험에 응시하여 제1사단장실 근무로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청평 사단사령부로 옮겼던 그는 다시 전투하는데 지원하여 중부전선 배치받아, 가평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4월에 호주 가평대대가 가평전투에서 대승전했습니다. 시기와 타임이 중요한데, 51년 5월이면 1.4후퇴 했다가 역전하여 밀고 들어가는 때입니다. 가평대대가 협곡에 진을 치고 적을 방어하는데 굉장히 모범적이었습니다. 우리 3대대가 가기 바로 한 달 전에 호주 군인들이 참전했던 그곳입니다. 호주 제3대대는 4월 24일 가평전투에서 당시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격퇴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85명의 사상자를 냈지요. 여기 호주서도 그걸 내내 기리고 있습니다. 1개 대대 병력이 적군 1개 연대 병력을 몰살시킨 전투입니다."

그는 한 달 후 105사단 청평에 진주하여 그 뒤를 지원하며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사단 사령부에서 지원하면서 그 뒤에 춘천으로 진주했다.

"51년 5, 6, 7월은 군대를 정비하여 승세가 있으면 계속 밀고 올라가는 시기입니다. 계속 춘천을 돌파하고 화정까지 밀고 올라갔습니다. 사단 사령부는 소양강 변에 진영을 치고, 거기서 작전 지휘를 했습니다. 저는 사단장 호위 연락병 역할로 사단장 김관오 준장과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분은 중국 독립군 출신으로, 독립정신이 충실한 노병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인상적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분은 세수를 중국식으로 물수건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새벽에 눈이 덮일 때 정훈부(선무공작대)가 새벽에 5시에 와서 캐롤을 불러주었습니다. 사단장께서 주무시다 일어나 다 부르고 가는 그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고서 '새해 복많이 받으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전선을 시찰할 때는 졸병이나 장군이나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나는 연락병겸 호위병이라 항상 붙어다니니 손자처럼 아들처럼 돌봐주셨습니다."

부대 창설기념일이 1952년 5월 사단장이 주는 근무표창장 받은 그는 그때 쯤, '어쩌다' 휴가를 고향을 가게 됐다고 했다. '화려한 휴가'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참혹한 상황이었다.

"포연을 뚫고 트럭을 타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서울로 와서 엄마도 만나보고, 조카들도 보고 또 다시 돌아왔습니다."

'군인의 낭만'은커녕 좀처럼의 틈도 나지 않는 전쟁 시절, 그렇게 6.25에 참전하여 3년을 훌쩍 넘게 채웠다. 그는 휴전 이듬해인 54년 6월까지 군생활을 한 그야말로 '참전용사'였다. 병장(이등중사)으로 제대한 그는 중학교 4학년에 다시 입학했다.

"24살에 학교 가니 머리를 깎고 오라고 하더군요, 머리 깎고 다시 중학교 4학년, 즉 고등학교 과정 마치고 대학에 갔습니다."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다. 상학과(경영학과) 13회 즉 55년에 입학 59년 졸업했다. 졸업 후 기업들이 창설되던 때였다. 충남재벌 무역부에 입사했다. 3년 동안 경리과장으로 일했다.

"그 자리가 술을 많이 먹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을 접대하다 보니 술 먹기 어려워 회사를 나와 형님 사업하는 것을 함께 했습니다. 알미늄 샤시 경공업 전무이사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일하다 1979년 4월 25일, 해외 지사장으로 호주에 왔다.


 
"피혁 원단 공급을 위해 호주에 지사를 열고 일했습니다. 몇 년 일하면서 80년도에 사면령으로 희망자는 영주권 신청을 다 받아 주었는데, 저도 영주권을 신청했고, 사업도 늘려왔습니다."


78세에 연령에 걸맞지 않아 보인다고 하자 한마디 했다..

"요즘엔 한국은 75세면 젊은 노인, 그러니까 '청노인'이지요. 참전용사회에서는 80세 이하가 청노인입니다."

 
 ‘다부종전투’ | 박용철 이사

84세 고령인 그는 6.25의 흔적이 온몸에 박혀있었다.

"내 고향은 평양입니다. 월남했는데, 요즘말로 탈북자입니다.” 그는 서울대 공대 3학년 때 6.25가 터져 부산에 있는 대학 친구집으로 피난갔다가 부산 역전에서 모병관이 모병할 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했다.

"친구 집에 있던 태극기에 먹물로 집안 사람 모두의 이름과 무운장구의 뜻을 담은 글을 써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모병소로 달려가니 마치 물구덩이로 뛰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 학정과 만행을 북에서 이미 겪어온 나에게는 너 죽고 나죽자는 각오로 참전했습니다."

대학 시절 학도 호국단 간부들의 군사훈련을 맡아본 경험 덕분에 며칠 후 이등병에서 일등병으로 진급하여 야간훈련, 사격, 총기분해 등 훈련장교의 조교가 되어 열심히 신병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50년 8월 13일 그는 트럭을 타고 낙동강 전선에 출동했다.       


"트럭에 오를 때 내 앞에 오르던 녀석이 M1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를 쳤습니다. 예감이 불길했습니다. ‘머리를 얻어맞고 죽을 것인가’하고 직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9월 9일 나는 후두부를 얻어맞고 빈사상태에서 뇌수술 끝에 살아남았습니다."

그후 그는 육군 1사단, 1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 대원이 되었다.

"어쩌면 모조리 1자만 내리붙는 소속이 나와 한편 신나고 외우기 쉬운 탓으로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아마 1사단 사령부인 듯했습니다. 다시 출발 전 우리 소대장과 중대장이 와서 각별히 반기면서 나에게 하사 계급장을 주었습니다. 결국 입대 일 주일만에 이등병에서 하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가 좌편에는 1사단장 백선엽 장군이 지도를 보면서 참모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목격되었습니다."

그가 탄 부대와 유엔군은 8월 13일 경북 칠곡군 왜관 북쪽 수암산으로 침입한 인민군 제3사단과 맞붙어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난 그 유명한 '다부종전투'이다. 한국전쟁사에 최고의 격전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부대는 왜관으로 가는 908국도를 가로질러 839m되는 폭격받은 유학산으로 공격해 올라갔다. 밀고 밀리는 5~6명의 포로를 잡기도 했다.

"자정이 지나서 포로를 붙잡았는데, 후방으로 호송해 갔습니다. 포로들은 15~6세 되는 앳된 소년병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주머니에서는 하나같이 김일성의 명령, 인쇄물이 발견되었고,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씌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대에는 엿과 미숫가루, 잎담배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계속 전투는 치열해졌다. 8월 22일에는 적의 박격포가 10여 발을 쏘기에 그는 동료들과 함께 포탄이 떨어진 구덩이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왜냐하면 그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거의 또 떨어지는 확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약한 화약냄새와 먼지가 섞인 구덩이는 10~15c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능선 개인호에서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소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적의 습격이었습니다. 우리도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있는 전우가 사격하는 것이 고막을 찢는 듯했습니다. 화끈한 감각과 함께 내 귀는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측에서 받은 충격이 좌측 청각까지 영향이 오는 것을 의아롭게 생각하며 계속 사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많은 전우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그는 목숨 대신에 청각을 잃어버렸다.


그 뒤 9월 5일, 팔공산 전투에서는 더 치열했다. 새벽 폭우가 쏟아질 때 시작된 적의 공격과 일제 사격은 불바다가 되는 듯한 착각을 갖게 했다. 수많은 피투성이 중상자가 속출했다.

"나는 이마에다 십자가를 긋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순간 쏴하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몽둥이로 후려 갈기는 것처럼 때렸습니다. 잠시  후 내 목을 타고 등 뒤로 뭔가  뜨끈뜨끈한 게 흐르는 것 같아서 손을 대어보니 왼쪽 뒷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쓰고 있던 헬멧 밑에 네 겹으로 접어 넣었던 태극기에 구멍이 뚫리고 군모도 뚫린 상태로 굴러있었습니다. 압박붕대를 꺼내려고 해도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소대장과 위생병이 뛰어나와 나를 끌어올리고 업었습니다. 위생병은 아침 폭우로 물이 불은 개울을 건너 내 머리에 압박붕대를 감았습니다.

가까스르 언덕 넘어 야전병원에 도착하니 주사만 한 대 놓고 딴 부상병들과 함께 대구 도립병원으로 트럭 편에 운반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중상자들은 부산 육군 제5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내가 실린 화물칸에는 나처럼 머리 부상자가 있었고, 한 명의 중상자는 숨이 끊어졌습니다. 부둣가에 임시로 마련된 부상병 대기소는 가마니 바닥이었고, 그 위에는 배로 실려오는 포항 지방 부상자와 내가 함께 누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대대적인 반격으로 미군들이 이 고지를 탈환했을 때에 골짜기에는 알몸으로 손을 뒤로 묶인채 총검에 의해 무참하게 찔려죽은 미군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적병이 미군의 군복과 군화, 시계 등을 모두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유엔 사령부는 이 잔학하고 비인도적인 북한의 태도에 치를 떨었으며, 제네바 협정에 의거한 포로들의 인권보장을 촉구하기도 했다.      

박용철 이사는 그 유명한 낙동강 전투의 처참한 상황을 온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낙동강이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지는 그 절박한 상황을 그가 경험한 것이다. 제대 후, 다시 대학을 다니면서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단해 보니 고막이 약간 파열되고, 신경은 죽은 상태라고 하였다.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는 무조건 강단 바로 밑을 택했습니다. 필기하기가 힘들어 친구의 노트를 빌려보고 적어 옮기면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신체적으로 그 엄청난 후유증을 겪으면서도 공대를 졸업한 그는 화학 엔지니어링 기술자로 호주에 기술 이민을 와서 보타닉 피혁 가공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기도 했다.


 
“평양에서 중학교 4학년 때인 45년부터 신앙생활했습니다. 북한에서 평안교회 김윤찬 목사님 밑에서 말입니다. 김익두 목사님 사경회를 듣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이 기독교 집안인데, 아버지가 평양 숭의학교 교사했던 박우병 집사입니다. 그 전에 오산중학교 교사할 때에 기독교 집안이 되었지요. 기독교 집안이지만,  내 자신이 감동하여 교회 나간 것은 45년부터입니다.


그 이유는 평양서 140킬로 떨어진 묘향산에 우리 집이 있었습니다. 주말마다 묘향산에 기차 타고 고향에 왔다 갔다했습니다. 한 번은 나올 적에 어떤 젊은이가 노인 한 사람을 업고 기차를 타요, 자리에 앉더니 나보고 '젊은이, 할머니가 평양 가는데 모시고 가달라'고 해요. 평양에 도착하여 그 할머니를 업고 짐을 들고 나오니 할머니가 '젊은이 교회 나가세요' 하는 거예요. 그때 '아 교회 나가는 게 다 이런 것이구나' 하여 교회 나갔습니다. 

큰 아버지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박희병 장로, 나와 사촌인 박 장로의 아들 박용진은 새문안교회 목사로 있다가, 재산을 다 처분하여 서빙고교회 개척해서 목회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면 고독하게 되는데, “고독을 풀어주는 것은 교회 나가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심지어 “자식보다 더 좋은 곳이 교회”라고도 하였다. "교회 나가면 부축해 주고, 반갑게 영접해 주고, 바로 지상천국이에요."

그는 서예로 소일하면서 적적하여 개도 한 마리 키운다고 하였다.

"고놈이 얼마나 영리한지... 하나 불안스러운 게 집사람이 건강이 불편하여 항상 불안합니다."

 
‘켈로부대(KLO)’ | 이영철 이사

올해 87세인 그는 6.25 당시 미극동사령부 직할 특수첩보부대(켈로부대) 출신이다. 켈로(이하 KLO)부대원은 임무의 특성상 계급, 군번도 없고, 낙하산으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임무를 완성해 낸 역전의 용사들이다. KLO 부대원은 서울과 경주훈련소에 있는 대원과 백령도 등 서해안 도서지방과 북한에 침투해 있는 대원을 포함해 5천여 명 정도였다. 세상에는 10만~30만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숫자 부풀리기는 적에 대한 심리전으로 활용되는 장점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적지에서도 신출귀몰하는 KLO부대원들은 전쟁 기간 중 북한엔 공포의 대상이었고, 국민들에게는 신화적 존재였다.                                               

 
어쩌면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은 이들이다. 적지에 들어간 대원들은 10명 중 9명은 목숨을 잃어야 했고,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대원들조차도 '간첩'이라는 곱지 않은 눈총 때문에 KLO 부대원임을 숨기고 있어 이들의 활동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개성이 고향인 그는 공작대원 11명과 함께 큰 활약을 하면서 강화도, 교동도, 증산도, 용매도, 연평도, 백령도, 순위도 등 서해안이 대한민국 땅이 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백령도 서부지구 섬을 사수할 때 당시 활동하던 사람들이 다 유명을 달리해, ‘한국전쟁의 유격전사’를 써내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 당시 이 지역들은 완전히 적지였습니다. 한마디로 지방 빨갱이들이 득실대는 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KLO 부대원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해병특공대(게릴라부대)와 함?지방 빨갱이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질서를 유지하여 교동을 사수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해군함대 302, 미군과 혼합된 해병대 독립중대가 지원 협조하여 지금의 NLL(정전선)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 당시 켈로가 활약하지 않았다면 육지도 버리고 후퇴한 우리 정부가 하찮은 섬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만일 지금 이 섬들이 아군 진지가 아니었다면 강화도와 김포 사이가 정전선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정전하게 되었는데도, 이 대통령은 방위 무상 지원 등을 조건으로 수용했습니다. 38선이 아닌 현지, 내가 서있는 곳이 정전선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성이 38선 이남 땅인데 북한 땅이 돼버렸지요.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도인 서해 도서(島嶼)지방을 생명 걸고 사수했는데, 한때 대한민국 정부가 NLL을 유엔사령부에서 개인적으로 그은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양호 국방부 장관이 그런 식으로 말했지요. 국방부장관이 그런 것도 모르고 개인적으로 그었다고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 소위 좌파 10년 동안 그렇게 나왔으니 이북에서도 개인적으로 그은 것이라고 해요. 아군 유격대가 피흘려 사수하여 '현지 중심의 NLL'로 우리 땅이 되었는데, 정부 당국자가 개인적으로 그은 것이라고 하니 북한과 영토분쟁이 된 것입니다. 피흘려 사수한 땅을 그렇게 쉽게 정신없이 말해버렸습니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백령도, 연평도(대연평, 소연평), 교동, 강화 등 만약 이 서해 5도를 사수하지 않았다면, 강화, 김포, 인천공항은 상상도 못한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이를 밝히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유엔사령관이 절대 개인적으로 그은 NLL이 아니고, 유엔군 유격대가 사수한 땅임을 유엔에서 확실하게 증명해줘야 한다”고 거듭 역설했다.

"이것은 독도 영토문제와 비슷합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전국민적으로 그렇게 들고 일어나면서 왜 서해도서에 대해서는 그렇게 무관심하고 무지한지 모르겠습니다. 독도는 일본과 관계돼 반일감정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솔직히 더 심각한 것은 서해 도서문제를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남한과 북한이 영토분쟁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항상 이쪽이 손해봅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불편한 게 너무 많거든요.

정전 이후 일어난 연평해전, 천안함 사건 등 바다에서 일어난 이 국지전이 다 여기에서 비롯된 문제 아닙니까?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그곳에서 많은 동료들이 생명 바쳐가며 오도인 섬을 지키면서 이득이 뭡니까? 사실 필요 없는 땅인데, 산업, 경제면에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그렇다면 독도는 뭡니까? 동존상잔의 슬픈 비극을 안고 서해를 사수한 8240유격대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합니다."

그는 누가 이 작업을 하는 데에 도울 손길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지난 두 달 동안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천안함 사건도 사실은 영토분쟁에 해당한다고 그는 못박았다. 

 
새는 좌우로 난다

한국전쟁은 외세에 의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을 뿐 아니라, 그 비극에 대한 소화불량으로 인한 자기 정체성 상실의 비극이기도 했다. 6.25가 환갑의 나이를 먹어오는 여정 가운데 우리는 극심한 좌우 대립을 겪어야만 했다. 군사정권의 반공 국시부터, '좌파정권'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소위 '좌충우돌'로 너무도 많은 국력낭비가 있었다.

누가 말했던가. “새는 좌우로 난다”라고. 또 사람은 왼손과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쓸 때 안전하다. 한 손만 쓰는 사람은 왼손잡이거나 오른손잡이다. 혹은 자동차 운전자도 좌우 깜박이를 요령껏 사용할 때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다. 왼쪽 깜빡이만 쓸 수밖에 없는 자동차는 제구실을 할 수 없다. 물론 이처럼 방향을 의미하는 좌와 우가 ‘유명론(唯名論)’을 넘어서서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에서 말하는 좌우의 개념에 유의미하게 적용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으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그 은유법에 익숙해졌다. 하기야 프랑스의 혁명의회에서 나온 좌우 개념도 자코뱅당과 지롱드당이 의장석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 쪽에 포진한 위치에서 유래했으니, 방향성으로서의 좌우 개념을 크게 문제시할 만한 것도 아니다.

물론 새는 좌우로 날고 비행기도 좌우로 방향을 잡으며, 또 새가 아닌 사람도 어깨에 밀납을 붙이면 왼쪽, 오른쪽으로 난다. 이미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명공인 다이달로스가 이런 방식으로 날개를 만들고 자신의 아들인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붙여주었다.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달아주며 한 당부는 하늘을 향해 너무 높이 날지도 말고 또 너무 낮게 날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던 이카로스는 이 충고를 어기고 좌우 날갯짓을 하며 높이 날다가 밀납이 태양열에 녹는 바람에 에게 해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사실 높이 나는 것이나 낮게 나는 것이나 비극을 초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6.25 환갑을 맞으면서 좌충우돌이 아닌 균형과 조화로 새로운 성숙,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열어야 할 때임을 기대한다. 먼저 우리 이민사회부터!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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