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최초 공무원 ‘로버트 란돌프 가랜’의 삶

Robert Randolph Garran

정지수/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1/27 [10:59]
▲ 로버트 란돌프 가랜 경 (1931년)     


로버트 란돌프 가랜(Robert Randolph Garran 1867. 2.10~1957. 1.11)은 변호사로서 호주 최초로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1901년에 법무장관실의 비서관이 되었고, 이후 호주 정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1916년에 호주 법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가랜은 1867년에 시드니에서 일곱 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앤드류 가랜 (Andrew Garran)은 호주 정착 초기에 성경 교사로 (Christian Instructor)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으며, 이후에 언론인으로, 정치인으로 살았다.

 

그의 어머니인 메리 가랜 (Mary Garran)은 여성 교육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시드니 모닝 헤럴드 (Sydney Morning Herald)의 편집자로서 개혁주의 운동을 취재하고 호주 연맹 운동을 옹호했으며 이후에 뉴 사우스 웨일즈 (New South Wales) 입법 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승진되었다.

 

▲ 로버트의 아버지 앤드류 가랜의 초상화 (1896년)    

 

가랜의 가족은 시드니 시내에 위치한 필립 스트리트에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뒷마당에서 소를 키워 우유를 직접 생산하기도 했다. 이후, 가랜의 가족은 도시 중심부의 동쪽에 있는 달링허스트 (Darlinghurst)로 이주해 살았다.

 

한편, 가랜은 10살 때부터 시드니 그램마 스쿨 (Sydney Grammar School)에 다녔다. 그는 성실한 학생이었고 1884년에 학교 학생회장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시드니 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해 1888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1899년에는 1급 문학 석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변호사 시험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는 시드니에 있는 변호사 회사에서 1년 동안 근무했다. 1890년에는 주정부 대법원의 판사의 서기로 근무하기도 했다.

 

가랜은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호주 연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호주 최초의 연방 헌법 대회가 1891년 시드니의 맥쿼리 스트리트에 있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 의원 회의소에서 열렸을 때, 가랜은 정기적으로 회원으로 참석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말 1919년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한 호주 대표단. 왼쪽부터 앞줄 2번째 로보타 그랜 법무장관.     

 

▲ 가랜과 그의 아내 힐다(Hilda, 왼쪽에서 각각 두 번째와 첫 번째),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Sir Littleton Groom과 그의 아내 Jessie(각각 오른쪽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1926년 텔로피아공원에서 촬영.     


한편, 가랜은 호주 연방 운동의 역사와 호주 헌법 초안에 관한 책인 ‘The Coming Commonwealth’를 출판 했다. 이 책은 당시 이 주제에 관한 몇 안 되는 책들 중 하나로 인기가 많았고 초판은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출판 직후 1897년과 1898년에 열린 호주 헌법 대회의 뉴사우스웨일스 대표로 선출된 뉴사우스웨일즈 수상 조지 리드는 개런을 비서로 이 대회에 초대했다. 이 대회에서 개런은 헌법 초안 위원회에서 비서로 임명되었고, 언론 위원회에서는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가랜은 다른 헌법 초안 위원회 회원들과 함께 종종 밤늦게까지 일하며 다음 날 아침 회의를 위한 초안을 준비하고 토론했다. 이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호주 헌법 초안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호주의 정식 헌법 초안으로 인정받았다.

 

이처럼 가랜은 호주 연방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조지 레이드(George Reid), 에드문드 바톤 (Edmund Barton)과 같은 선도적인 연방주의자들과 친분을 쌓고 호주 연방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한편, 호주 연방 헌법 대회에서 헌법 초안 위원회의 서기로 봉사한 것을 인정받아, 가랜은 1901년 1월 1일 호주 연방 정부에 의해 첫 번째 공무원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호주 연방 정부 창설을 승인하는 빅토리아 여왕의 선언문을 담고 있는 영연방 관보의 창간호를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가랜은 1901년 3월에 실시된 첫 번째 연방 선거를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국방부, 우편 및 전신 서비스 및 무역 및 관세부를 조직하는 일에 관여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는 의회의 새로운 부서들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여러 법안들도 발의했다. 그가 발의한 법안들은 아주 간결한 것이 특징이었다.

 

가랜이 공직에 있는 30년 동안 그는 10명의 다른 수상들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했다. 가랜은 1914년 전쟁 예방법(War Precautions Act 1914)에 따라 만들어진 제1차 세계 대전 징병 국민 투표 및 규정 범위에 대한 법률 자문을 제공했다. 전쟁 예방법은 광범위했고 일반적으로 고등 법원의 지지를 받았으며, 고등 법원은 전시 중에 영연방의 방위력에 훨씬 더 유연한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전쟁 중 그가 담당한 일은 전쟁에 필요한 행정 규정들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호주 정부가 전쟁을 경제적으로 치르고, 호주 군대에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편 휴즈 (Hughes) 수상은 가랜이 키가 크고 신사적이며 현명하고 학자적이며 직원들에게 참을성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 시드니 마틴 플레이스에서 열린 안작데이 행사에 참석한 가랜 (1944. 4.25)    

 

특히 휴즈 수상은 가랜이 소유한 헌법적 전문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호주를 통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랜을 내 옆에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휴즈 수상의 말에서 우리는 가랜이 얼마나 호주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다.

 

가랜은 호주 헌법의 초기 전문가로 간주되었으며, 주석이 달린 헌법 개정판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 1차 대전 중에 빌리 휴즈 (Billy Hughes) 호주 총리와 함께 파리 평화 회의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여러 조약 초안 위원회에 참여했으며 많은 조항, 특히 국제 연맹 위임과 관련된 국제 연맹 규약 부분에 기여했다.

 

호주 정부는 가랜의 수고와 노력을 인정해 그를 1916년에 법무국장으로 임명하였고, 1917년과 1920년과 1937년에는 세 번이나 기사 작위를 부여했다.

 

가랜은 캔버라 시의 발전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 27년에 호주 연방 정부가 수도를 멜번에서 캔버라로 천도한 후 최초로 이주한 공무원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 1928년 캔버라 호텔에서 열린 캔버라 로타리클럽 헌장 발표회. 가렌이 앞줄 가운데 앉아 있다.     

 

▲ 캔버라에 있는 가랜의 주택. (22 Mugga Way, Red Hill)     


그는 몇 개의 중요한 문화 협회를 설립하고 캔버라 대학교 칼리지 설립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으며 나중에 호주 국립 대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그는 평생 동안 호주 헌법, 호주 연방주의의 역사, 독일어 시 등 8권의 책을 출판했고, 많은 저널 기사를 저술했다. 그가 1957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연방 공무원으로서는 최초로 국가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

 

정지수| 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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