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1-39)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3/28 [15:02]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지나친 개인주의와 저조한 출산률 그리고 social distance를 강요받는 코로나 시대로 인해 사회적 관계성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가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인류에게 큰 위험 요소가 된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정신의학협회 학회에 따르면, 관계 상실에 따른 사회적 고립은 공중 보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학회 연구보고서는 유럽, 아시아, 호주 등에서 340만 명을 조사한 결과 “인간의 관계 상실에 따른 외로움은 많은 질병의 원인이 되는 비만보다 더 위험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관계 상실이 주는 위험과 불안에서 자유하고 평안하기 위해서는 깨어지지 않는 안정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들하고 골목에서 축구하고 구슬치기, 딱지치기 하면서 노는 것이 낙이었다.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다보면 잃을 때도 있고 딸 때도 있다. 그런데 잃으면 형을 데리고 오는 친구가 있었다.

 

그러면 그 형이 자기 동생이 잃은 구슬과 딱지를 빼앗아 갔다. 덩치에서 밀리고 나이에서 밀린 나는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장남인 나는 형이 없어서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 형이 집에 놀러 왔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특히 태권도 선수까지 하는 형이었다. 마침 그날 친구들하고 구슬치기를 했고, 내가 많이 따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슬을 잃은 친구의 형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힘들게 딴 구슬을 또 빼앗길 위기에 놓였다.

 

그때였다. 사촌형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의 형보다 더 큰 키에, 더 우람한 덩치를 하고 태권도 선수인 형이 내 이름을 부르자 갑자기 힘이 나고 용기가 생겼다. 오늘은 구슬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사촌 형이 내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사촌형이 놀러오는 날이면 나는 사촌형의 신발을 신고 나가서 구술치기를 했다. 그 신발을 신고 있는한 내가 딴 구슬을 빼앗기지 않았다. 사촌형이 내 편이어도 이 정도인데, 하물며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면 어떨까?

 

바울은 선포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는 한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교회에 가면 아이들, 아기들 소리가 진동한다. 때로는 해맑은 웃음 소리로, 때로는 앙앙거리는 울음소리로 또 매주일마다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로 시끌벅쩍하다. 그렇게 아이들 소리가 크고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다.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 소리가 너무나 좋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대신해 아플 수만 있다면, 아이를 위해 내가 아파야 한다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내 심장이라도 자식에게 떼어줄 수 있는 것이 부모다. 부모에게 자식은 그 어떤 존재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부모가 남을 살리겠다고 자기의 소중한 자식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것도 죄와 허물투성 뿐이 죄인을 위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 사랑하는 자식의 생명을 내어줄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을 주셨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죄 많고 허물투성이뿐인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 것이다. 그런 분이 무엇인들 우리에게 아끼실까? 아니다. 다 주신다. 모든 것을 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선포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누가 정죄하리요

 

신앙 생활하면서 쉽게 빠지는 함정이 죄책감이다. ‘어떻게 나같은 사람이, 나같은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겠어. 이것봐 또 죄를 짓고 있잖아. 다른 사람은 구원받을지 몰라도 나는 자신이 없어. 지금 내 모습을 봐. 엉망진창이야..’ 이렇게 스스로 정죄하며 괴로워한다. 왜 그럴까?

 

의로워지는 것은 내가 의롭게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로움은 내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다.

 

법정에서의 고발인은 검사다. 그런데 검사가 아무리 많은 증거를 들이대고 수없이 많은 증인을 불러내어 피고를 고발해도, 판사가 ‘걔 죄 없어, 무죄야’ 하고 선언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 순간 피고는 자유인이 된다.

 

사탄이 우리를 고발한다.

 

“쟤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쟤는요 모르고 죄를 짓는 게 아니라 뻔히 죄인 줄 알면서 죄를 짓는 악질 중의 악질이예요.”

 

내 마음도 나를 고발한다.

 

“그래 맞아.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어. 하나님도 내 죄는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판결을 뒤집지 않으신다. “내가 이미 다 용서했다니깐, 내가 의롭다고 했는데, 누가 정죄할 수 있겠어!”

 

그렇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이상 누구도 우리를 고발할 수 없고, 정죄할 수도 없다. 바울은 또 선포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힘차게 말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거듭해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친다. 그리고 예를 드는 상황은 극단적이고 강력하다.

 

먼저 “사망이나 생명이나” 우리가 죽든지 살든지 어느 때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육신의 죽음을 맞이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이고, 권세자들은 악한 영들, 사탄을 가리킨다. 천사와 사탄은 초월적이고 강력한 능력을 지닌 초자연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사탄이 아무리 큰 능력으로 우리를 괴롭혀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지금 일어나는 일이나 장차 일어날 일이나, 또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어떤 일이 되었든지 간에, 그 일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은 세상의 권력, 명예, 지식을 말한다. 아무리 권력이 강하고, 명예가 높고, 지식이 깊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더나아가 “다른 어떤 피조물도” 감히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바울이 궁극적으로 전하려는 메시지는, 어떤 경우에도, 그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이 좋을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등을 돌릴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후에 도망을 쳤다. 야곱은 거짓되고 불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졌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사기꾼 같은 야곱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았다.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을 대적했던 사울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졌는가? 아니다. 주님은 밝은 빛으로 사울에게 임하시며 어둠 속에 있던 그를 사랑으로 끌어 안으셨다. 그리고 그를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지고 병들고 쓰러져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악하고 죄 짓고 주님을 배신하고 부인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다. 그리고 죽음조차도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누리면, 이 불안하고 험난한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다.샬롬!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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