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원주민을 품고 선교하는 불도저 목사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09/26 [10:53]
▲ 웰링턴 지역에서 호주 원주민을 품고 열정적으로 선교하고 있는 전국진 목사와 강미영 사모.     © 크리스찬리뷰


8월을 시작하는 첫 날, 호주 원주민을 품고 선교하는 전국진 목사를 만나는 날이다. 전 목사의 별명은 불도저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직진한다.

 

그는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말 호주로 유학을 왔다. 1991년 초대교회 2대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26년간 교회를 섬겼다. 전 목사는 선교사의 심장을 갖고 목회를 했다. 웨링턴으로 원주민 선교를 갔다가 선교관을 구입하여 본격적으로 선교해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웰링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나니마' 마을이 있다. 전 목사는 그곳의 폐교된 학교를 사려고 했다. 원주민 원로회의까지 참석했으나 팔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음 후보지인 더보(Dubbo)에 선교관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더 좋은 곳을 예비하여 놓으셨다.

 

2015년 6월 20일, 웰링턴에 호주원주민 선교관 개관 감사예배가 있었다. 호주 한인 선교의 새롭게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전 목사는 한인 최초로 현지에 선교관을 구입했다.

 

시드니에서 웰링턴까지는 차로 5시간 정도 걸린다. 그는 블루 마운틴을 기점으로 '동쪽은 초대교회가 전도하고, 서쪽은 웰링턴 선교관이 선교할 것'이라는 ‘동전서선’(東傳西宣)이란 모토로 매주 교인들과 함께 웰링턴을 찾았다.

 

전 목사의 원주민 사랑은 시간과 거리가 문제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뜻하지 않은 파킨슨병 판정을 받게 되었다. 전 목사는 더 이상 목회와 선교를 동시에 할 수 없게 되었다. 2018년 말에 시드니 초대교회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웰링턴으로 향했다. 벌써 4년가까이 지나고 있다.

 

▲ 웰링턴 커뮤니티센터를 방문, 원주민들에게 성경을 전달한 전국진 목사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웰링턴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되었다. 전 목사 부부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선교관에 들어갈 시간도 없이 곧바로 사역지로 향하였다. 첫 번째 방문한 곳은 웰링턴 커뮤니티센터이다. 전 목사는 준비한 성경을 담당직원에게 전달해 주었다. 방과 후 아이들을 돕는 곳이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서둘러 ‘나니마’(Nanima) 마을로 향했다.

 

나니마 마을 (Nanima Village)

 

▲ 나니마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 크리스찬리뷰

 

웰링턴에는 2021년 인구 조사에 의하면 4천583명이 살고 있고, 원주민은 25%가 조금 넘는 1천249명이 있다. 웰링턴은 내륙 지방의 원주민 선교의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다. 이곳을 기점으로 내륙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원주민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

 

▲ 원주민 거주지인 니나마 마을을 방문한 전국진 목사 부부가 주민과 어린이들에게 성경과 과자를 나눠주고 기도를 드렸다.     © 크리스찬리뷰

 

대부분 웰링턴 시내에서 살고 있지만 이중 100명 정도는 ‘나니마 마을’에 살고 있다. 전 목사가 방문한 것을 알고 ‘소냐와 카라’ 그리고 아이들이 마중 나왔다. 전 목사는 갖고 간 성경과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 길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도 왔다. 피부색이 백인과 같은 아이들도 있었다. 원주민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1900년에서 1972년 사이에 전체 원주민 아이의 10~30%로 추정되는 약 10만 명의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 아동들이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호주 정부는 미개한 곳에서 살지 않도록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을 ‘빼앗긴 세대’ 혹은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s)라고 부른다. 이들은 입양되거나 기숙사에 수용되어 소위 ‘문명화 교육’을 당한 희생자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성인이 되어서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 나니마 마을 버스 정류장에 ‘나니마’라는 뜻은 ‘산과 물이 만나는 곳이다’라고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이들은 백인 사회와 원주민 사회에서 모두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호주는 1998년부터 매년 5월 26일을 ‘National Sorry Day’로 지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이후 2008년 호주 수상이었던 캐빈 러드는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사과 연설을 했고, 호주 정부는 계속해서 원주민들을 위한 후속 조치를 취하고 있다.

 

전 목사는 가지고 간 성경과 과자를 나누어 주었다. 소냐는 카라의 엄마이다. 카라에게는 두 아이가 있다. 전 목사는 사역 초창기부터 카라 가정을 잘 알고 있다. 전 목사가 나니마 마을을 갈 때마다 가장 반겨주는 것은 카라 가정이다. 전 목사가 카라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카라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카라는 마약을 하고 있다. 전 목사는 카라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기도를 마친 전 목사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마약을 끊으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 폐교된 원주민학교     © 크리스찬리뷰
▲ 폐허가 된 교회     © 크리스찬리뷰
▲ 김환기 사관이 전 목사 부부의 원주민 사역을 위해 기도했다.     © 크리스찬리뷰

 

마을 이름인 ‘나니마’란 의미를 알고 싶었다. 소냐는 길가의 버스 정류장으로 기자를 인도했다. “Where MOUNTAINS & RIVERS Meets”, 나니마는 ‘산과 물이 만나는 곳’이다. 나니마 마을 뒤에는 아름다운 산이 둘러 있고, 앞 쪽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마을에는 폐교된 학교가 있고, 조금 떨어져서는 폐허가 된 교회가 있다. 전 목사는 이곳에 교회를 재건할 꿈을 꾸고 있다. 전 목사는 마을을 떠나기 전에 기도를 부탁했다. 나는 나니마 마을과 웰링턴을 위해서 기도했다. 특별히 전 목사 부부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했다.

 

두 사람의 마음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이시니, 이 일이 이루어 질 때까지 두 분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시고, 돕는 손길들을 많이 보내 주셔서, 크고 비밀한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호주 원주민 (Australia Indigenous People)

 

▲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 아동. 이들을 빼앗긴 세대 혹은 도둑맞은 세대라고 부른다.     © 크리스찬리뷰

 

호주는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이다. 한반도의 35배, 남한의 77배의 넓은 땅이지만, 인구는 남한의 절반이 되지 않는다. 1788년 1월 26일, 11척의 배로 1천500여 명의 영국 죄수들과 이주민들이 지금의 록스 지역에 상륙하면서 백인들에 의한 호주의 역사가 시작된다.

 

▲ 웰링턴 지역을 중심으로 원주민 사역을 펼치고 있는 전국진 목사의 사역 현장.     © 크리스찬리뷰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4만 년 전부터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호주 원주민은 ‘에버리지니’(Aboriginal)와 ‘토레스해협 섬주민’(Torres Strait Islander)을 말한다. 인구 비율을 보면 에버리지니가 91.4%, 토레스해협 섬주민 4.2% 그리고 에버리지니와 토레스 해협의 신분을 동시에 가진 4.4%이다.

 

1967년 국민투표로 헌법이 변경되기 전까지 호주 원주민은 인구조사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원주민이 처음으로 인구조사에 포함된 것은 1971년이다. 첫 번째 인구 조사 때는 원주민 인구가 11만 5천993명이었다.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세 번의 인구조사를 통해서 호주 원주민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2016년 64만 9천171명이었고, 2021년도에는 81만 2천728명으로 확인되었다. 5년 전보다 인구가 25.2% 증가한 수치이다. 평균 연령은 2016년에는 23세, 2021년에는 24세이다. 남녀 비율은 2016년에는 여성 100 : 남성 98.5, 2021년에는 여성 100 : 남성 98.7으로 여성이 조금 많다. 호주 전체 인구의 2011년 2.5%. 2016년에는 2.8%, 2021년에는 3.2%를 차지하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 1/3이 조금 넘는 34.2%가 뉴사우스웨일즈, 29.2%는 퀸즐랜드, 서호주에 10.9%가 살고 있다. 노던 테리토리는 2016년 9.0%에서 2021년 7.5%로 감소했다.

 

오렌지초대교회

 

저녁 시간이 되어 웰링턴 RSL 클럽으로 갔다. 더보에서 선교하는 동원익 목사 부부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 목사는 더보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온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

 

더보는 인구가 6만 정도 되는 큰 도시이다. 더보에서 희토류가 발견되어 현대와 계약을 맺고 공장을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더보 이후 지역을 호주의 ‘아웃백’(Outback)이라고 한다. 아웃백은 호주의 건조한 내륙부에 사막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넓고 인구가 희박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렌지초대교회 전도사 부부 그리고 성도 한 분이 합류하였다. 오렌지는 웰링턴에서 시드니 쪽으로 1시간 떨어진 곳에 있으며 5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오렌지에는 한인교회가 없었다. 오렌지에 사는 교인들이 한인교회 설립을 위해 기도하던 중 전 목사가 웰링턴에서 사역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교인들은 전 목사를 초빙하여 가정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코로나 사태로 예배가 잠시 중단되었지만 드디어 2022년 4월 24일 오렌지초대교회 창립 1주년 기념예배 및 장로 임직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전국진 목사는 건강이 불편한 몸이지만 오렌지와 웰링턴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의 한인들을 위한 한인교회를 개척해 사역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질롱교회를 섬기는 최춘식 목사가 말씀을 전했고, 홍사일 안수 집사가 장로 임직을 받았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시드니에서도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해서 70여 명의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 전 목사는 웰링턴 커뮤니티센터와 오렌지초대교회를 아웃백 선교의 전초기지로 생각하고 있다.

 

전 목사 부부와 인터뷰

 

아침 일찍 일어나 시내를 돌아보았다. 구세군웨링턴교회가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1904년 11월 23일에 개영을 했고, 1964년 12월 12일 건물을 보수했다. 맥콰리 강을 건너는 다리 입구에 웰링턴 교도소로 가는 이정표가 서있었다. 맥콰리 강은 새벽 물안개를 일으키며 웰링턴의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얼마 전 전 목사는 교도소 사역을 위하여 담당자를 만났고 교도소 출입증을 신청했다. 선교관 마당에는 테니스장과 수영장 그리고 교회도 있었다. 선교관 내부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방으로 구분하여 침실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 웰링턴에는 언제 이사 오셨나요?

 

“2018년 12월 22일 왔습니다. 2016년경에 갑자기 찾아온 파킨슨병으로 잠을 잘 수가 없고, 입맛도 잃고, 동작이 더디어지고 판단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집안에 파킨스병에 대한 유전적인 요인은 없습니다. 아마 선교와 목회를 병행하면서 무리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전같이 활발하게 목회할 수 없게 되면서 점점 교인들 보기가 미안했습니다. 오랜 기도 끝에 결단을 내리고 선교에만 집중하기 위하여 웰링턴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 웰링턴에서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웰링턴으로 이사 온 후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국과 시드니에서 선교팀들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아내와 함께 하는 사역을 선교팀이 올 때는 선교팀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렌지초대교회를 개척하여 금요집회와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 오렌지초대교회는 교인이 얼마나 되나요?

 

“지금은 10여 명의 성도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초대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전도사 부부가 오렌지로 이사를 왔는데 전도사가 토요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는 웰링턴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오렌지로 갑니다. 오렌지연합교회를 빌려 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린 후 식사하며 친교를 합니다. 오후에 웰링턴으로 돌아와서 선교관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다시 예배를 드립니다.”

 

- 웰링턴 사역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죠?

 

“저는 원주민 선교를 위해 3년 7개월 전에 시드니를 떠나면서 ‘서부 전 지역이 내 교구다’라고 다짐하고 웰링턴으로 이주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사역을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웰링턴 근처에 있는 나니마 원주민 마을을 선교지로 삼았고 가정 심방을 통해 예배 기도, 성경읽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날 때마다 심방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 웰링턴 호주 원주민 선교관 개관 예배를 지난 2015년 6월 20일에 가졌다. (맨 위) 선교관에는 테니스코트, 수영장을 비롯해 숙박시설과 미팅 룸들이 잘 구비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둘째, 단기 선교팀이 올 때는 나니마 마을에 가서 예배와 교육, 월링턴 타운에서 노방전도, 원주민 커뮤니티 센터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니마 마을에 예배당이 없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예배당을 짓는 것입니다.

 

셋째, 웰링턴 시내에 사는 원주민 가정들을 심방하여 마약, 알콜, 이혼에 대해 상담하고 말씀과 기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교관 바로 옆에는 정부에서 원주민을 위해서 지어준 단지가 있습니다.

 

넷째, 북서쪽으로 길간드라, 길라갬본, 웰링턴에서 210km 거리에 있는 쿠남불 세 지역을 선교 범위로 정하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웰링턴 교도소 선교입니다. 수감되어 있는 한국인들을 상담하기 위해 교도소 출입 허가증을 신청했고, 교도소 목사(Chaplain)와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제 사역의 핵심은 원주민 가정을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정이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내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주 심방을 갑니다.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저는 제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그들을 만날 때 눈물이 납니다. 아이들은 방치되어 마약을 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짐승처럼 지내는 것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뿐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보급도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 선교팀은 자주 오나요?

 

“한국과 시드니에서 자주 옵니다. 2022년 1월과 2월에만 여섯 팀이 왔습니다. 선교팀은 이곳을 베이스로 하고 더보 등 더 깊은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선교에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호주의 한인교회와 한국 교회가 서로 협력하여 네트워크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각개전투 아닌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합니다. 대학 때에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경험이 있어서 네트워크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 원주민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시드니에서 사역할 때 어느 날 원주민 선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웰링턴에 왔습니다. 현장에 와서 원주민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주민의 생활은 제가 상상하는 것을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 라고 강조하는 전국진 목사. 그는 웰링턴을 중심으로 서부 내륙 지역 선교의 꿈을 불태우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도둑질은 다반사고, 마약, 강간 등이 비일비재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원주민 집에 들어 가보니 마치 동굴 같았습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지만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원주민들은 백인교회를 가지 않습니다. 그때 이후로 원주민을 품고 본격적으로 선교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 사역의 키워드는 서부 개척입니다. 미국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서부를 개척한 것처럼 서부 개척의 기수가 되고자 합니다.

 

교회의 존재의 이유는 선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생명이고, 생명은 한 곳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복음과 생명이 있고, 선교가 있어야 합니다.”

 

- 선교관을 구입한 이유가 있나요?

웰링턴은 서부지역 선교를 위한 베이스 캠프 같은 곳입니다. 웰링턴을 시작으로 내륙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할 일이 더 많습니다. 원주민 선교를 하는 분들은 많지만 지금까지 선교지에 선교관을 구입한 분들은 없습니다.

 

선교는 선교지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선교 현장에 선교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선교를 제대로 하려며 선교관을 구입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선교관 구입을 위하여 여러 곳을 물색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좋은 곳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 샀습니다. 넓은 땅, 수영장, 테니스 코트 등 부대시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웰링턴에서 가장 좋은 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용도 변경은 어떻게 하셨나요?

 

“이곳이 처음에는 가정 집이었습니다. 이제는 용도 변경하여 문화센터(cultural centre) 겸 교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용도를 변경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지 몰라서 설계사를 찾기 위해서 잡지를 펼쳤지만 아는 이름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 6천70스퀘어 미터의 선교관 부지. 선교관 옆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빈 땅에 전국진 목사는 원주민을 위한 병원을 세울 계획이다.     © 크리스찬리뷰

 

전 목사는 기도 중에 무작정으로 전화를 돌렸다. “여기는 웰링턴이고 건물 용도 변경을 하려고 합니다. 도와 주실 수 있습니까?”

 

“뭐라고요? 어디라구요?”

 

흥분된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발음이 나빠서 못 알아들은 줄 알고 세 번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여기는 웰링턴입니다. 웰링턴, 웰링턴”,

 

“정말입니까! 제가 2년 동안 웰링턴에서 건물 용도변경 일을 하다가 얼마 전에 시드니에 왔습니다.”

 

할렐루야!, 그 많은 설계사 중에 어떻게 이 사람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분을 통해서 용도변경은 일사처리로 처리되었다. 아침에 검사를 하고 오후에 용도변경 증명서를 찾아왔다.

 

-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나요?

 

“선교관은 6천70스퀘어 미터입니다. 선교관 옆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빈 땅도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 원주민을 위한 병원(Medical Centre)을 건축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은 치유(healing), 가르침(teaching), 설교(preaching)입니다. 선교의 현장에는 반드시 병원과 학교 그리고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새순교회에서 선교팀 60명이 왔습니다. 그때 시설을 더 확장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현대식 숙박시설과 교회도 지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니마 마을은 물론이고 아웃백에도 원주민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서부개척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네트워크를 조성하여 효과적인 선교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제가 사는 이유는 제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 이웃에 살고 있는 원주민 가정을 전도차 방문한 전 목사 부부.     © 크리스찬리뷰

 

저는 원래 법을 전공하여 판검사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고 나서 삶의 방향이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오렌지초대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갈 때마다 많이 웁니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면 눈물이 한없이 흐릅니다.”

 

- 사모께서는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시나요?

 

“저는 남편의 사역을 도와주면서 매일 기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시드니와 큰 차이점이 있다면 모든 일을 남편과 제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교에만 집중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지금은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주님을 위해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마침내 그 일을 찾은 것 같습니다. 호주에서 소외된 원주민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보람됩니다.

 

지금은 선교지에서 돌멩이를 고르는 수준이지만 누군가 이곳에 씨를 뿌리고 많은 열매를 거둘 것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급행열차라면 저는 완행열차입니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목사님의 속도를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는 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목사님이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을 때는 하나님을 원망도 했습니다.

 

▲ 남편인 전국진 목사가 급행열차라면 자신은 완행열차라고 말하는 강미영 사모.     © 크리스찬리뷰

 

하지만 이제는 욥과 같이 연단하신 후에 정금과 같이 나올 것이란 믿음을 갖고 순종하며 기쁘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지만 영성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는 불을 토해내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선교관을 나오니 옆집에 살고 있는 원주민 아주머니가 사모에게 다가와 뭔가 징징대며 하소연을 하였다. 그녀는 자녀들 때문에 많이 속상해하고 있었다.

 

집 앞에서 손을 흔드는 원주민 할머니도 있었다. 할머니 얼굴은 미소로 가득차 있었고, 입에는 감사와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다.〠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