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공식 호칭은 ‘영국 연방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of the United Kingdom)이다. 1952년 부왕인 조지 6세 (George VI)가 사망한 후 그녀는 왕위에 올라 약 70년 동안 영국을 포함한 16개의 영연방 국가들의 명목상 군주로 활동했다.
그녀에게는 약 1억 2천 만여 명의 백성들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영국 성공회 (Anglican Church)의 최고 대표자였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왕좌에 있는 동안 54개의 영국 연방 국가들 가운데 32개국이 공화국이 되었고, 5개국이 자국 군주를 옹립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16개국이 아직도 영국 군주를 국가원수로 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16개 국의 국가원수로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이들 국가들을 연합해 일관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2003년에 발발한 이라크 전쟁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영국과 영연방 국가인 호주는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지만 같은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불참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호주와 캐나다의 국가수장이었지만, 두 나라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취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생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1926년 4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지 6세 (George VI)였고,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Elizabeth Bowes-Lyon)이었다. 맏딸이었던 그녀에게 여동생인 마거릿(The Princess Margaret Rose)이 1930년에 태어났다. 1936년 그녀의 아버지 조지 6세가 왕위에 올랐고, 그녀는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제왕학을 배우며 바쁘게 살았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말을 타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동물들을 좋아했다. 특히 말과 강아지를 좋아했는데 여왕이 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농장에서 말과 강아지를 키우며 살았을 것이다.
그녀가 13살 되던 해에 그녀의 삶에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해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또한 같은 해 성탄절 행사에 그리스 왕자인 필립(Phillip)이 참석했는데, 그녀는 필립 왕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그녀가 쓴 편지는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들은 곧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45년에 그녀는 전쟁에 직접 참전했다. 그녀는 비전투병인 군용트럭 운전병으로 배치되었다. 그녀의 임무는 군수 보급물품과 탄약 등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른 운전병과 동일한 훈련을 받았고, 동일한 임무를 할당받았다. 그녀의 군복무 모습은 영국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그녀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엘리자베스 2세는 필립 왕자와 1947년 1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3명의 왕자와 1명의 공주를 출산했다. 1952년 2월 6일 부왕인 조지 6세가 사망했고, 그녀는 영국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대관식은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치러졌다. 당시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 중이었지만 사절단을 대관식에 파견했다.
국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급락한 영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영연방 국가들을 국빈방문 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최고 수장 방문 행사를 치렀다. 인도는 50년 만에 영국 국왕의 국빈방문을 경험했다.
그녀의 외교적 노력은 국제사회에서 영국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한편, 2011년 5월에는 100년 만에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공식 방문했고 2012년 6월에는 독립을 요구하는 북아일랜드를 방문해 독립운동을 하는 IRA의 총사령관을 만나기도 했다.
그녀는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국빈방문해 하회마을과 성공회 서울 대성당과 이화여자대학교를 방문했다. 2004년에는 영국을 국빈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내외를 만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외교적 노력으로 영국의 위상과 영국 왕실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자녀들로 인해 높아진 위상이 실추되기도 했다. 그녀의 딸인 앤 공주는 평범한 가문의 마크 필립스 대위와 결혼해 구설수에 올랐다.
그들의 결혼을 비판한 자들도 많았지만 두 사람의 행복을 빈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앤 공주는 평탄치 못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다가 결국 이혼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들인 웨일스 공 찰스(현재 국왕)는 다이애나와 결혼해 윌리엄 왕자와 헨리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찰스는 아내인 다이애나와 불화를 일으키더니 결국 이혼했고, 카밀라 파커 보울스(현재 왕비)와 2005년에 재혼했다. 이혼과 재혼이 왕실에서 자주 반복되자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떨어졌고 이혼당한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국민들은 그녀를 버린 찰스를 원망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영국 왕실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영국 왕실을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영국 전역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가운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중심을 잡고 영국 국민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국내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명목상의 군주이기 때문에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지만 우회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형식적으로나마 그녀는 매년 국회를 소집하고 해산했고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리를 임명하기도 했다.
선출된 총리는 매주 화요일마다 여왕을 만나 여러 현안을 논의했다. 그녀는 70년 재위기간 동안 총 열 두 명의 총리들과 함께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국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2007년 12월 24일에 더 로얄 채널(The Royal Channel)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영국 왕실의 소식을 전했다. 2010년에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개정을 열어 소통을 확대했다. 또한, 그녀는 620개가 넘는 여러 사회단체들과 자선단체들을 후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보유한 재산은 약 3천500억 원 정도다. 이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일 뿐 미술품이나 골동품 등의 가치를 다 포함하면 조 단위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영국 왕실의 재산 문제가 구설수에 오르자 그녀는 1993년 왕실 면세 특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녀는 2008년에 약 1천억 원 정도를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 하지만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로 주가가 폭락해 손해를 많이 보았다.
한편, 왕실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재정 지원금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영국 왕실은 1991년에 정부로부터 약 7천만 파운드의 지원금을 받았지만, 2013년에는 3천만 파운드의 지원금을 받았다. 이 지원금도 매년 축소되어, 지금은 정부지원금이 왕실의 주수익원이 아니다. 왕실의 주수익원은 주식과 부동산이다.
한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2007년 11월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영국 연방 정상회의가 열렸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참석했는데 과격파 이슬람 단체가 그녀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전에 이 계획이 탄로나 그녀는 무사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2022년 9월 8일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쳤다.
그녀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진심 어린 조의를 표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많은 나라들도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고 전 세계 지도자들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해 슬픔을 나누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아니다. 그녀의 죽음을 통해 식민지 시대에 영국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약 200년 전에 영국은 전 세계를 약탈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짐승처럼 납치해 노예로 부려먹거나 팔아먹었다. 1천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무 죄 없이 낯선 땅에 끌려가 노예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온갖 문화재를 약탈해 자신들의 박물관에 채워 넣었고, 금과 다이아몬드를 약탈해 갔다. 그들은 미국과 호주 등에 몰려가 원주민들을 죽이고 땅을 차지했다. 그리고 차지한 땅에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풀어놓아 농사를 짓게 했다.
심지어 인도에서 마약을 재배해 중국에 팔기까지 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영국 왕실이 가진 부와 영광은 아프리카 사람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호주 원주민들의 피 값일 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사과도 하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정당인 경제자유전사당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재위기간 동안 영국이 저지른 범죄를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그녀가 오히려 영국의 잔혹한 과거사의 자랑스러운 상징적 인물로 존경 받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또한, 그녀가 스코트랜드에서 최후를 맞은 것에 대해 비판하는 자들도 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스코트랜드에서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녀가 현재 스코트랜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 일부러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는 다양한 사항들을 고려해야 한다. 한편으로 치우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 영국 왕실의 최장기 군주로 영국 왕실의 품위를 보여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추모하면서 호주가 영연방 국가체제를 유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지수|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사진|Website of the British Royal Family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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