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

한길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10/24 [16:22]

들어가는 말

 

지성주의란 사건·사고를 이해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나 집착, 감정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이성이나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세계관이나 접근방법을 말한다.

 

그렇다면 반지성주의는 인간의 의지나 집착, 감정에 큰 가치를 두는 세계관이다.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가 기독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기독인의 삶이란 항상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뛰어 넘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기독교인의 삶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왔고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지성주의는 평가절하 될 수 없고 반지성주의는 용납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호주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기독 학자들과 학생들이 모이는 모임에 가서 내가 들었던 말로,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게 있다.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해서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적 사고능력을 포기해야 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지적 능력을 하나님께서 취하시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말인데, 나 개인에게 시사하는 측면이 너무 많았음이 틀림 없다. 아마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 신앙인은 어떻게 사고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이해는 매우 미흡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연을 폐하지 않고, 계시가 이성을 폐할 수 없는 것처럼 (윤철호, 2005: 144),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찬의 이성이 “올바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지적 능력이 무엇이며, 그것의 한계점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적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지에 관한 질문은 기독학자의 삶을 끊임없이 맴도는 듯하다.

 

여경지근

 

우리가 잘 아는 잠언 1장 7절의 말씀이 흔히 ‘여경지근’으로 알려져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흔히 지식과 지혜가 어떻게 다른가를 구별하는데 있어서, 지식은 우리가 얻는 정보를 일컬어 말하는 것이고, 지혜는 그 지식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확장하는 것과 관계 있다는 말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지식과 지혜 모두가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더더욱 필요한 것은 지식과 지혜를 다루는 우리의 태도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

 

상아탑의 학위 수여식 광경

 

아마도 대학의 졸업식이야말로 대학생활의 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졸업생은 한 인간으로서 나름의 세계관과 철학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지탱할 직업의 전선으로 가기 위한 지식으로 무장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날이기도 하다.

 

부모와 사회의 그늘을 벗어나 비로소 경제적으로 독립된 개체로 출발하는 날이기도 하다. 학자들에겐 그들 나름의 자존심을 만 천하에 다시금 알리고 대중에게 확인시키는 날이기도 하다.

 

그들의 옷 색깔은 울그락불그락, 세상의 지식에 관련된 권위를 모두 담아낸 듯하다. 치렁치렁한 가운은 세상의 모든 무지를 감싸줄 듯 넉넉하다. 아니, 정말 그럴까?

 

천만의 말씀이다. 실상은 그렇다고 보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은 많다. 지성의 원천으로 간주되는 지적 능력을 상징하는 박사 모자는 또 어떤가? 앞뒤 좌우로 흔들리는 금방울은 보통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증하는 징표로 여겨진다.

 

졸업식장으로 향하는 교수들의 행렬의 선두에는 대학의 권위를 상징하는 철퇴방망이(University Mace)가 있고 이는 학자들의 학문활동과 업적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상징이다. 인간의 지식, 성취, 자랑, 그리고 교만이 극도에 이르는 것처럼 간주될 수 있는 한 장면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대학교가 사회와 문명의 발전에 대단한 순기능을 가지고 있음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발전적이고 진보적이어야 할 대학이 변화를 가장 두려워하는 보수적인 조직체 중의 하나로서 대학교가 가지는 역기능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을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여타의 조직체와 마찬가지로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속한 조직체가 사회에 공헌하는 것보다는 조직체 자체의 이해관계에 몰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학원생들이나 학자들은 생물학, 철학 등을 공부하며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생물학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를 연구하면서, 어떤 학자는 세포가 작동하는 것을 보면서 세포를 만드신 창조주를 기억하고 예배하며 연구하게 된다.

 

반면에 어떤 학자는 세포 그 자체에 몰입되면서 과학을 즐기면서 세포와 창조주와의 관계를 연결시키지 못하거나 그렇게 하기를 거부한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신의 짧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서둘러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착할 뿐더러, 하나님의 관점을 잃은 채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자신의 연구에 전념할뿐이다 .

 

성경적 지성이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리를 수호할 뿐더러, 학자 개인의 이론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염두에 두면서 철저하게 검증된 과학의 방법론을 기초로 하는 연구 활동을 하는 모습이라는 생각이다.

 

지성 : 양날의 칼

 

지성주의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잘 쓰면 하나님의 도구 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안 그러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최고의 지성으로서의 본보기는 인자 예수님으로 이해된다.

 

예수님은 자연의 섭리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으며, 죄악된 사람들을 창조주께로 인도하시고 사람들의 허물을 대신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당대의 그 어느 신학자보다 성경을 잘 아셨고, 성경말씀의 가치를 아셨고, 예수님 스스로가 시험당하실 때 가장 적절한 말씀으로 대항하셨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지성이신 예수님이었지만 엘리트 지향의 지성은 결코 아니었다. 그 어떤 이와도 소통하는 겸손의 지성이었다.

 

기독 지성인은 최고를 지향하되 겸손의 태도로 접근하는 사람이다. 식자·학자들에 대한 사회의 기대치는 매우 큰데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교만한 식자·학자도 될 수 있고 긍지를 가진 식자·학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단어 ‘프라이드’(pride)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겸손과 반대되는 교만이고, 다른 하나는 수치와 반대되는 긍지이다. 교만은 우리의 성공과 성취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위의 환경들을 배제시켜 버린다. 교만의 본질은 자기 중심적인 태도와 이기심이며 성경은 이것을 정죄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자아를 적대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아는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것이다. 교만은 항상 무대 중앙에 서고 싶어하며, 모든 공로를 혼자 차지하며, 하나님을 제외시킨다 (“교만과 긍지를 구별할 수 있는가?” 참조).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이 케슬러에 의하면 긍지는 일을 잘 처리하며 탁월하며 최고를 위해 노력하며 평범함을 초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긍지는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주인께 드리려 할 것이다.

 

교만과 긍지의 차이를 잘 이해한다면 기독 지성인으로서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기독교 교양』 제이 케슬러 (규장) & 디모데성경연구원, 사람을 세우는 사람 제 600호 “교만과 긍지”참조).

 

기독교는 탁월함을 적대시 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탁월하며, 성취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탁월할 수 있다는 생각과 탁월함이 자신만의 득을 위한 경우를 반대할 뿐이다.〠 <다음호 계속>

 

한길수|모나쉬대학교 교수, 커뮤니케이션·미디어 학과

 https://research.monash.edu/en/persons/gil-soo-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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