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 (하)

한길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11/28 [14:27]

 

 ©Cole Keister   

 

하나님이 제외된 그곳에는 이웃도 겸손도 없을 것이리라. 다른 어느 직업인과 마찬가지로 기독 지식인들도 매 순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우리가 하는 일과 사고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기독 지성인은 우리의 성취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쉽게 허물어질 수 있음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성당에서 걸어나오면서 자신이 정말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고 긍지를 느꼈다고 한다.

 

사람들은 성당의 천장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하나님께로 이끌리며, 사람들은 미켈란젤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고 한다 (제이 케슬러, 2007).

 

하나님은 우리가 훌륭한 일을 하게 하셨으나, 그 목적은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마태복음 5:16은 알려주고 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역사속의 반지성주의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서기관은 기득권과 결탁한 천박한 그룹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복장이 학자들과 성직자들의 복장을 연상시킨다. 나는 하나님 말씀을 편협하게 이해하면서 내 주위의 형제 자매들이 잘 되었는지 잘못되어 있는지 내 마음속으로 판단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것을 기억한다. 지극히 반지성주의적인 행태라고 하겠다 .

 

모든 학술 활동이 가능하고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함에는 나 개인적으로 전혀 이견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문이 가하나 모든 학문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는 서둘러서 말하기를 이 세상에 많은 학설이 있지만, 하나님 말씀 외에는 모두 무용지물이라는 반지성주의를 서둘러 들고 나올 것이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의 예로는 중국의 분서갱유, 문화혁명, 한국의 빨치산/남로당의 패악행위, 지금도 계속되는 빨갱이 논쟁 등은 많은 이들의 생명과 인격을 앗아갔다. 하나님의 질서와도 아주 먼 행위라고 간주된다.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진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의 제한적인 부분을, 유한한 우리에게 보여 주셨는데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영성뿐 아니라 사람에게 지성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대단한 은혜로 이해된다.

 

우리가 이 지성을 이용하여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더하여, 이웃을 이롭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책임을 특별히 기독 지성인들에게 주셨다.

 

책 쓰는 일을 멀리하라?

 

전도서 12장 12절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곡해되는 말씀 중의 하나이다. 11, 12, 13절 말씀이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이다. 전도서 12:12절은 젊은이들에게 책도 많이 쓰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책을 많이 쓰고, 공부를 많이 하기 전에 이미 한 목자 되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리라. 하나님의 귀한 말씀들을 무시하고, 공부만 많이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은 지혜로 책도 쓰고, 공부도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Walking with the Bible에서 인용).

 

기독교 역사를 보더라도 생각이 깊고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통찰력이 깊은 이들이 종교개혁이나 교회의 본래 역할의 수행 등에 공헌한 경우가 많다.

 

근래의 한국 기독교 역사만 보더라도 종말론에 깊이 빠져있던 몇몇 교단들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공부하고 적성을 키워나가는 것을 그리 권장하지 않던 무리들이 있었다.

 

“눈 뜨고 코를 베어가려는” 듯한 반지성주의의 단면이었다. 호주교회나 한국교회, 그리고 어디에서든 샤머니즘이나 배금주의로 나타나는 반지성주의를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듯 하다.

 

전도서 12장 11, 12, 13절 말씀은 먹든지 마시든지, 연구를 하든지 가르치든지, 그 어떤 직업이든지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시는 삶, 그 자체가 이웃을 이롭게하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가르쳐준다고 생각된다.

 

나가는 말

 

교수(Professor)의 어원은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 연구하고 발견한 것을 당당하게 나서서 발표하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 가지 더하자면, 자신의 연구와 교육철학을 널리 논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다. 사실은 이 부분이 어려운 부분이고, 이것을 잘 알았던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하시는 것 같다. 기독 지성인 또는 학자들로 하여금 한발 물러서서 성찰하게 하는 말씀이다 .

 

아마도 오늘 날 교회 안팎에서 반지성주의가 팽배한 것은 먼저 나를 포함한 지식인들이,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성경은 지성을 관찰하고 마음에 직접 와닿는 책이라고” 아놀드 토인비는 말하였다 한다. 우리가 하는 학문·지적 활동이 늘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성찰 되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

 

고린도후서 10장 5절 말씀을 보니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 10:5)라는 말씀이 있다.

 

마지막으로 대학 졸업식장을 마음에 떠올리며 깨닫는 것이 있다. 학자·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아니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무명인으로 살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지혜롭고 가장 의미있고 보람있는, 살아있는 예배인 것을 되새기며 마친다.〠

 

한길수|모나쉬대학교 교수, 커뮤니케이션·미디어 학과

https://research.monash.edu/en/persons/gil-soo-han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