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왕립군사대학에서 한국을 만난 사람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22/12/23 [14:25]

 

▲ 매튜와의 인터뷰는 그의 화실에서 진행됐다. 매튜 뒤에 보이는 그림은 후크 고지 전투가 끝난 후 정전 당일 촬영한 사진(오른쪽 작은 사진)을 매튜가 화폭에 담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시드니에서 전쟁과 관련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어디선가 등장하는 그를 보았다. 건장한 체구에 드문드문 한국말을 섞어서 인사하는 그를 볼 때마다 누구인지 궁금했다.

 

드디어 2022년 12월 17일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인으로 그의 집을 가본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그는 상점 뒤쪽에 있는 이층에 살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여니 정돈되지 않은 화실 가운데에 탁자가 있었고, 한쪽 벽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이 화가의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후크 고지 전투’가 끝나고 다음날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총성이 멈춘 직후에 찍은 사진이다.

 

전투에 참여했던 거스 브레이드(Gus Breed)는 그날을 회상하며 액자 속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이 희미하게 있는 사진을 다시 찍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매튜 존스(Matthew Jones)는 그 사진을 화폭에 담았다.

 

매튜 존스는 누구인가?

 

매튜는 1988년 1월에 던투른(Duntroon)에 있는 ‘왕립군사대학’(Royal Military College)에 입학하였다. 가평 부대에 소속되어 훈련을 받고, 1989년 6월 호주왕립연대 포병 중위로 임관했다. 매튜는 왕립호주연대(Royal Australian Regiment, RAR)의 1대대와 3대대에 배속되어 복무를 했다.

 

2002-2003년 동안 UNMISET(동티모르 지원 유엔 임무)의 평화유지군으로 파송되어 호주의 수석 운영 및 계획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보안, 훈련 및 참모 등 다양한 분야의 책임자로 있다가 2006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후크 고지 전투’가 끝나고 다음날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총성이 멈춘 직후에 찍은 사진. ©Matthew Jones   

 

매튜는 2009-2010년 동안 ‘Vincent Fairfax Fellowship’에 18개월 동안 참가하였다. VFF는 윤리적 심의를 위한 더 큰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선별된 호주 지도자를 위한 친교단체이다. 친교의 일환으로 매튜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윤리적 문제를 조사할 책임이 있었다. 그는 한국을 여행하기로 결정하고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은 던졌다.

 

‘기업이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 역할을 해야 할까?’ 육군 복무 중 한국 전쟁과 통 티모르에 한국군과 함께 일했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었다.

 

2010년 VFF의 도움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매튜는 호주와 한국과의 관계를 알면 알수록 한국을 더 알고 싶었다. 2013년 호한재단은 “우정나무 우호나무” 프로젝트의 일부 자금을 지원했다. 우정나무란 ‘증강현실’(AR)을 활용한 호주와 한국의 우정 이야기를 풀어가는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광범위하고 긴 연구 기간을 필요했다. 2023년 1월 서울에서 매튜에 의해 정식 출범할 예정이다.

 

2013년 호주-한국 재단(DFAT의 일부)은 “우정나무 우호 나무” 프로젝트에 일부 자금을 지원했다. ‘증강현실’(AR)을 활용한 호주와 한국의 우정 이야기를 다룬 이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광범위하고 긴 연구 기간을 통해 등장했다. 2023년 1월 서울에서 매튜에 의해 정식 출시될 예정이다.

 

▲ 서춘수 함양군수로부터 함양홍보대사로 위촉장을 받은 매튜 존스(2019. 1.31 함양군청 군수실) ©Matthew Jones  

 

매튜는 게임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설립된 소규모 컨설팅 회사인 Social Alchemy의 전무이사이다. 올해 그는 경제정책 전문인 ‘공공 정책 석사’(Public Policy)를 위한 추가 연구를 위해 풀타임으로 시드니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경상남도 관광진흥과 함양산삼축제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강릉 단오제와도 인연이 깊다.

 

2019년에 매튜는 북한에서 방문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선택된 180여 명의 북한 학자와 사업인들에게 혁신(innovation)과 생태관광(Eco-tourism)에 대하여 강의를 했다.

 

매튜는 다양한 매체, 특히 직물을 사용하여 예술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개념 예술가’(conceptional artist)로서, 2020년 호주전쟁기념관(AWM)에서 개최된 Napier Waller Art Prize의 수상자이다. 그의 초대형 ‘태입스트립’(tapestry), "Yarn"이란 작품으로 입상하였다. 매튜는 입상 전에도 여러 곳에서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 2020년 호주전쟁기념관에서 개최된 Napier Waller Art Prize에서 매튜의 초대형 태입스트립‘Yarn’이란 작품으로 입상했다.©Matthew Jones 

 

매튜는 신실한 기독교인이다. ‘왕립군사대학’에서 훈련을 받는 중에 ‘네비게이토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었다. 초기 한국 기독교 선교사들의 삶에 많은 감동을 받아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다니며 그들의 삶과 영향을 연구하였다.

 

매튜 존스와 인터뷰

 

-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갖게 되었나요?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몇 번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졸업한 왕립군사대학에는 5개 중대가 있습니다. 각 중대는 유명한 호주 전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어 있습니다. 1차대전의 갈리폴리(Gallipoli), 2차대전의 엘 알라메인(El Alamein), 2차대전의 코코다(Kokoda), 베트남 전쟁의 롱탄(Long Tan), 한국전쟁의 가평(Kapyong) 등입니다.

 

저는 가평대대에 속하여 훈련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중 호주인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두 개의 전투가 있습니다. ‘가평 전투’와 ‘마량산 전투’입니다. 가평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캐나다군과 호주군이 가평에서 보여준 전투는 중부 전선에 있던 유엔사령부가 뚫리는 것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가평대대 출신으로 남북한을 오가며 대한민국의 통일을 연구하고 있는 매튜 존스 예비역 소령.  © 크리스찬리뷰

 

이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 호주군과 캐나다군이 수행한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가평 대대에 속하여 훈련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동티모르에서 한국 군인들과 같이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 동티모르는 1975년에 포르투갈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동티모르는 독립을 준비했지만, 인도네시아의 침입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1999년 10월부터 유엔 감시 하에 동티모르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무정부 상황을 타파하고 헌법과 국가 건설의 기틀을 다진 후 2002년 완전 독립했고 해외 원조를 통한 국가 인프라 재건에 주력했습니다.

 

저는 2002년에 동티모르의 평화유지군의 호주 책임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한국도 상록수 부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했습니다. 다국적 평화유지군은 같은 일을 하지만, 문화적인 차이가 너무 커서 서로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매우 슬픈 일이 발생했습니다. 동티모르는 날씨나 지형이 한국과는 아주 다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억수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개울이 넘치면서 한국군이 탄 차량이 급류에 휩쓸려 다섯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국적 평화유지군은 같은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2002년 동티모르의 평화유지군 호주 책임자로 파병 당시 현지 어린이들과 함께 한 매튜 존스 소령.©Matthew Jones  

 

세 번째는 2009-2010년 동안 ‘Vincent Fairfax Fellowship’에 18개월 동안 참가하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2010년에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10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을 32번이나 방문하였습니다.

 

2023년에 1월에도 갈 예정입니다. 저는 경상남도 관광진흥과 함양산삼축제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강릉 단오제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단오제를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단오제는 옥포대첩 축제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단오제를 참석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2019년에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북한에도 다녀왔습니다.”

 

-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 주시죠?

 

“VFF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통일에 관한 컨퍼런스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북한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약 180명의 북한의 지식인과 사업가들이 앞에서 혁신(Innovation)과 생태관광(Ecotourism)에 대하여 강연하였습니다.

 

▲ : 6.25 전쟁 제72주년을 맞아 재향군인회 호주지회가 개최한 추모식에서 한인들과 헌화하는 매튜 존스 씨.(2022. 6.25 무어파크 한국전 참전기념비)   © 크리스찬리뷰

 

▲ 매튜 씨는 북한을 방문할 때 2백 개의 초콜릿 크래커를 갖고 가서 북한 주민들과 함께 나누었다.©Matthew Jones   

 

싱가폴에서 두 명, 스웨덴에서 두 명, 중국에서 1명 그리고 제가 강의를 했습니다. 첫날에는 긴장이 돼서 그런지 우리를 경계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마치 오랜 친구같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저는 2백 개의 초콜릿 크래커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내가 가지고 온 초콜릿 크래커보다, 혹시 USB에 성경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닌지 세밀하게 조사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초콜릿 크래커를 어떻게 먹을까’하는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10개 정도가 남았을 때 더 먹으라고 하니 여성 한 분이 의자 밑에서 상자를 열어 초콜릿 크래커 여섯 개를 가져 갔습니다. 동료에게 주겠다고 하더군요.

 

북한 기독교인들은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강력하게 네트워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증거는 중국과 국경 주변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 군행사를 비롯한 시드니 한인사회 각종행사에 참석해서 한인들과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매튜 존스 씨  © 크리스찬리뷰

 

또한 북한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를 5백 마리 가지고 판문점을 넘어가거나, 일방적인 도움을 주는 햇볕정책 등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통일을 원하는지에 대한 정의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사라지고 남한 중심의 통일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북한의 정권도 인정을 하면서 통일을 원하는 것이지 등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제 스스로의 질문은 비즈니스가 ‘통일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는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행함으로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이순신 장군에 대해 강의한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아 네, 맞습니다. 한국에 호주대사관은 광화문 교보빌딩에 있습니다. 교보빌딩 앞에는 이순신 동상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호주를 상징하는 것은 호주 대사관인 것 같고, 한국을 상징하는 것은 이순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젠가 한국의 지방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느 분이 한국을 알기 원한다면 이순신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관심을 갖고 이순신에 대하여 연구를 했습니다. 자국민 입장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했습니다.

 

시대적 상황은 토요도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중국을 침략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미치광이와 같았습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격동하는 상황 속에서 조선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순신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순신은 금수저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그 시대의 영웅만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고, 국경을 넘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인물입니다.

 

▲ 매튜 존스 씨는 남북한을 오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완전 친한파 인사가 되었다.©Matthew Jones  

 

저는 이순신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K-Pop이나 김치 등을 통해서 한국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깊고 다양한 한국을 알기 위해서는 이순신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언제 마지막 모임이 있었습니까?

 

“일 년에 한 번씩 지인들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코비드로 인하여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1월 21일에 한국에 갑니다. 이번에는 입은 닫고 귀를 열고, 눈은 크게 뜨고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까?

 

“저는 대학에서 미술사(art history)를 공부했습니다. 저는 ‘개념 예술가’(conceptional artist)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에 ‘Yarn’이란 작품으로 ‘Napier Waller Art Prize’ 상을 받았습니다. ‘Yarn’은 실, 재활용 폐 직물이 재료이며 183 x 183 x 18의 사이즈의 작품입니다.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용된 재료는 한국에서 돌아온 후 자가격리 기간과 국가봉쇄기간 사이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가서 수집한 조잡한 것들입니다. 상금으로 1만 달러를 받았고 작품은 호주 전쟁 기념관에 전시되었습니다. Yarn은 “나는 당신과 소통하고 싶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외는 이 작품의 핵심 아이디어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면 이야기가 어떻든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 사람은 될 수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를 공유하면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Yarn’이란 작품은 '너와 소통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 현재는 주로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시드니대학교에서 경제정책 중심의 공공정책(Public Policy)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가 한국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군사적인 입장과 외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지 경제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시드니 도심 윈야드 지역에 1976년 설치된 왕립 호주 연대 기념관 앞에서 매튜 존스 씨가 김기덕 중령에게 기념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 립 호주 연대 기념관 앞에서 가평의 날 행사를 마친 후 ©Matthew Jones  


경제를 이해하는 것이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북한의 통일 문제와 한국교민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경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매튜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거스 브레이드(Gus Breed)는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후크(Hook) 고지전에 참전한 용사이다.

 

그는 휴전이 협정되고 후크 고지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그 사진을 액자에 소장하고 있다가 10년 전에 액자 안에 반영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에는 희미했지만, 60년 전의 자신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매튜는 그에게 사진을 받아 그것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한국 전쟁과 호주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에는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국전쟁의 중요한 전투에는 언제나 호주군이 있었다. 호주는 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참전을 선언하였다.

 

육군 2개 대대 및 지원부대 10,657명, 해군 항공모함 1청 및 구축함 2척 등 4,597명, 공군 1개 전투기 대대 2,00명 등 총 17164명을 파병하였다.

 

1950년 9월 28일 호주 육군이 부산에 도착한 이래 UN 북진단계에서부터 작전에 참가하여 사리원 전투, 영유리 전투, 박천 전투, 가평 전투, 마량산 전투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크 고지전투를 끝으로 전쟁이 막을 내렸다.

 

호주인들은 한국전쟁 시 수행한 전투 중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기공세에 맞서 32명의 전사자를 내며 방어한 가평전투와 1951년 10월, 20명의 전사자를 내며 중공군을 격퇴한 마량산 전투를 가장 중요한 전투로 기념하고 있다.

 

가평전투는 유엔군이 전열을 재정비하여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고, 마량산 전투기점으로 한국전쟁은 전면전에서 고지전으로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다.

 

1차 대전은 참호전이고, 한국전쟁은 마량산 전투를 기점으로 고지전이 되었다. 현재 가평에는 호주, 뉴질랜드 참전비가 건립되어 있고 호주에서는 이 전투를 수행한 육군 3대대를 ‘가평대대’로 칭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후크 고지 전투’는 ‘사미천 전투’로도 알려졌으며, 1953년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치러졌다. 중공군의 마지막 공세이자 영연방군의 마지막으로 접전을 벌인 최후의 전투이다.

 

이곳에 호주군 2대대, 3대대 그리고 던햄 경보병 제 1대대가 주전선과 예비, 그리고 전초기지에 번갈아 방어하고 있었다. 이 무렵 휴전회담으로 인해 평화에 대한 기대가 만발하여 이전 중공군의 공세와 여름장마로 망가진 방어선을 수리하는 일을 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더욱더 게을리하였다.

 

7월 24일 밤, 중공군 137연대의 공격이 있었으나 호주군과 미 해병대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중공군이 돌파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25일 밤, 다시 중공군은 같은 전술로 공격해왔다. 이번에도 호주 2대대 3대대와 함께 미해병대의 집중 사격과 지원 포탄으로 중공군은 호주군의 참호에 침투하지 못했다.

 

7월 26일 아침, 중공군은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다. 7월 27일 오전 10시, 드디어 모든 교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 왕립 호주 연대 기념관 인근 조지 스트리트 트램 철길에서 포즈를 취한 매튜 존스 씨.  © 크리스찬리뷰

 

인터뷰를 마치고

 

인터뷰를 마친 후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는 손 칼국수를 먹자며 스트라스필드로 우리를 안내했다. 칼국수집은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돌려 다른 곳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한국 커피숍으로 우리를 인도하였다. 매튜는 스트라스필드에 있는 한국 식당과 커피숍을 기자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그는 노숙자 생활을 했다. 시드니 중앙역에서 뉴카슬 근처의 해밀턴이나 블루 마운틴으로 가는 저녁 기차에서 잠을 잤고, 아침에는 맨리에서 수영을 해서 씻었다.

 

그때의 경험이 그를 더 겸손하게 만든 것 같다. 대화할 때나 행할 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음 이순신 모임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

 

김환기|본지 영문편집위원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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