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복음 확장을 위하여!

조향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12/23 [15:42]

 

▲ 보스포루스 해협에 정박중인 유람선.(왼쪽) ©AC     

 

1부 이스탄불, 튀르키예

 

호주의 여름이 성큼 다가온 11월의 중순, ‘다시 복음 확장을 위하여’란 슬로건 아래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와 사도 바울의 2차 선교의 발자취를 따르는 알파크루시스대학교 학술 탐사팀 37명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복음 확장의 역사 현장과 사건들, 그 흔적의 유물과 유적이 남아 살아 숨 쉬는 성경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우리는 사도들과의 생생한 대화를 기대하듯 은혜가 충만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선교 특징 중 하나인 ‘동역자와 함께 하는 복음전도’라는 말처럼 두 주간의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 팀원들과 주님 안에서의 사귐과 사랑의 교제를 통해 아름다운 추억을 가질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학업과 사역에 좋은 동역자로 서로 세워지길 기도하며 비행기에 오른다.

 

14시간의 긴 비행 끝에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를 거쳐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사실, ‘터키’라는 국호는 지난 6월부터 그 영어식 표기를 ‘튀르키예(Türkiye)’로 공식 수정 변경되었다.

 

영어 단어로 터키(Turkey)가 ‘칠면조’와 동음이의어이기도 하지만 속어로는 ‘겁쟁이’라는 뜻이어서 터키인들은 이 영어식 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터키의 유래가 된 '튀르크'는 튀르키예어로 '용감한 민족'이라는 뜻이니, 그들이 사용하던 현지어식 국호를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민족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는 의도로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탄불의 도시 곳곳은 튀르키예의 국기 ‘아이일디즈’(Ay yıldız, 월성기)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나부끼고 있었다. 역사가 무려 2천 700년이나 되는 이스탄불의 처음 이름은 고대 그리스 메가라의 식민지로 그들의 왕의 이름을 딴 ‘비잔틴온’이었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라틴어 이름인 ‘비잔티움’으로 불렸고,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4세기부터 15세기까지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였으며, 그 다음 500년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서 그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탄불’의 지금의 모습은 오랜 세월 역사 속에 찬란했던 결과라기에는 공항부터 너무 초라하여 국제도시의 면모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향한 곳은 갈라타 다리 바로 앞 ‘에미뇌뉘 선착장’이다. 시드니항과 비교해 에미뇌뉘 부두는 무척 작지만, 이스탄불의 역사만큼이나 사연 많은 곳으로 사람들이 애정하는 곳이란다.

 

이스탄불 관광의 꽃이 바로 이곳 보스포루스해협의 유람선 승선이라는데, 돌마바흐체 궁전, 켐핀스키 호텔이 된 사라간 궁전, 부호들의 멋진 저택들과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오갈 수 있는 지리적 특징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해상투어는 긴 비행시간의 여독을 풀기에 충분했다.

 

멀리서 처음 출발지였던 갈라타 다리로 돌아오는 데 이 다리는 중간에 배가 지나가면 올리고 내릴 수 있는 부산의 영도대교와 같은 ‘도개교’라 한다. 총길이 490m 폭은 42m 양방향으로 3차선 차도와 보도가 있는데 중앙에 트램이 지나가고 있다.

 

한 다리가 도개교면서 트램이 다니고 차도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세상에 몇 개나 될까 생각해 본다. 1시간 정도의 선상 관광을 하며 튀르키예인 가이드는 전문가다운 지식과 유창한 한국말로 쉼 없이 설명을 이어가는데, 아쉽게도 배에서 나는 엔진 소음과 바다의 바람 소리로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디.

 

▲ 갈라타 다리 ©AC     

 

그러나 선상에서 느끼는 바닷바람과 초겨울의 냉기 속에서도 뉴욕, 베를린, 파리, 베이징보다 훨씬 깊은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스탄불임을 느끼며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선상관광을 끝내고 우리는 터키 전통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중동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며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튀르키예 공화국의 수도는 동쪽 내륙에 있는 ‘앙카라’이지만 경제, 문화, 역사, 관광의 중심은 이스탄불이다.

 

▲ 고등어 샌드위치 노점상 ©AC     

 

이스탄불의 상주인구가 전체 국민의 20%인 1천500만 명에 달하는데 3분의 2는 유럽쪽에서, 3분의 1은 아시아쪽에서 생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50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가 로마보다 많을 정도였다니, 그 많은 인구를 증명이나 하듯 재래시장은 숨막힐듯한 인파로 여행의 피곤을 더해 몽롱함까지 안겨 주었다.

 

재래시장은 한국의 전통시장과 흡사하여 터키에 있는 전통 제품과 먹거리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덕분에 터키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고등어 샌드위치를 발견하고, 누군가의 호기로 모두가 맛볼 수 있었다. 터키 음식하면 누구나 케밥을 떠올린다. 케밥 즉 ‘불에 구운 모든 것”이 케밥이다. 가는 곳마다 무엇인가 초벌구이하여 준비된 구운 생선, 야채, 치킨 등 그야말로 케밥 천국이었다. 우리가 먹은 고등어 샌드위치도 케밥의 일종으로 샌드위치 빵 안에 구운 고등어가 들어 있는 음식이다. 먹기 전부터 고등어의 비린내가 심하지 않을까 하는 기우와는 달리 담백한 맛 덕분에 새로운 음식을 경험하는 즐거움과 허기를 달래기에 충분했다.

 

종교 역사를 품은 ‘성 소피아 대성당’

 

▲ 관광객들로 붐비는 성 소피아 성당 내부.©AC     

 

해가 어스름해지는 시간, 튀르키예인의 99.8%가 무슬렘이라는 기록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례기도(하루 다섯 번) 시각 도시 곳곳에서 들려오는 ‘쌀라’(또는 ‘아잔’) 소리는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알라 외에는 숭배받을 존재가 없도다,” “예배하러 올지어다,” “성공으로 올지어다”를 연신 반복하고 있다.

 

이런 종교적 열심 때문일까? 세계문화 유산이자 박물관이며 이스탄불의 상징인 ‘성 소피아 대성당’(그리스어 ‘하기야 소피아,’ 튀르기예어 ‘아야 소피아’)이 2020년 튀르키예 최고행정법원의 결정에 따라 모스크로 전환되었다.

 

둘째 날 방문지인 이곳 ‘성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뒤 360년에 처음 이 자리에 성당을 지었지만 404년에 폭동으로 무너졌고, 415년에 두 번째 성당이 완공되었지만 역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오늘날의 성당 모습으로 건축된 것은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이다.

 

▲ 성 소피아 성당 앞에서 알파 크루시스대학교 학술 탐사팀.©AC     

 

금 90톤에 달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지름 32m의 거대한 돔이 기둥 하나 없이 56m 높이에 떠 있는 놀라운 건축술과 벽면 가득한 기독교 성화와 모자이크 장식들은 비잔티움 건축‧미술의 걸작임이 분명하다.

 

당시 황제는 이 웅장한 성당을 보며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노라!” 외쳤다고 전해진다. 11세기 교회사를 보면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정교회의 대립이 상당하여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면서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이후 60년간 동방정교회가 아닌 로마 가톨릭 성당이 되었다.

 

1453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이스탄불로 도시 이름을 바꾸었고, 성당 밖에 4개의 미너렛(minaret, 이슬람 사원의 외곽에 설치하는 첨탑)을 세우고 내부의 성화 모자이크를 회칠로 가려 모스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35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모스크로 쓰이던 성 소피아 대성당은 박물관으로 바뀌며 모든 종교 행위를 금지하게 되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동 문화유산이 공존하여 온 이곳은 복구 중인 성화 모자이크와 코란의 내용을 새긴 서예 원판들(알라, 예언자 무함마드,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이 함께 내걸리며 종교 간의 분쟁과 화합을 모두 품게 되었다.

 

2020년 7월, 현재의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The Hagia Sophia Grand Mosque)'로 걸정되기 전까지.

 

이곳의 유명세는 건축양식이나 역사가 아니라 늘어선 줄에서 느낄 수 있었다. 길게 늘어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줄이 단지 많은 사람이 관람을 원하는 이유도 있지만 모슬렘들의 기도 시간은 문을 닫고 입장을 중단하기 때문이란다.

 

세계 각처에서 온 그 누구라도 그들의 쌀라 시간 10-15분 동안을 기다려 주어야 한다. ‘빨리빨리 문화’인 우리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거기에 실내 입장을 위해서는 신발도 벗어야 하고 여자는 머리에 스카프를 둘러야만 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나도 누군가에게 ‘예수님과 기도하는 시간’이니 잠시 기다려 달라는 멋진 고백을 담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긴 항공 시간과 낯선 도시가 주는 환대와 묘한 긴장 속에 분주했던 첫 이틀간의 일정에 육체적인 피로를 느끼면서 역사에 찬란했었던 이스탄불의 지금 영적 어두움의 그림자와 반복되는 소음이 여행자를 더욱 피곤하게 한다. 이곳이, 이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일까?

 

다음 일정은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의 지역 방문이 예정되어 있다. 성경 안으로…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 삶의 흔적들에서 성령이 오늘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기를 기대하며 깊은 밤을 맞는다.〠 <사진= 알파크루시스대학교>

 

조향희 |크로스네스트 일본인 크리스찬교회 사모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