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전투 참전용사들의 생생한 육성 음성을 듣다

본지 최초 “찰스 그린 중령 전사 증언 발굴”

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3/01/23 [19:07]

▲ 아들레이드에 있는 가평 다리. 북부 고속도로(Northern Expressway)를 따라 있는 5개의 다리는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군사 전투 중 일부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지정됐다.  ©크리스찬리뷰     

 

작년 7월 아들레이드에 있는 가평 다리(Kapyong Bridge) 촬영과 아들레이드에 생존해 계신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터뷰를 위해 아들레이드를 방문했었다. 호주 전 지역에 걸쳐 10개의 가평길(Kapyong Steet)과 2개의 가평다리(Kapyong Bridge) 중 1개의 가평다리가 바로 아들레이드에 있기 때문이다.

 

작년 아들레이드를 방문하는 길은 어렵고 힘든 여정이었다. 가평 다큐팀이 예약했던 오전 10시 40분 발 콴타스 아들레이드 행 비행기가 탑승 2시간 전에 취소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무려 7시간을 공항에서 기다리며 멜번을 거쳐 밤 8시가 되어 겨우 아들레이드에 도착했다(크리스찬리뷰 2022년 8월호 참조).

 

예상보다 7시간이나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당일 낮부터 진행되어야 할 스케쥴에 차질이 생겨 제대로 된 취재와 촬영을 하기 어려웠다. 원래 계획으로는 도착당일 바로 가평다리로 향해 참전용사들과 함께 사진촬영을 할 예정이었으나, 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촬영을 다음 날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필 다음 날에는 일기가 좋지 않아 만족할 만한 촬영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1박 2일 일정으로 스케쥴을 잡은 바람에 더 머물 형편도 되지 못했다.

 

그 이후 매일 주간 일기예보를 점검하면서 봄철이나 여름철에 날씨 좋은 날을 기다려왔는데 계속되는 비와 먼저 취재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몇 달이 지체되었다.

 

▲ 가평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아들레이드 북부 고속도로 (Northern Expressway)  ©크리스찬리뷰     

 

▲ 가평 다리 밑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인터뷰를 진행 중인 문광식 목사와 제임스 에녹, 존 자렛트 옹(오른쪽부터, 2022.7.)  ©크리스찬리뷰     

 

작년 12월 7일과 8일 캔버라에 있는 가평 길(Kapyong Street)과 참전기념비, 전쟁 기념관 그리고 호주대사 초청 참전용사 오찬 모임을 취재하고 돌아온 후 아들레이드 일기를 계속 확인하며 아들레이드 날씨가 좋은 날을 기다렸다.

 

다행히 15일과 16일에 날씨가 쾌청하다고 표시되어 12월 10일 저녁 아들레이드 장로교회 문광식 목사에게 차량지원과 가평전투 참전 생존용사들과의 인터뷰 일정을 부탁했다.

 

작년 10월 타운스빌 가평대대와 가평대대 안에 있는 가평 길(Kapyong Line) 취재를 위해 제3대대를 방문했을 때, 가평대대 박물관 학예사인 봅 바커(Bab Bakkers) 씨에게 가평전투 참전용사 가운데 현재까지 생존해 계신 분들 명단을 입수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모두 15명(1명은 NZ에 거주)이 생존해 있는데 그중 4명이 남호주(아들레이드)에 거주하고 있다.

 

이번 아들레이드 취재 목적 중 하나는 가평전투 참전용사 생존자의 사진과 영상을 담아 이분들을 기록해놓고 싶었다. 다행히 문광식 목사는 아들레이드에 거주하고 있는 참전용사들과 친분이 두텁고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후원할 뿐만 아니라 여러 행사에 참석하다보니 한인사회에서 누구보다 참전용사들과 연결고리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2월 15일, 기자는 오전 11시 5분 아들레이드 도착 예정인 젯스타는 이륙이 지연되어 한 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지만 문광식 목사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 가평 다리와 도로 안내판(작은 사진)  ©크리스찬리뷰     

 

▲ 가평 다리와 도로 안내판(작은 사진)  ©크리스찬리뷰     

 

문 목사를 만나자마자 바로 가평다리(Kapyong Bridge)를 향해 출발했다. 다행히 날씨는 기상예보대로 화창하고 구름이 간간이 떠있어서 사진 촬영하기에 비교적 좋은 날씨였다. 가평다리에 도착하자마자 다양한 각도에서 가평 다리를 촬영하고 다리 위까지 올라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도 사진에 담았다.

 

아들레이드의 북부 고속도로(Northern Expressway)에는 5개의 큰 다리가 놓여 있다. 5개의 다리에는 고유의 이름들이 있는데 그 이름들은 호주군이 참전한 가장 유명한 전투들을 기리기 위해 다리 이름을 전투지역을 따라 명명했다. 그 다리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Penfield Rd 인터체인지, Hamel로 명명.

 

*Heaslip Rd 인터체인지, Tobruk로 명명.

 

*Curtis Rd 인터체인지, Kokoda로 명명.

 

*Angle Vale Rd 인터체인지, Kapyong으로 명명.

 

*Two Wells Rd 인터체인지, LLong Tan으로 명명.

 

가평 다리를 서둘러 촬영한 후 참전용사 알프레드(Alfred Thomas Keith) 씨를 만나기 위해 클레어(Clare)지역으로 출발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공항에서 오면서 문 목사를 통해 전해 들은 소식이었다. 가평전투 참전 남호주(아들레이드)거주 생존자 4명 중 한 명인 당시 군의관이었던 돈 비어드(Don Beard) 씨가 사흘 전(12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클레어 지역은 아들레이드 시내에서 자동차로 2시간 이상 걸리는 시골 마을이다. 끝없이 이어진 들판은 온통 밀밭인데 추수시기를 맞아 트랙터가 큰 먼지를 일으키며 분주하게 밭일을 하고 있었다.

 

▲ 알프레드 씨 부부가 거주하고 있는 양로원에 도착한 취재팀은 양로원 출입을 위해 발열 및 코비드 자가 검사를 마친 후 음성이 확인되어 알프레드 씨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크리스찬리뷰     

 

▲ 알프레드 씨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훈장들을 보여 주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보면서 호주가 크긴 큰 대륙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클레어를 향해 가는 도중 잠시 길가 카페에 잠시 들러 문 목사와 커피를 마시며 크리스마스 시즌의 남호주의 정취를 느껴 보았다.

 

시드니도 그렇지만 남호주 역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호주에 오래 살아도 여전히 피부로 와닿지 않는다.

 

클레어 지역에 도착한 후 알프레드 씨가 살고있는 양로원을 찾아갔다. 알프레드 씨는 양로원에 부부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기자와 문 목사는 리셉션에서 양로원 방문객들에게 의무사항인 코비드 자가검사를 했다. 20여분 후에 다행히 음성으로 확인되어 알프레드 씨가 거주하고 있는 방으로 안내되어 알프레드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알프레드 부부를 만나고 놀란 사실은 알프레드 씨가 폐섬유증으로 12개월밖에 생존하지 못한다는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 가평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왕립 호주연대 제3대대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으로 부터 부대훈장을 수여받고 이후 가평대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오른편 왼손에 잡고 있는 훈장이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훈장이다.  ©크리스찬리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프레드 씨는 밝고 명랑했다. 아직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린 중령이 자신의 상관이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기자가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문광식 목사가 간단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이름은 알프레드 토마스 키스 (Alfred Thomas Keith)입니다. 올해 92세이고요. 제 아내 이름은 이에코(Yieko)인데 저보다 4개월 빠른 동갑입니다.

 

제가 왕립호주연대 제3대대 군인으로 저희 부대가 1950년 히로시마 근처에 5개월 정도 주둔하고 있을 때 만나 결혼하고 현재까지 72년을 해로하며 살았습니다.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1950년 그해 9월에 바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 가평전투에 참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저는 D중대(Delta)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저희 중대 임무는 우측부대로서 504고지를 점령하고 사창리-가평 도로의 우측 능선을 따라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고 격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동하던 중 가평계곡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근처 사과 과수원에서 야영을 하던 중 중공군의 포격소리를 들렸습니다. 저희 중대는 곧바로 트럭을 타고 504고지의 가장 높은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 알프레드 씨와 일본인 부인 이에코(Yieko)씨. 이들은 92세 동갑으로 일본 히로시마에서 만나 결혼, 72년간 해로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4월 23일 저녁 10시경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은 다행히 B중대(Brovo)와 A(Alpha)중대쪽으로 많은 공격을 먼저 해오는 바람에 저희 중대는 오전 6시경에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른 중대에 비해 비교적 희생이 적었습니다.

 

저희가 방어를 잘하니까 퇴각했다가 24일 오전 6시경부터 낮까지 몇 차례에 걸쳐 다시 공격을 해왔습니다. 숫자적으로는 저희가 10배 이상으로 열세였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미군에게 공군지원을 요청했는데 그만 미군 전투기가 와서 중공군을 공격해야 하는데 오인하여 우리 중대에도 사격을 하는 바람에 저의 가장 친한 전우였던 잭 브라이드가 사망했습니다.

 

저희는 사상자를 메고 후퇴하여 소나무가 많은 곳으로 옮겼습니다. 504고지에서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저희 호주군은 첫날 25명이 사망했고 이어서 7명이 사망하는 바람에 32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은 6백 명 이상 사망했습니다. 제가 직접 6백여 명의 중공군의 죽은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때 군목이 다니면서 사탕과 커피를 나누어주며 용기를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한국전쟁에 참전할 당시부터 신약성경을 제 군복 상단 왼쪽에 넣고 다녔습니다.

 

저희 부대 유일한 군의관이었던 돈 비어드가 지난 주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저도 전해들었습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 찰스 그린 중령을 기억하고 있고 그의 죽음도 가까이서 지켜 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해군 군악대가 부산항에 도착한 호주군을 환영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네. 저희 왕립호주연대 제3대대 대대장은 원래 월시 대령이 부대를 지휘했었는데 나이가 좀 있는 편이었습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젊은 지휘관인 찰스 그린 중령이 호주에서 갓 도착해 저희 대대를 지휘했습니다.

 

그때 찰스 그린 중령 나이가 아마도 31세였을 겁니다. 저도 어렸지만 그린 중령도 참 어려 보였습니다.

 

그와 함께 저희 제3대대(960명)가 1950년 9월 27일 미 해군 빅토리(Aiken Victory)편으로 부산에 상륙한 후 곧바로 대구로 이동하여 영국군 제27여단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 성공한 후 저희 부대는 북진작전에 참전하여 10월 1일 경북 성주 주변의 북한군 소탕작전을 시작으로 10월 10일에는 개성 북동쪽 화장산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고, 17일에는 사리원에서 퇴각하는 북한군 약 2천 명을 생포하는 전과도 올렸습니다.

 

그리고 용유리전투, 박천-정주 전투들을 찰스 그린 중령과 같이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달천강’ 근처에 진지를 구축하던 중 북한군이 쏜 박격포탄이 그린 중령의 텐트 옆에 터지며 파편에 맞아 숨졌습니다.

 

▲ 타운스빌 가평대대 박물관에 보관 중인 찰스 그린 중령이 사용했던 텐트. 북한군의 포탄이 떨어져 그린 중령이 사망했다. 70년이 지났지만 찢어진 텐트에는 핏자국이 선명하다.  ©크리스찬리뷰     

 

그가 사망했을 때 저희 3대대원 모두 슬퍼했습니다. 그린 중령은 젊었지만 훌륭한 인격자로 좋은 리더십을 가진 지휘관으로 기억됩니다. 그린 중령이 죽은 후 다시 월시 대령이 잠시 지휘를 맡았다가 이안 퍼거슨 대령이 저희 제3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와서 가평전투에서는 퍼거슨 대령의 지휘로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린 중령이 사용했던 텐트가 지금 타운스빌에 있는 가평대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알프레드 옹은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 텐트를 가지고 왔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가평전투 생존 참전용사 제임스 에녹 옹(96). ©크리스찬리뷰     

 

▲ 제임스 에녹 옹의 현역 시절.  ©크리스찬리뷰     

 

한국전쟁하면 많은 호주군 참전용사들이 그러하듯 알프레드 옹 역시 한국의 추운 겨울, 너무 추위에 떨며 고생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고백을 했다. 호주는 그렇게 추운 겨울이 없어 군복도 모두 얇은 여름 군복 밖에 없었는데 그걸 입고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보급품이 없어서 심지어 북한군이 입고 있었던 소련 군복들을 북한군 시체에서 벗겨 입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마음이 짠하게 느껴졌다.

 

알프레드(Alfred )옹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아들레이드 시내에 있는 숙소로 늦은 밤에 돌아와 겨우 체크인을 마치고 하루 일정을 마감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제임스 에녹(James Anock) 씨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에녹 씨 댁으로 출발했다.

 

▲ 아들레이드 힌드마쉬 지역에 북한에서 실종된 호주 참전용사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실종자 43명의 이름이 새겨진 이 추모비 앞에서 매년 10월 한국전 참전 실종자 추모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제임스 에녹 씨는 작년 7월 가평 다리 취재차 왔을 때 현장에서 만나 사진촬영하고 인터뷰를 했던 분이다. 에녹 옹은 9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난해에는 직접 운전해서 가평 다리까지 왔는데, 이번에는 기자가 자택을 방문하여 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다.

 

그와는 작년의 만남도 있고 이미 찍은 사진들도 있어서 간단히 촬영을 마친 후 레이몬드 오버트(Raymond Douglas Aubert) 옹 댁으로 출발했다.

 

오버트 옹을 만나 놀라웠던 사실은 그린 중령이 북한군의 포격으로 사망할 때에 6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 자신이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는 아마도 본지가 최초로 그린 중령의 전사 증언을 발굴해 낸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저는 당시 C 중대(Charlie) 소속이었습니다. 그린 중령이 저를 찾는다고 해서 오후 5시경 그린 중령을 만나기 위해 그의 텐트로 가던 중 그린 중령 텐트 근처에 박격포탄이 떨어졌습니다.

 

▲ 찰스 그린 중령의 전사를 목격한 오버트 옹. 이 사실은 본지가 최초로 그린 중령의 전사 증언을 발굴해 낸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크리스찬리뷰     

 

저는 불과 5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다치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린 중령은 포탄의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고 응급으로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곧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가까이서 그린 중령의 전사를 목도했습니다. 그린 중령의 전사 후 월시 대령이 잠시 제3대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했지만 얼마 후 퍼거슨 대령으로 지휘관이 바뀌었습니다.”

 

오버트 옹은 알프레드옹과 나이가 같았지만 그의 발음이 분명하지 않고 더구나 공항으로 갈 시간도 넉넉치 않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길게 인터뷰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본지 최초로 찰스 그린 중령의 전사할 당시 그의 죽음을 목도한 생생한 증언을 발굴해 낸 것으로 의의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짧은 일정에 가평다리 사진촬영과 가평전투 참전용사 생존자 3명의 사진촬영과 인터뷰를 마치고 급히 공항으로 출발했다.

 

아들레이드 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 수속을 하려고 하는데 젯스타 비행기가 캔슬되었다는 방송이 나왔다. 급히 데스크로 가서 확인해 보니 다음날 같은 시간에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숙소($150)와 식대($30) 바우처를 제공해 주겠다고 한다.

 

▲ : 가평 프로젝트 모자를 선물로 건네자 레이몬드 오버트 옹은 사진을 다시 찍자며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크리스찬리뷰     

 

하지만 다음날인 17일 오전에 인터뷰 약속들이 잡혀져 있는 상태여서 오늘 시드니로 돌아가지 못하면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동안은 국내(Domestic) 여행시에는 보험을 들지 않았는데 이번 가평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여러 차례 항공기 지연과 취소를 경험하면서 이번에는 보험을 들어 두었다. 그래서 콴타스 항공편을 확인해보니 다행히 한 자리가 비어 있는데 무려 $723이나 되었다. 그래도 다음날 약속도 있고 보험도 들어 놓은 게 있어 콴타스 티켓을 구입했다.

 

그날 저녁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시드니로 돌아와 다음날 일정들을 무사히 마치고 보험사에 청구했지만 4주가 지난 후 보험회사로부터 보충서류를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보험금 받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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