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업가, 로이스톤 시돈스 (Royston Siddons)

정지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3/01/23 [19:24]

▲ 시드크롬 브랜드는 로이스톤 시돈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물자 부족을 채우기 위해 도구 제작으로 전환했을 때 등장했다. 시드크롬은 호주의 기계공 도구 유명 브랜드이다.     

 

▲ 162피스 공구 키트 탑 체스트.     

 

이번 호에서는 호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작업 도구와 연장을 생산해 판매한 R. 시돈스(R. Siddons Pty. Ltd.)라는 회사를 설립한 사업가 로이스톤 시돈스(Royston Siddons)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로이스톤의 아버지인 조셉 시돈스(Joseph Siddons)는 영국에서 호주로 이주해 와 빅토리아 주 출신의 플로렌스 깁스(Gibbs)와 결혼해 로이스톤을 1899년 12월 15일에 멜번(Melbourne) 윌리엄스타운(Williams Town)에서 낳았다.

 

로이스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가족은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Western Australia) 주와 빅토리아(Victoria) 주에서 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 사업을 돕기 위해 산업현장에 뛰어 들었다.

 

▲ 시돈스의 각종 공구들     

 

그때 로이스톤의 나이가 14세였다. 그는 아버지가 멜번에서 운영하던 물류 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물류 사업은 실패했고 결국 2년 후에 그의 가족은 원타기(Wonthaggi)로 이주했다. 그곳에 있는 탄광에서 로이스톤은 광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탄광에서 일을 했고 퇴근한 후에는 기술 전문대에서 전기 공학을 공부했다. 로이스톤은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탄광에서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병행했다.

 

▲ 시드크롬의 스패너를 비롯한 각종 공구들의 변천사 (1968-1975)     

 

1923년에 그는 당시 교사였던 아그네스 에밀리 스미스(Agnes Emily Smith)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원타기(Wonthaggi) 장로교회에서 치러졌다. 결혼을 한 로이스톤은 탄광 일을 그만두고 상점을 열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상점 운영에 실패한 로이스톤은 1927년에 상점을 팔아버리고 멜번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전기 공학을 공부한 것 때문에 그는 멜번에 있는 라디오 공장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할 수 있었다.

 

라디오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로이스톤은 계속해서 사업에 대한 꿈을 꾸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자기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모은 자금과 지인들로부터 빌린 돈으로 1931년에 콜링우드(Collingwood)에 있는 금속 주조 공장을 임대했다.

 

그리고 캐비닛 제작자들이 사용하는 도구와 연장을 4명의 공장 직원들과 함께 생산하기 시작했다. 감리교 신자였던 그는 직원들을 가족처럼 사랑으로 대했다. 그래서 직원들은 그를 잘 따랐다.

 

또한 그는 생산 단가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 때문에 그의 공장은 날로 번성했고 경제 대공황 시기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로이스톤은 1934년에는 클리프톤 힐(Clifton Hill)에 위치한 좀 더 큰 건물로 공장을 이전했다. 새로 이전한 공장에서는 자물쇠를 생산해냈다. 그가 생산한 자물쇠는 시드코(Sidco)라는 브랜드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이 자물쇠는 호주 전역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시드코 자물쇠가 큰 인기를 얻어 많은 수익금을 내자, 로이스톤은 1939년에 R. 시돈스(R. Siddons Pty Ltd.)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새로 설립된 회사는 날로 성장했지만, 곧 어려움에 직면했다. 1941년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 이베이(ebay)경매 사이트에 올려진 빈티지 시드코 자물쇠. $50부터 시작하고 있다.     

 

 

▲ 이베이 사이트에 열쇠는 $10, 자물쇠는 $45에 구매할 수 있다.     

 

로이스톤은 또 다시 사업에 실패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외의 방법으로 로이스톤을 도우셨다.

 

로이스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은 바로 호주정부였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는데 호주 정부는 시돈스 회사의 재건을 돕기로 결정했고 대신 군대에서 필요한 공구들과 물품들을 생산할 것과 용광로를 건설할 것을 시돈스 회사에게 요구했다.

 

▲ 시드크롬에서생산한 각종 공구들.     

 

▲ 로이스톤의 외아들 존은 1945년부터 아버지 회사에서 회사 경영을 배웠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시돈스 인더스트리스의 회장이었으며, 1980년에 빅토리아 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로이스톤은 친구들에게 빌린 자금으로 1942년에 시돈스 드롭 포깅스(Siddons Drop Forgings Pty Ltd)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에서는 가정용 공구들뿐만 아니라 군대에서 사용하는 각종 공구들과 군인들이 사용하는 총의 부품과 폭탄 용기 등을 생산했다.

 

전쟁으로 인해 해외에서 공구들을 수입하기 어려운 상황은 로이스톤의 회사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그의 회사에서 생산된 스패너, 필러, 해머, 드라이버와 같은 각종 공구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로 인해 회사는 큰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1948년 로이스톤은 웨스트 하이델버그(West Heidelberg)에 공장 부지를 구매하고 새로운 공장을 건설했다. 1949년에 그의 회사는 공식 법인 회사가 되었다.

 

당시 회사는 직원이 14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는 회사의 주식을 회사 간부들과 그의 아들 존(John)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회사의 직원들에게도 성과급을 지급하며 서로 협력하며 돌보는 노사 관계를 유지했다.

 

로이스톤의 외아들인 존(John)은 1945년부터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며 회사 경영을 배워나갔다. 그가 아버지인 로이스톤으로부터 배운 가장 큰 경영 비법은 직원들을 잘 돌보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회사가 직원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돌보자 직원들도 회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시돈스 회사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기술들을 개발했는데, 대부분의 기술들은 기술개발 연구소 소장인 한나(Hanna)를 비롯한 회사 직원들이 개발한 것이었다.

 

한편, 1949년 존은 미국을 방문해 공장을 둘러보다가 못총(네일건, Nail gun)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곧장 못총을 만들 수 있는 기계를 구입했고, 호주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미국회사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었다.

 

호주로 돌아온 그는 못총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설립했고, 1952년에 호주 라메셋 패스테너스 (Ramset Fasteners Pty. Ltd.)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시돈스 드롭 포깅스(Siddons Drop Forgings Pty Ltd)의 자회사였다. 새로 설립된 호주 라메셋 패스테너스의 대표는 존이었고, 시돈스 드롭 포깅스의 대표는 로이스톤이었다.

 

두 회사에서 생산되는 공구들과 못총은 호주뿐만 아니라 태평양 섬나라들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동으로 수출되어 회사에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뉴질랜드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라메셋 패스테너스 지사가 설립되기도 했다.

 

로이스톤의 회사인 시돈스보다 그의 아들인 존의 회사인 라메셋이 더 큰 수익을 올리며 성장하자 로이스톤은 경영권 확보하기 위해 그의 아들 존(John)을 일반 관리자로 강등시키고 자신은 시돈스와 라메셋 두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존은 아버지의 이러한 결정에 크게 놀랐고 당황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시기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말했다.

 

로이스톤은 강한 도전 정신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뛰어난 경영법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두 회사를 모두 자신의 권한 아래 두려고 아들을 경영에서 몰아낸 것은 큰 과오라고 볼 수 있다.

 

존 시든스(John Royston Siddons AO, 1927년 10월 5일~2016년 9월 22일)는 호주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사업가이자 시돈스 인더스트리스(Siddons Industries Ltd)의 회장이었다.

 

그는 1980년에 빅토리아 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1984년 선거에서 의회의 확장으로 인해 7개의 장소가 선출되었을 때 재선되었다. 1986년에 그는 민주당이 너무 좌파적이라고 주장하며 민주당을 떠났다. 1987년에 그는 통합 호주당(Unite Australia Party)에 등록하여 호주 전진당(Advance Australia Party)과 나머지 호주당 잔당을 통합했다.

 

그는 남호주 민주당원 데이비드 비거(David Vigor)가 상원의원와 합류했으며, 새 정당은 1987년 선거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모든 경쟁 주에서 1% 미만의 지지를 받았고, 시든스와 비거는 둘 다 패배했다. 그는 2016년에 사망했다.

 

한편, 로이스톤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1957년에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윌리엄 버크랜드(William Buckland) 기업의 계열사들을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로이스톤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회사 지분의 상당 부분을 팔아야만 했고, 회사도 재정악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사업 확장을 위해 회사 자본을 너무 많이 투자한 후유증으로 회사가 어려워졌고, 결국 이사회는 1963년 1월 10일에 로이스톤을 해임시켰다.

 

▲ 시드크롬에서 생산하는 각종작업 공구들은 호주의 대표 브랜드로써 자리를 잡고 있다.     

 

결국 로이스톤은 모든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하고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이후 로이스톤은 금광, 오팔 광산, 오렌지와 올리브 농장 사업 등에도 과감하게 투자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로이스톤은 웨슬리 컬리지(Wesley College)의 이사로 섬기면서 많은 재정을 투자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한, 그의 유산 중 일부는 호주 연합교단의 목회자들을 양성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1976년 11월 24일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아이반호 감리교회 (Ivanhoe Methodist Church)에서 열렸다. 장례식 참석한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스패너를 비롯한 여러 공구들을 우리 손에 쥐어주었다.”

 

사업에서 여러 번 실패했지만, 다시 일어나 도전해 끝내 사업에서 성공한 로이스톤의 이야기는 그가 만들어 준 여러 가지 공구들과 함께 오랫 동안 기억될 것이다.〠

 

정지수|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