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렌즈로 찍는 아름다운 세상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3/02/27 [11:54]

  3월호/2023  © 크리스찬리뷰



▲ 신앙의 렌즈로 아름다운 세상을 촬영하는 사진작가 김조민 목사.     ©크리스찬리뷰

 

2023년 1월의 마지막 날, 한국에서 조기은퇴를 하고 뉴카슬에 와서 살고 있는 김조민 목사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카슬로 향했다. 뉴카슬로 가는 길은 한산하고 날씨도 좋았다. 김조민 목사는 다방면에 걸쳐 조예가 깊은 예술가이자 목회자이다.

 

조기 은퇴

 

전주에서 ‘샘솟는교회’를 1998년 개척하여 800명(교회학교 포함)이 출석하는 교회로 부흥시키고 61세에 조기 은퇴한 목사가 있다. 현재 뉴카슬에 살고 있는 김조민 목사이다. 그는 아직도 10년은 더 목회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은퇴를 했다.

 

교회에서는 원로목사로 세우기를 원했지만 김 목사는 거절했다. 그는 교회를 개척할 때 전통적 교회의 목회 프레임과는 다른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가 목회할 때 한동안은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을 받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목회가 그렇듯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교회 중직자들은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했고 이런 괴리는 그가 목회하는 가운데 언제나 그의 딜레마였다.

 

“저는 목회자의 개인적 소신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 지시하는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마태복음 28:18-20)이 명백하게 가리키는 목적에 입각하여, 사람들이 주님께 인도되어, 그들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변화됨으로써, 세상에 나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회의 근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 사상이나 인간 욕구가 교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지배하도록 하고, 관습과 제도와 조직이 이끌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께서 이끌어 가는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세상을 따르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근본 목적은 영혼 구원이요, 그 열매는 세계의 변화입니다. 이를 이룩하기 위한 목회 사역의 두 개의 축은 전도와 양육(제자화)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척초기부터 이렇게 방향을 잡고 실천하려고 애를 썼었습니다. 한국 지방도시에서 21여 년 전에 개척을 했을 때 벌써 저희 교회는 오후예배가 없었습니다. 주일 예배만 있었고 오후에는 가족중심으로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라고 생각해서 주일 오후 예배를 과감히 없앴습니다.

 

▲ 노라 헤드 등대 앞 바닷가에서 등대 촬영 삼매경에 빠져있는 김조민 목사. (Norah Head)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저희 주보를 보더라도(그는 개척초기부터 직접 만들어온 21년치 주보를 제본을 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기존 교회의 주보와 다르게 차별을 주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 김조민 목사는 21년 동안 목회하면서 직접 만들어 온 주보를 제본하여 서재에 비치하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일반인들이 보더라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특색있게 디자인을 했고 무엇보다도 가정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일찍 여윈 까닭에 저는 누구보다도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첫째 중요 덕목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신앙인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평신도 중심, 가정중심의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가지고 목회를 해왔다. 당시 전통적인 교회가 주축이었던 지방도시에서는 그의 이러한 목회철학이 신선하고 새로웠다.

 

단기간에 빠른 성장을 했고, 그가 개척한 샘솟는 교회로 수평이동한 성도들도 많았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성장한 수평이동한 교인들은 그가 꿈꾸는 건강한 교회의 체질과도 맞지 않고 그의 목회적 양심에도 편하지 않아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은 교회에서 받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목회가 언제나 자기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법, 이것이 그가 21여 년 목회하는 동안 그를 갈등하게 한 딜레마였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또 다른 사역을 하고 싶어 일찍 목회를 은퇴한 것이다.

 

“제가 추구한 것은 숫자보다는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계속 목회를 하면 타성에 젖어 경제적인 것은 걱정이 없고 가족도 잘 건사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경적인 교회 모습을 세워가는데 나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 상태로 가다 보면 70세가 되어 은퇴하게 되면 이건 제 자신에게 용납하기 어렵고 제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 같았습니다.”

 

23세 늦깎이 고등학생

 

사실 그는 목회자보다 예술가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만약 그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예술가의 길을 걸어갔을 지도 모른다.

 

▲ 본지와 인터뷰중인 김조민 목사. 그는 23살에 고등학교를 들어가 주경야독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크리스찬리뷰     

 

그가 9살 때 경찰 공무원이었던 그의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집안은 생활고로 인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간신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점심 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못되었다.

 

그가 영양실조로 쓰러지자 마음 착한 친구가 3년간 그의 점심 도시락을 싸오는 바람에 그는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고 철공소에 들어갔다.

 

“그렇게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아 철공소에 용접하는 데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용접하는 일을 배우고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마침 제가 일하는 철공소가 삼성코닝의 하청 용역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을 잘하니까 삼성코닝에서 직원들을 스카웃을 했는데 제가 다른 직원들보다 일을 잘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스카우트되지 못했습니다. 스카우트되지 못한 이유가 제가 중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열심히만 살면 되는 줄 알았는 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래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 슬펐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 말씀 앞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 가치에 대해 묵상과 기도하던 중 평소에 존경하던 멘토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오래 지켜본 그분께서 목회자의 소명을 이야기하며 권면하셨다. 그리고 진정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말씀의 깊이와 인격’이 잘 다듬어져야 한다. 늦은 나이에 쉽게 검정고시를 보지 말고 정식코스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23살에 고등학교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학교 가고, 저녁에는 중국집에서 일하면서 늦깎이 고등학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실제는 ‘주독야경-晝讀夜耕’ 생활을 했다). 낮에는 늦깎이 고등학생으로 한참이나 어린 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돈을 벌기 위해 중국집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의 멘토 목사가 네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일반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그리고 신학대학원을 가라는 권면을 듣고 그는 K대학 작곡과에 입학한다. 그가 작곡과를 선택한 이유는 교회음악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고, 교회에서 불려지는 찬양과 복음성가들을 업그레이드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고백했다.

 

K 대학 작곡과를 졸업한 후 그는 장신대학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래서 졸업 후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몇 군데의 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한 후 1998년 전주로 내려가 나름 목회의 비전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했다.

 

사실 지방 도시에서 장년 성도 3백 명 주일학교까지 합쳐 8백 명 성도의 교회라면 부러울 것이 없는 목회생활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본인이 꿈꾸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과 현실이 맞지 않아 과감히 조기 은퇴를 했다. 이 부분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평화로움이 가득한 충주호 정경 <평안과 쉼, 김조민 작> ©김조민     

 

▲ 진안 금당사 담에서 촬영한 설경. <백구의 미소, 김조민 작> ©김조민     

 

신앙의 렌즈로 찍는 세상

 

기자는 그에게 맞지 않는 모자를 21여 년 쓰고 있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격려했다. 오히려 그는 목회보다 예술가로서의 삶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는 목회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의 삶의 모든 목표가 그의 목회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뛰다 보니 자신의 건강을 돌볼 시간도 부족했다. 그러던 차 제자훈련 목회자 모임에 오신 옥한흠 목사를 만나 교회와 자신의 건강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중 옥 목사가 사진에 취미를 가져보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옥 목사 자신도 건강이 안 좋았을 때 사진을 취미로 가지게 되어 건강도 회복되고 유익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김조민 목사는 즉시 카메라를 구입하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유튜브와 책을 보며 독학으로 배운 그의 사진 기술은 10년 만에 어느 전문가 못지 않은 수준에 올랐다. 그의 집에는 그가 찍은 풍경사진과 꽃 사진들이 액자에 걸려 있다. 전문 사진작가인 본지 권 발행인도 그의 작품들을 보고 전문가 수준이라고 칭찬을 한다. 이렇게 그는 10년 동안 쉬는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산으로 들로 사진을 찍으로 다녔다.

 

그가 촬영한 사진들은 주로 풍경 사진과 꽃 사진들이 많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을 인쇄하여 액자로 만든 다음 여기에 그가 직접 쓴 글씨로 신앙 성구를 적어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 액자들을 받은 성도들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받고 행복해 했을 것이다.

 

▲ 캘리 그라피 작가인 김조민 목사의 작품들.©김조민     

 

“옥한흠 목사님이 제자훈련 세미나로 제가 있는 지방에 몇 번 내려 오셨을 때 제가 교회에 대한 고민도 말씀드리고 제 개인적인 고뇌도 나누고 했었습니다. 그때 옥 목사님이 사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본인도 사진을 배우고 나서 건강도 좋아지고 좋은 취미활동을 하면서 교회에도 유익이 되었다고 하면서 사진을 배워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저희 전주 지역에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마침 그분이 사진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었습니다. 쉬는 날이면 그분과 함께 산에도 다니고 자연스럽게 많이 걷고 좋은 공기도 마시고 하니까 체력적으로도 많이 좋아지고 좋은 취미를 통해서 정신도 건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에게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잡은 순간의 찰나와 구도 등은 전문 사진작가 수준이다. 많은 사진을 보아 왔지만 그가 찍은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며 기자도 그런 사진들을 찍고 싶은 열망이 일어났다.

 

“저는 풍경사진과 꽃 사진도 좋지만 이제부터는 가치있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려운 삶을 살아서 인지 삶의 고통, 인생의 고뇌 등이 녹아 있지만 한편으론 그것들을 통해 진정한 인생의 의미들을 발견하게 하는 그런 사진들을 찍고 싶습니다. 그런 사진들을 통해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인생에 대한 인사이트들을 얻게 하고 싶습니다.”

 

캘리 그라피 작가

 

그는 사진만 잘 찍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직접 쓴 캘리 그라피를 보면 예술가의 경지이다. 그가 직접 쓴 캘리 그라피 또한 그의 집에 여러 개 걸려 있다. 그의 캘리 그라피를 보면 그가 얼마나 섬세한 사람인가를 느낄 수 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써 내려간 아름다운 성경구절들과 마음의 위안을 주는 신앙의 글들을 보면서 김조민 목사는 목회도 섬세하게 잘하신 분이지만 예술가적 기질이 풍성한 분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 김조민 목사가 뉴카슬한인장로교회 교인들에게 증정한 캘리 그라피 작품이 동교회 정덕수 안수집사 가정 거실에 진열되어 있다. ©크리스찬리뷰     

 

▲ 펠리칸을 촬영 중인 김조민 목사(The Entrance)  ©크리스찬리뷰     

 

▲ 사진 작품과 캘리 그라피 작품 제작을 위해 컴퓨터 작업 중인 김조민 목사. ©크리스찬리뷰     

 

“해마다 연말이면 제가 직접 쓴 캘리 그라피 성경구절을 액자로 만들어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면 모두들 좋아했습니다. 모두들 그것을 다음 해에 저희가 붙잡고 살아야 할 말씀으로 받은 거죠. 또 제가 알고 지내는 몇 교회의 간판 글씨를 붓글씨로 직접 써 주기도 했습니다.

 

혹시 호주에서도 교회 간판 글씨가 필요한 교회가 있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시드니의 몇 교회는 그가 직접 쓴 캘리 그라피로 디자인을 해주어 주보로 사용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가 보여주는 캘리 그라피가 들어가 있는 교회 주보를 보니 신선하고 세련되게 보인다. 심지어 그는 그의 전공을 살려 여러 교회의 ‘교회가’를 작곡해 주기도 했다. ‘교가’는 들어 봤어도 ‘교회가’는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기자도 ‘교회가’를 그에게서 처음 들어 보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역할 때 김 목사는 잘 알고 지내는 목사들의 부탁을 받고 ‘교회가’를 작곡해 주기도 했다. 교회 성도들이 함께 ‘교회가’를 부른다면 교회를 위하는 마음도 높아지고 성도들에게 자기 교회에 대한 자부심도 생겨나게 할 것 같이 보인다.

 

그는 이렇게 다방면으로 예술가적 끼가 풍성한 예술가이다. 지금은 뉴카슬에 조용히 살고 있지만 이제 그는 이전과는 다른 사역을 위해 조금씩 워밍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김 목사가 가지고 있는 많은 달란트들을 통하여 호주에서 그리고 캄보디아와 제3세계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의 재능들을 아낌없이 나눌 것으로 기대해 본다.〠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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