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많은 사건 사고들이 있지만, 요새 들어서 한 순간에 욱하는 분노 즉 ‘분노 조절 장애’로 인한 사건들이 많아지고 있다.
며칠 전 자신이 걸어가던 길에서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생전부지의 외국인 여성의 얼굴을 폭행했다가 중학생들한테 잡혀 경찰에 넘겨진 여성이 있었다. 폭행의 이유는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좁은 길도 아니었고 CCTV로 보니 얼마든지 옆으로 비켜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그 여성은 자기 인생의 한 편을 어둡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트라우마까지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혈기란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 사전에는 “격동하기 쉬운 기운”이란 말이다. 좀 더 쉬운 말을 한다면 ‘분노’ ‘화’ 란 말로써, “화를 낸다”란 말이다. 우리 삶속에서 쉽게 나오고 절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이 ‘화’가 아닌가 한다.
이 ‘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살인하는 죄를 짓는 것이고,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부부사이 부모와 자녀사이에서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가정들이 파괴되는 것이다.
성경은 ‘화’의 뿌리를 분명히 “육신의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육체의 행위는 명백하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원수 맺는 것과 다툼과 시기와 화내는 것과 당파심과 분열과 이단과 21 질투와 술주정과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과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여러분에게 경고했지만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생활을 일삼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갈 5:19-21)
성경에서 열거한 이런 것들은 성령의 열매와는 반대되는 육신의 열매들인 것이며, 이것들이 열매일진대 누군가는 씨를 뿌려놓은 것일 때, 그것은 마귀적(약 3:15)인 것으로써 악한 마귀가 뿌린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마음안에 씨로 들어올 때 싸워야 할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장면이 나온다. (마 21:12-13,요 2:13-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가셨다가, 성전 안에서 장사하고 돈 바꾸는 사람들을 보시고, 채찍을 만들어 동물들을 내쫓으시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신다. 평상시 온유하셨던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럼 예수님도 혈기를 부리신 것인가?
예수님의 분노를 육신의 열매인 혈기로써의 화를 냄과 구분하기 위하여, 거룩한 분노란 말을 쓰겠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분노)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하나님도 분노하시는 것이다.
그럼 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와 인간의 분노, 그리고 예수님의 화내심과 죄 된 인간의 육신에서 나온 혈기하고는 어떤 면에서 다른 것일까?
한국에 나의 어머니가 사신다. 어머니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언니이자, 나에게는 이모가 된다. 지금은 연세가 많이 드셨지만 어머니와 이모 두 분은 정말 우애가 좋으신데, 얼마 전 말다툼을 하셨다는 것이다.
웬만해서는 화를 안 내시는 이모께서 어머니께 화를 내셨다 길래 의아해서 물었더니, 저희 어머니가 이모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지적을 했고, 그것을 들은 이모께서 화를 내신 것이다. 같이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가만있는데 말이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훼손을 당한다고 여길 때 화를 내게 된다.
특히 자기에 대한 부분에서 화를 내는 것은 바로 ‘자기애’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이다. 사람은 돈을 잃어버렸다든지, 다른 사람이 약속시간에 오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게 한다든지, 자신에 대하여 누군가가 험담을 한다든지 하면 분노한다.
대부분이 자신을 거스른다고 여기는 것과 관련된 이기적인 것들이고, 그런 화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 혹은 다른 사람이 훼방 받는 것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은 쉬운가? 어렵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는 자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과 관련된 것, 당신에게 침을 뱉고 머리를 때리는 군병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온유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죽이려 할 때도 온유하셨고,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때도 온유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분을 내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하는 시장터로 만드는 것이 예수님에게 무슨 해가 있겠는가? 사람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왔다가 시장터처럼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기도 못하고 간다고 예수님에게 무슨 해가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로 왔다가 은혜받고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성전이 어수선한 시장터가 되는, 사람들의 신앙심이 훼손되고 하나님의 진리가 훼손되는 것에 분노하신 것이다.
이 분노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성전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그곳에서 기도하는 자들을 진정으로 살리기 위한 거룩한 분노셨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전쟁터에서 만났을 때도,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듣고는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다. 사실 그 당시 사울 왕이나 다른 이스라엘 군사들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듣고도 자신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어떤 분노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는 것임에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훼손되는 것을 보고는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골리앗을 대적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도와주셨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분별점이 있다. 자기애로써의 분노는 그 대상이 자기를 훼방하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그 분노의 방법이 그 대상을 향해 언어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폭력적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채찍을 드셨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때리시며 폭력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양과 소를 쳐서 성전에서 동물들을 몰아내시는 데에만 사용하셨다.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으셨다.
무엇을 위해 분노하고 있는가?
결국은 나도 해치고 남도 해하게 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하나님의 진리가 왜곡되고, 다른 사람이 해를 받는 것을 볼 때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을까?
우리가 분노해야 할 싸움의 가치와 대상을 바로 보고 분노한다면, 그것은 나와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더 아름답고 바르게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
원영훈|케언즈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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