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28대 총리, 토니 애봇의 삶

Tony Abbott (1957 – ) Former Prime Minister

정지수/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3/04/17 [09:40]

 

▲ 28대 호주 총리를 역임한 토니 애봇     

 

28대 호주 총리를 역임한 토니 애봇은 1957년 11월 4일 영국 런던 램버스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호주인 어머니 사이에서 일남삼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2살 때 그의 가족은 시드니로 이주했다. 처음에 그들은 브론티(Bronte)에 살다가 채스우드(Chatswood)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교정치과의로 치과를 운영했으며 2002년도에 은퇴했다.

 

▲ 쿠엔틴 브라이스 호주 총독이 토니 애벗의 호주 총리 취임을 승인했다. (2013. 9.18)     

 

토니 애봇의 부모는 모두 가톨릭 신자였고, 그를 가톨릭 신앙안에서 양육했다. 그들은 애봇이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 받길 원했다. 그래서 애봇을 밀슨스 포인트(Milson's Point)에 있는 가톨릭 사립 초등학교인 성 알로이시어스 컬리지(St. Aloysius College)에 입학시켰다.

 

애봇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리버뷰(Riverview)에 위치한 가톨릭 사립 고등학교인 성 이그나니우스 컬리지(St. Ignatius College)로 보냈다. 두 학교는 모두 예수회 사제들이 세운 학교로 가톨릭 신앙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학교였다.

 

그는 가톨릭 학교에서 가톨릭 신앙과 교리를 배웠으며, 가톨릭 신자로 성장했다. 가톨릭 학교에서의 교육은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 취임식 후 정부 고위 관계자들(왼쪽부터). Warren Truss, Tony Abbott, Julie Bishop, Eric Abetz     

 

시드니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애봇은 기자이자 가톨릭 정치운동가인 산타마리아가 주최한 한 달짜리 가톨릭 캠프에 참석해 큰 도전을 받기도 했다. 특히, 개인적으로 산타마리아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애봇은 정치인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1976년 그는 시드니대학에 입학해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시드니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81년 호주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운동을 아주 좋아했는데 대학교 재학 당시 아마추어 권수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리더십도 탁월해 학생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대학생이었을 때 바다에 빠져 표류하는 어린이를 구조했으며,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집에서 불이나자 불길에 뛰어 들어 집에 있던 어린이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 안작데이 행사에 참석한 토니 애봇, 쿠엔틴 브라이스 총독이 위임한 토니 애봇 정부 각료들과 기념촬영(2013. 9.13), 시진핑 중국 주석과 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한 애봇과 앤드류 롭(2014. 11), 존 케리 미국무장관과 회담을 마친 후(2014. 6) <사진= 상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시드니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취득한 학사 학위는 철학, 정치학, 경제학 통합학위였다 (Bachelor of Arts in 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그는 1983년 중반 영국 유학을 마치고 시드니로 돌아와 가톨릭 신부가 되겠다고 말해 가족들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아마도 영국 유학 시절에 종교적 열망이 커졌던 것 같다.

 

1984년 그는 맨리(Manly)의 성 패트릭 신학교(St. Patrick's Seminary)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신학교 공부는 그의 적성과 맞지 않았다. 그는 3년 동안 신학교를 다니며 갈등하다가 결국 신학교를 자퇴했다.

 

그가 사제의 길을 포기한 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신학교를 자퇴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가톨릭 예수회의 가르침은 저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열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에 입학했고 가톨릭교회의 신부가 되는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를 다니면서 저에게는 유능한 가톨릭 신부가 될 만한 자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자퇴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러한 개인적인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가톨릭 신학공부를 중단한 또 다른 이유는 바티칸 교리를 100%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교문제, 인종문제, 동성애문제, 낙태문제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해결책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교황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가톨릭교회 통치조직을 그는 100% 동의할 수 없었다.

 

그가 가톨릭 신학교를 포기했다고 해서 모든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성결혼합법화를 반대했다. 참고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여동생인 크리스틴 포스터는 동성애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레즈비언이다.

 

한편, 애봇은 개인적으로 낙태를 반대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죽이는 일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낙태를 법으로 금지해 관련된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을 반대했다. 낙태를 법적인 면보다는 윤리적인 면에서 접근한 것 같다.

 

한편, 가톨릭신학교를 자퇴하고 나서 애봇은 언론인으로 일했다. 그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크고 작은 신문에 논설을 게재했으며, 신학교를 자퇴하고 나서는 더 블리튼(The Bulletin) 잡지와 더 오스트렐리안(The Australian) 신문에 칼럼을 본격적으로 썼다.

 

▲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토니 애봇(가운데, 2012)     

 

그가 쓴 칼럼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노동당 쪽에 인맥이 닿아 봅 카 NSW주 수상으로부터 노동당 입당을 제안 받았다. 하지만, 그는 노동당에 마음이 가지 않아 자유당에 입당하고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가 정치계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영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1993년 10월 12일 영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이로서 그는 호주에서 정치인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뛰어든 선거는 1994년에 실시된 와링가 (Warringah) 보걸선거였다. 그는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유당에서 능력을 인정 받은 애봇은 1998년 고용서비스부 장관(Minister for Employment Service)으로 임명되었고, 2003년에는 노인보건부 장관(Minister for Health and ageing)으로 임명되었다.

 

2009년 그는 자유당 당수가 되었다. 2010년에 실시된 연방정부 선거에서 노동당에 패했다. 하지만, 그는 자유당 당수 자리를 유지했으며, 2013년에 실시된 연방정부 선거에서 승리하며 호주의 28대 총리가 되었다.

 

그는 총리가 되어 새로운 정책들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정책들은 국민정서와 어긋나는 것이 많았고, 일부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실행되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여론 조사에서 노동당에 크게 밀리자 위기를 느낀 자유당은 그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결국 말컴 턴불(Malcolm Turnbull)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 온건파들이 그를 총리자리에서 쫓아냈고, 말컴 턴불을 신임총리로 임명했다.

 

말컴 턴불에게 총리 자리를 빼앗긴 애봇은 재기를 꿈꾸며 2019년에 실시된 연방정부 선거에 출마했다. 자신의 지역구인 와링가 (Warringah)에서 출마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무소속 의원에게 대패하며 사실상 정치계에서 은퇴했다.〠

 

정지수 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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