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사태에 대한 진상

제43주년 5.18 민주화운동 ‘오월의 정신을 오늘의 정의로’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3/04/17 [09:59]

▲ 계엄군에 구타 당하는 시민(왼쪽).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 도청 앞 금남로에서 수많은 군중과 버스에 탑승한 시민들이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연합뉴스     

 

오월은 싱그럽고 아름다운 달이다

 

그러나 80년 5월은 6.25 이후 가장 참혹한 민족사의 비극이 일어났던 대 참변의 달이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띤 국국과 후방 지원을 담당하는 동족의 유혈충돌로 빚어진 엄청난 광주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전라도민은 물론 양식있는 전 국민들의 비통을 자아내게 하는 이 사태는 비상계엄이라는 너울 속에 정부 당국의 거짓된 발표와 통제된 언론의 편양보도로 인하여 철저히 왜곡되고 있음을 광주시민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도된 국민으로부터 자업자득이었다는 비난과 함께 질시의 눈초리를 당하고 있다.

 

거짓은 폭로되고 진실은 밝혀지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양심과 신앙의 충동에 따라 사태의 진상을 전 국민 앞에 발표하는 것만이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며, 이 사태로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한맺힌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이라고 결정하여 아래와 같이 전 국민 앞에 밝히고자 한다.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찍힌 기동타격대의 모습. ©5.18기념재단     

 

평화적인 학생 데모

 

비상계엄이 확대 실시되기 전까지 광주시 대학가는 교내 시국 성토대회를 벌리다가 <민주화 시국성회>를 갖기 위해 전남 도창 앞 분수대에 모였으며, 이후 남남대를 비롯하여 10개의 대학 전문 학생 3만여 명이 대규모 집회 및 횃불 행렬로 시위를 벌였다.

 

▲ 광주 금남로에서 벌어진 시위 도중 한 시위대가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고 있다.<1980년 5월 19일> ©5.18기념재단     

 

▲ 전남도청에서 체포된 사진 속 청년은 계엄군이 즉흥적으로 쓴 죄목에 의해 운명이 결정지어졌을 것이다. <1980년 5월 27일> ©5.18기념재단     

 

많은 학생 데모였지만 평화적인 것이었고 경찰과의 충돌조차 없었으며, 질서 정연하게 민주화를 추구하는 의사 전달식이었다. 학생들은 이 집회로써 그동안의 시위를 끝내고 정부 당국의 성의있는 답을 기다리며 수업에 전념할 것을 결의했었다.

 

이 평화적인 시위가 왜 참담한 살육이 자행되는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극으로 돌변하고 말았을까? 그 진범은 누구일까?

 

공수 특전단의 만행

 

만일의 휴교 사태에 대비하여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전남대생들은 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되고 데모 주동 학생들이 체포되던 5월 18일 아침 교내로 들어 가려다가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자 투석전을 벌였다.

 

계엄군에게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연좌시위를 벌렸고 경찰이 최류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이 벌어졌다. 경찰력으로 진압이 실패되자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남·여 학생들을 붙잡아 방망이를 휘둘러 마구 난타했다. 뒷통수를 맞고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쓰러진 학생들이 많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블럭을 깨서 돌을 만들어 집어 던졌다.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붙잡혀 온 학생들에게 군화발로 짓밟거나 기압을 주었으며, 심지어는 다시 방망이를 휘둘었다. 반항하는 경우 M16에 꽂은 칼(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 그었다.

 

피흘리는 학생들을 굴비처럼 엮어 군인 트럭에 싣고 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된 것이 발표되자 귀가하는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까지 무조건 두들겨 패고 연행했다. 이를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 한바탕 투석전이 벌어진 거리에서 한 청년이 나뒹굴고 있다. 주변 계엄군의 서슬에 겁을 먹은 여성은 그를 도울 수도 지나칠 수도 없다. 불과 몇 m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계엄군이 철모를 내려놓고 방독면을 고쳐 쓰고 있다. 무자비한 진압작전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1980년 5월 20일 전남 광주시 금남로> ©5.18기념재단     

 

다음날(19일). 시내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술렁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금남로 일대에 이루 셀 수 없는 시민들이 모여 들었으며, 이날 아침 몇 명 되지 않는 공수부원들은 어제와는 달리 모여드는 학생과 시민들을 쫓았다.그러다가 데모 학생들이 몰려들자 붙잡아 옷을 벗기어 길거리에 꿇어 앉혔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들을 계속 구타했다.

 

공수대의 잔인성을 직접 목격한 군중들은 울분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가택 수색까지 해가며 학생들을 붙잡아 갔고, 얻어 맞아 택시에 실려가는 학생들까지도 차에서 끌어 내려 두들겼으며, 심지어는 운전수들까지도 두들겨 팼다.

 

흥분된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하자 남녀노소를 구별치 않고 구타하거나 대검으로 난자했다. 칼로 옆구리가 찔린 학생과 등이 x자로 그어 있는 시체가 추후에 확인되었다. 이때 체포된 학생수가 927명이라고 계엄사는 발표했다. 양 이틀간의 무자비한 공수대의 만행은 많은 시민을 데모에 가담케했으며 군중의 분노를 가열케 했다.

 

데모대의 무장 경위

 

공수대의 만행과 체포가 그치자 시민들이 가족을 찾아 각 병원 응급실, 시체실을 메웠다. 그런데도 계엄사는 20일 민간인 사망자 1명, 계엄군 사망자 4명이라고 발표하여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일부 시민들은 공수대원들의 무차별 만행에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시내 버스, 택시 운전사들이 차를 몰아 도청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지키고 있는 군경을 향해 돌진해 갔다가 최루탄에 의해 밀려 냈다.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로 차도와 인도가 가득 찼고 시민들은 함성과 시위를 벌렸다. 아세아 공장에서 납품하려던 장갑차와 군용 찦과 트럭을 빼앗아 계엄군을 향해 시민들이 함께 나아 가다가 연이은 총성과 함께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 시민군이 광주 시내를 장악하고 있던 5월 24일 계엄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세간살이를 리어카에 싣고 광주를 떠나는 ‘피난’행렬이 이어졌다.©5.18기념재단

 

▲ 5월 20일 금남로에서 치열한 투석전이 벌어지는 동안 골목 식당 앞에선 시민들이 큰 솥을 걸고 시민군에게 줄 주먹밥을 만들고 있다.©5.18기념재단     

 

여러 대의 헬기가 상공을 배회했고 사상자는 계속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남의대를 비롯한 3개의 종합병원, 182개의 개인병원으로 총상자들이 분산되어 응급 치료를 받았다. 총소리에 쫓겨 놀란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숨을 곳을 찾아 나서자 거리는 텅비어 버렸다.

 

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시민들은 이에 대항할 무기의 필요성을 깨달아 화순을 비롯한 인근 경할서에 들어가 경찰 예비군용 총기, 실탄, 수류탄, 화순 탄광에서 사용하는 티·엔·티를 빼앗아 시내로 모이자 시가지는 완전 전쟁상태로 돌변했다.

 

총을 든 시민들에 듸해 계엄군은 외곽으로 퇴각했으며 이때도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밤새껏 쉬지않고 총소리가 났으며 밤에는 도청이 데모 군중에 의해 점거당했다.

 

도청 철수 이후의 광주 상황

 

학생들 스스로 시내 치안을 담당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했다. 점거된 도청이 학생들의 임시 본부가 되자 도청앞 광장과 금만로 시가는 임시 본부가 되자 도청앞 광장과 금남로 시가는 인파로 몰렸으며 다시 질서있게 ‘시민 궐기대회’를 가지며, ‘계엄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구속자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다.

 

종교계, 학생 대표, 학계, 법조계, 언론계 등의 인사로 수습위원회가 스스로 구성되었다. 수습위원들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하여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무기 수거에 나섰다.

 

시민과 대화를 하겠다고 발표한 신임 박 총리는 광주 상공을 헬기로 정찰하고 계엄사 전남북 본부에만 들려 상황을 청취한 뒤 일방적인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여 시민을 경악케했다.

 

수습 위원들의 활동으로 총기와 실탄이 상당수 회수되었다. 수습위원회가 여구 조건을 내었으나 원만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수습을 위해 최 대통령이 광주 사태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고 보상과 추후 정치적 보복을 없앨 것에 대한 성의있는 답변을 공개 천명토록 요구할 것을 결정했다.

 

이런 논의가 잔행되는 사이 계엄사는 약속을 어기고 시내 무장 진주를 시도하자 학생들은 수거한 무기를 다시 분배 무장했다.

 

▲ 박태홍 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가 잘못 됐을 경우에 대비해 품고 다닌 신원 확인용 메모와 기자로서 자괴감을 토로한 일기의 일부.©5.18기념재단     

 

▲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 중인 박태홍 전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5.18기념재단     

 

계엄군이 진주할 경우 시가지가 피로 물들 사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한 수습위원들은 비폭력의 죽음으로 항거하자고 결의하여 탱크 앞까지 죽음의 행진을 했다. 계엄군이 양보하여 퇴진했고 계검사와 수습위원이 다시 회동했다.

 

사태 수습이 사령관의 권한 밖임을 암시받자 수습 대변인이 대통령 면담을 위해 서울로 떠났다. 유혈 사태를 우려하던 수습 위원들의 인내와 수고가 무시된 채, 5월 27일 새벽 2시 섬광탄을 쏘고 총격전이 전개되어 유혈이 흐르는 가운데 계엄군이 다시 시가지를 장악했다.

 

계엄사는 이날 유혈 진압에 17명의 사망자뿐이라고 했지만 섬광탄에 희생되거나 총상을 입어 사망한 수는 새벽녘에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알 길이 없었다. 평화롭게 해결될 수 있는 기회가 계엄군의 성급한 진군으로 유혈 진압이 되어버린 것이다.

 

피를 부르며 시가지를 장악한 계엄군은 마치 적진을 탈환한 것 같은 승리감에 차 있었다고 아사이 신문은 전했다. 피를 머금은 땅은 흔적이 없듯이 열흘 동안의 민주화를 부르짖던 함성도 흔적이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광주사태에 대한 민주 시민의 긍지를 역사가 평가하여 줄 때가 오리라 믿는다.

 

폭도는 누구인가?

 

사태가 수습되었다는 당국의 발표를 듣고 ‘폭도’, ‘난동자’, ‘불순분자’, ‘극렬분자’에 의해 파괴되었을 법한 광주시를 찾아온 외래객들은 너무나도 평온한 시내의 분위기에 의아심을 갖는다. 파괴로 휩쓸린 도시가 아닌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사태 중 광주 MBC, KBS, CBS 방송국들과 두 개의 신문사는 사실을 보도해야 할 언론과 메스컴의 책임을 이행하지 못했음은 물론, 사상자 수에 대한 허위 보도, 시민들을 무장폭도 및 난동자로 규정하였으므로 시민들의 분노를 사 파괴 및 방화가 되었다.

 

많은 총기가 탈취 당했는데도 몇 건의 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은행 강도도 없고 전기 스도가 공급된 것은 시민의 수준이 높은 증거라는 외신기자의 말에 공감을 느낀다.

 

남녀 대학생들이 치안대를 조직하여 은행과 농협 쌀 창고를 지켰으며, 일부 지각없는 청년들의 횡포를 신속 정확하게 막았다 한다. 광주경찰서 현관과 벽에는 “본 경찰서는 우리의 재산, 기물 파괴는 세금의 과중 스스로 보호합시다. 학생 일동”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계엄군이 외부와 통신 교통을 차단시켜 생필품과 식량이 공급되지 않는 가운데도 매점매석 행위나 폭리를 취하는 자가 없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사태 속에서도 서로 식량을 나누어 먹었고,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여 피가 부족하게 되자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무한히 늘어서 지금도 헌혈 받은 피들이 남아 돌고 있다.

 

▲ 5.18 국립묘지의 묘역, 광주 망월동 묘지, 국립 5.18 묘지의 고인을 추모하는 문, 광주 5.18기념관(사진=상단 왼쪽부터 시계 방향) ©5.18기념재단     

 

부녀자들은 데모 대원들에게 스스로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고, 배고파 하는 계엄군들에게도 미움을 잊은 채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다.

 

사건의 전모가 발표되지 않았으나 3명의 간첩 혐의자를 받았다. 소위 치안부재의 10일, 곳곳에 흩어진 돌맹이, 유리, 최루탄 파편을 쓸어내는 시민들, 총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운반 간호했던 의사, 간호원들, 생명을 내어 맡기며 젊은이를 보호했던 운전사들, 어느 때보다도 가장 선량했던 세칭 부랑아와 버림받은 이들, 방망이를 휘둔 공수대원 앞에 너무나 섧게섧게 울어버린 어느 아낙의 따스한 마음, 파괴와 방화를 하지 말자며 만류하던 우리 모든 광주 시민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폭도들의 짓이 아니다. 저들이 불순 분자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불순분자와 폭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연행, 체포의 위협 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광주 시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민주시민의 긍지를 마음속에 갖지만 응어리진 마음은 풀리지 않은채 이재민에게처럼 보내지는 구호품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며 외면하고 있다.

 

군은 이상과 같은 한국 근래 사상 유래없는 유혈사태를 유발하여 놓고 그 책임을 광주 시민에게 전가하기 위해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고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광주 시민들과 우리 국민 전체의 가슴에 피맺힌 한을 남겨 놓았다. 더욱 그들이 저지른 잔인한 난항에 대해 추호도 양심의 가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1980년 6월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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