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업가이자 위대한 자선가 ‘마이어 베에브스키’

글/정지수 사진/권순형 | 입력 : 2023/07/24 [14:53]

▲ 마이어 백화점 체인을 설립한 사업가이자 자선가인 시드니 마이어 베에브스키(1878–1934)     

 

시드니(심차) 마이어 베에브스키 (Sidney(Simcha) Myer Baevski)는 1878년 2월 8일 러시아에서 유대인 부모의 열한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러시아에서 유대인 학교를 다녔다.

 

그의 형인 엘콘 베에브스키(Elcon Baevski)는 성인이 된 후에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먼저 호주로 이주했다. 엘콘은 멜번에 정착해 의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엘콘의 뒤를 이어 마이어도 1899년에 호주로 이주했다.

 

그는 멜번에 먼저 이주한 형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호주 정착 초기 그는 스스로 영어를 배웠다. 영어에 익숙해지고 호주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한 그는 멜번에서 벤디고로 이사하여 작은 옷가게를 열었다. 멜번 도매상에서 옷들을 가져다 시골 마을을 돌며 팔았다. 처음에는 걸어서 옷을 팔러 다녔고, 형편이 좋아진 후에는 말과 수레를 타고 돌아다니며 옷을 판매했다.

 

1900년에 마이어는 그의 형 엘콘과 함께 공식적으로 사업파트너가 되었다. 그들은 한 쇼핑몰에 의류 가게를 열어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마이어의 형인 엘콘은 유대인의 엄격한 안식일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가게 문을 열지 않으려 했다.

 

마이어는 이런 형과 자주 다투었다. 사업을 위해 토요일에도 문을 열어야 한다고 마이어는 주장했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의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라섰다.

 

▲ 마이어는 1925년 멜번 증권 거래소에 상장되었으며, 1928년 멜번에 Queensberry Street에 별도의 건물을 세웠다.     

 

마이어는 형과 결별하고 벤디고를 떠나 다시 멜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멜번에서 의류 회사를 시작했다. 그의 의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05년 3월 8일 그는 한나(Hannah Flegeltaub)와 결혼했다. 그들은 자녀를 간절히 원했지만,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1911년부터 그는 그의 조카인 노르만 마이어(Norman Myer)의 후견인이 되었다.

 

마이어는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분석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의류들은 디자인이 뛰어나 고객들에게 아주 매력적이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의류 전시에도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여성 고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감각적이고 설득력 있는 광고들을 과감히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사업 수단을 통해 그는 많은 고객들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정착이 되자 그는 그레이그 윌리암슨 (Craig Williamson) 회사를 합병 인수했다. 그의 사업 규모가 커져 연간 순이익이 £15,000(파운드)를 넘어섰다.

 

1909년에 그는 해외여행을 떠났다. 해외여행의 목적은 영국과 유럽의 의류 판매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었고 해외 의류 제조업체들과 수출업체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해외여행을 통해 외국의 의류 및 물류 시스템을 경험한 후 그는 호주로 돌아왔다.

 

▲ 마이어 백회점 설립자 시드니 마이어의 삶과 유산을 기록한 자서전. Myer는 호주 전역에서 누구나 아는 이름이지만 이 소매 제국의 배후에 있는 사람인 Sidney Myer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911년 4월 그는 멜번 시내 중심에 있었던 유명한 의류 가게인 라이트 앤 네일(Wright & Neil)을 £91,450에 구입할 기회를 잡았다. 그는 직원 임금을 인상한 다음 2주 동안 재고 조사 및 주문을 위해 매장을 닫았다. 그리고 가게를 보수하고 새롭게 단장했다. 신문에 대대적 광고를 한 후에 가게를 열었는데, 이것이 마이어 1호점이었다.

 

새롭게 문을 연 마이어 1호 점은 상품들을 거의 원가로 판매했다. 또한, 상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판매했다. 쇼핑객들은 탁자 위의 상품들을 만져볼 수 있었고, 필요하면 구입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객들에게 새로운 쇼핑의 경험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마이어 1호점이 문을 열자 일주일 이상 고객들이 물밀 듯이 몰려 왔다.

 

마이어 1호점이 크게 성공하자 다른 지역에도 마이어 지점을 열었다. 사업이 번창해 일손이 부족할 때 마이어의 형인 엘콘이 다시 사업에 합류했다. 엘콘은 벤디고에서 두 개의 마이어 매장을 관리하게 되었다.

 

1914년 7월에 마이어는 멜번에 8층짜리 대형 쇼핑센터인 마이어 엠포리움(Myer Emporium)을 열었다. 그리고 더 많은 고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멜반 시내에 무료 버스를 운행해 고객들을 자신의 쇼핑센터로 모셔왔다.

 

▲ 시드니 시내 피트 스트리트 입구에 있는 마이어 백화점.     

 

한편 그의 형인 엘콘은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1919년 초에 호주로 돌아와 마이어 엠포리움(Myer Emporium)에서 상품 구매 메니저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마이어는 1차 세계 대전이 장기화 될 것을 예상하고 수입품 확보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전쟁이 지속되면 상품 수입이 어려워져 가격이 폭등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호주 내에서 생산되는 상품도 적극적으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직접 의류 생산 공장을 지어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업 규모가 점점 더 커지자, 그는 1917년 자본금 £500,000을 가지고 멜번에 마이어스 주식회사(Myer's Pty Ltd)를 설립했다.

 

마이어는 키가 크고 우아했으며 파랑색의 눈과 높은 광대뼈와 단정한 콧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조리있게 말을 잘 했다. 그가 대중 앞에 서서 연설을 할 때 종종 그의 러시아 악센트가 튀어나오곤 했다.

 

그는 직원을 배려했고 건설적인 비판은 수용했다. 항상 그는 자유롭게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했고, 어려운 일도 솔선수범했다. 하지만 일에 있어서 직원들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때에는 가차 없이 지적해 수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직원들을 탁월하게 만들었고, 직원들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1919년 그는 미국을 방문해 미국의 쇼핑센터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했고 그의 아내와 이혼했다.

 

▲ 6: Grace Bros는 1885년에 설립된 호주 백화점 체인이며, 1983년 Myer가 인수했다. 2014년 마이어(Myer)리는 이름으로 브랜드화되었다.     

 

1920년 1월 8일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멜번 출신의 마아저리 머어린(Margery Merlyn)과 재혼했다. 이후 그의 아내는 4명의 자녀를 출산했다.

 

1920년까지 마이어 엠포리움(Myer Emporium)에서는 '금요일 특별 세일'과 월요일 '특가 할인' 행사를 진행했다. 많은 쇼핑객들이 몰려와 상품을 구매했으며 이러한 특별 할인 행사는 호주에서 새로운 쇼핑 트렌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편, 그는 새로운 지주회사인 마이어 호주(Myer's Australia Ltd)사를 만들어 그가 소유한 기타 사업들과 쇼핑센터들을 통합했다.

 

그는 경영진과 관리자들에게 주식을 분배해 주었다. 1926년 그의 회사에서는 약 2천 명이 넘는 직원들이 함께 일했다. 그는 그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직원들을 가족처럼 대했다.

 

▲ 본다이 정션 (Bondi Juctiob)에 있는 마이어 본다이 (Myer Bondi)     

 

마이어 엠포리움(Myer Emporium)은 꾸준히 성장했다. 1922년부터 1925년 사이에는 그의 사업이 무려 3배나 성장했다. 그리고 전국 주요 도시에 마이어 쇼핑센터가 세워졌다.

 

그리고 1930년 이후부터는 호주산 상품들을 구매해 판매하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편, 대공황이 시작되자 그는 판매 이윤을 5%로 제한했다. 그리고 집단 해고 없이 대공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직원들의 월급을 20% 삭감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자본가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대공황 시기에 그는 다른 사업가들을 독려해 정부에 기부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자기 자신도 수만 파운드를 정부에 기부했다. 또한 1930년 크리스마스 날에는 실업자 만 명을 초대해 파티를 열어 그들을 격려해 주었다.

 

한편, 마이어는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서 다양한 자선 활동을 펼쳤다. 그는 기독교 친목회에 참석했으며, 합창단을 구성해 자선 모금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또한 멜번대학이 재정적 적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이어는 £50,000 파운드 상당의 자기 회사 주식 25,000주를 기부했다.

 

1929년에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이 병원에 £8,000 파운드를 기부했으며, 매년 £1,000 파운드씩 멜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기부해 그들의 음악활동을 도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로얄 멜번 병원(Royal Melbourne Hospital)의 환자 관리시스템과 물품구매 시스템을 더 효율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빅토리아주 설립 100주년 기념행사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며 약 £20,000 파운드의 기부금을 모집했다. 그는 구급차 서비스에도 기부했으며, 사망하기 직전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교육시킬 농장 사업을 위해 £100,000 파운드를 기부할 계획이었다.

 

마이어는 1934년 9월 5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사망했을 때 가족들이 물려받은 유산은 약 100만 파운드가 넘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산의 10분의 1인 10만 파운드는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신탁되었다.

 

마이어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가 '지나치게 야심만만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그는 '분명한 비전과 뜨거운 열정, 따뜻한 인간적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이어는 소매업 혁신을 일으켜 성공한 사업가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기부한 위대한 자선가였다. 호주 사람들은 그를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

 

정지수ㅣ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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