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하)

백학/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3/08/28 [12:32]

▲ 경남 창원시 진동면 창원공원묘원에 2010년 10월 3일개관한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현재 창원시의 문화유산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다.©크리스찬리뷰     

 

선조들의 신앙

 

공주제일교회와 바로 옆 건물 공주기독교박물관을 방문했다. 여자 해설사가 120여 년의 역사를 설명하며 본인도 감동받는 모습에 선조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1919년 삼일절 만세 시위에 공주 장터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른 이 운동에 18명의 인물들이 검거되기에 이른다.

 

이들 18명의 피검자 대부분이 공주제일교회와 선교의 맥을 같이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역사 속의 공주제일교회는 123년의 세월 속에 몇 차례의 보수과정을 거쳤지만, 내 외벽과 바닥 굴뚝 스테인드 글라스 등이 건축 초기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교회건축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한다.

 

전라남도 광주의 양림동은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양림동은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근대화가 시작된 곳으로 수많은 선교 유적들이 있다. 그래서 양림동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문화 마을이다.

 

시청 소속의 역사문화해설사가 나와서 선교사들의 사역과 대한제국 근대 역사를 1시간 30여 분간 여기저기를 소개해 주었다.

 

바로 좁은 길 건너편에는 호남신학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교정을 통과하여 뒤편 언덕 위로 올라가면 숲길 옆에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제중원 병원장을 역임한 우일선(Robert M. Wilson) 선교사의 집이다.

 

그 당시 천벌로 여겨졌던 한센병 환자들을 최홍준, 서서평 등과 함께 친 가족처럼 보살피며 자활의 기반을 마련하여 주었다. 차츰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몰려드는 환자들이 넘치자 여수 울촌면에 애양원을 개척하여 평생을 의료사역에 일생을 바쳤다. 이 건물은 나중에 6.25 전쟁 고아들을 돌보는데도 사용되었다 한다.

 

건물 뒤로는 전남 광주를 사랑하였던 선교사들의 묘원이 자리하고 있다. 유진 벨 선교사, 오웬 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나, 서서평 선교 간호사 등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파란 눈의 백인 선교사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미지의 땅 조선에 왔고 그 중 몇 분은 광주로 내려와서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소년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긍휼사역을 감당했던 곳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오늘날 이 오솔길이 광주 시민들의 산책로로 사용되며 100년도 더 지난 선교사들의 사역을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건너편 저 멀리 광주 무등산이 보인다.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

 

일곱째 날, 호텔 조식 후 여수로 이동했다. 여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 손양원 목사의 애양원이 있다. 애양원교회의 비전은 “시작도 끝도 예수그리스도(빌 1: 20), 그리스도인 작은 이의 벗(마 25: 40), 십자가의 사랑으로 지역과 사회에 정다운 공동체(갈 2: 20)가 되자”이다.

 

교회 창립일이 1909년 4월 25일이니 114년이 된다. 여순 사건과 두 아들의 순교는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며 진정한 기독교인인지를 알게 해준다. 두 아들의 장례예배에서 손양원 목사는 아홉 가지 감사를 하나님께 올린다.

 

나의 아홉 가지 감사,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주님께 감사합니다. (중략).

 

순천시 기독교박물관을 방문했다. 중앙로 큰 길에서 의료원 로터리를 끼고 좌회전하여 들어서면 ‘매산’ 이라는 이름이 앞머리에 나오는 학교들이 주위에 있다. 학교 설립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이 주도해서 오늘에 이르며 미션 스쿨로 기독교적 색채가 짙다.

 

푸르른 솔나무들이 둘러싸인 곳에 기독교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알아볼 수 있는 수많은 사건,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선교사들,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되어 와서 호남 동부권에서 활동했던 삶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전시관 안에서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물건들이 있었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 올 때 최소한의 필요한 소지품을 담아온 여행용 가방들과 아기들에게 먹였던 분유 드럼통이 보였다. 한국 기독교는 빚진 자의 마음을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하게 밀려왔다.

 

데이비스의 죽음과 복음의 열매들

 

여덟째 날, 창원공원묘원을 방문했다. 묘원 입구에 어느 시인이 선교사를 사모하는 마음을 담은 비문이 세워져 있다. “동방의 작은 횃불 삼천리 강산에 120년 전 복음의 씨로 등불이 켜지고 순교자의 붉은 피는 지금도 우리 안에 꽃불로 타고 계시네.” (중략)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에 벽안의 두 남녀가 도착했다. 지금으로부터 134년 전이다. 두 사람은 남매간이며 호주 빅토리아 주 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s, 1856. 8. 22-1890. 4. 5)의 당시 나이는 33세이며 누나 메리 데이비스(1853-1941)는 3살 위였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발을 디딘 이국 땅이 부산이었기에 선교사역을 부산에서 하고 싶어했다.

 

그렇지만 먼저 서울로 가서 영어권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선교 관련 정보를 얻는 동시에 언어 훈련이 필요했다. 5개월 후에는 어느 정도 한국어를 더듬거리며 복음전도가 가능하였다.

 

선교분할에 관하여 선교공의회에서 협의가 이루어졌는데 데이비스의 희망대로 호주 장로교회는 부산, 경남지역을 맡기로 하였다.

 

▲ 경남 창원시 진동면 창원공원묘원에 조성된 호주 선교사 묘원에 선교사 후손들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이곳에는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를 비롯한 한국에서 순직한 8명의 선교사 묘비가 세워져 있다.(2009. 10.7) ©크리스찬리뷰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원리를 따라 선교사가 없는 곳으로 정해졌다고 여겨진다. 이 결정에 의해 조셉 헨리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출발하여 20여 일을 걸어서 부산에 도착했다.

 

세상에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도착 다음날 데이비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사망의 원인은 부산으로 향하는 여정 내내 발 닿는 마을마다 전도하다가 전염성이 강한 풍토병에 쓰러진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다. 신묘막측이라는 4자성어 그대로이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한 인간의 자연사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수십 배, 수백 배의 사역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는 대속의 죽음이었듯이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부산 경남의 복음 사역에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한편 누나 메리도 건강이 좋지 않아 한동안 고생을 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 덕분에 회복하여 그해 7월 호주 멜번으로 돌아갔다. 선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품고 조선 땅을 방문한지 불과 6개월 만에 남동생을 잃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누나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이대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선교의 열정,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하나님의 선교’로 일대 반전을 일으켰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생애를 기리는 감사예배를 드리는 날, 호주장로교회와 청년연합회, 장로교 여전도협회는 ‘한국선교는 결단코 중단될 수 없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다’라는데 마음을 모으게 된다.

 

▲ 경남 창원시 진동면 창원공원묘원에 조성된 호주 선교사 순직 기념비문.(2009. 10.7) ©크리스찬리뷰     

 

다음해 1891년 10월 12일 5명의 선교사가 부산항에 도착하며 이때부터 호주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이날 도착한 5명은 미우라(Moyoora) 고아원을 세웠으며, 이사벨라 멘지스(Isabelle Belle Menzies, 1856-1935)는 일신여학교 초대교장에 취임했다.

 

일신여학교는 부산, 경남 최초의 근대여성교육기관이자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설립한 학교이다. 그뿐 아니라 부산경남 지역 삼일운동의 산실이 되었다.

 

여전도회연합회(PWMU)는 처음부터 여성에 의해서 여성을 선교하는 단체 ‘Mission work among women by women’임을 분명히 한다. 그후 해방 전후까지 126명의 선교 동역자가 한국교회에 파송되어 복음 전도와 더불어 일제의 압제 가운데 투쟁과 순교가 이루어지는데 호주 선교사들의 사역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커다란 감명을 남긴다.

 

미우라 고아원, 부산진 일신여학교, 일신기독병원, 진주 배돈병원, 마산 창신학교 등과 여러 교회가 세워지며 오늘날까지 그 열매는 익어가고 있다. “한국을 사랑했던 세 명의 호주여선교사” 2022년 6월 호 크리스찬리뷰 기사 제목이다.

 

2022년, 제103주년 3.1절을 맞이하여 호주 여성 선교사 3인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마가렛 데이비스(Margaret Davies), 벨레 멘지스(Belle Menzies), 데이지 호킹(Daisy Hocking) 등 3명의 호주 여선교사는 한국에서 30여 년간 지역선교와 어린이 교육, 고아들을 돌보며, 특히 여성교육에 공헌한 부분에서 큰 업적을 이루었다.

 

호주선교사 묘원과 경남선교 120주년기념관

 

2009년에 순직호주선교사 묘원이 조성되었으며, 2010년에는 창원시 진동에 경남선교 120주년기념관, 2015년에는 주기철 목사 기념관,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 기념관을 건립해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길을 조성했다.

 

기념관에는 선교 초기의 설립된 교회들과 각 지부 설립의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거창 진주 통영 사천 등의 교회들이 소개되었으며, 결정판으로 호주선교기념관이 창신중학교 입구에 완공을 앞두고 있다. 묘원에는 선교사뿐만 아니라 이곳에 묻이고 싶어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학술탐사 인물조사에서 단연 으뜸으로 등장하는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동상 앞에 서 본다. Australian Missionary Rev. JOSEPH HENRY DAVIES 1856. 8. 22 –1890. 4. 5 날자 아래에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이 영어로 기록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24).” 오늘 우리는 그 한 알의 밀알 앞에 서 있다.

 

울릉도와 매견시 선교사

 

아홉번 째날, 울릉도 저동 항구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지난 밤 늦은 시간에 포항 영일만 항구에서 승선하여 밤잠을 배 안에서 지냈다. 학술탐사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독역사가 울릉도에서도 일찍이 시작되었음을 새롭게 알게 된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 동관교회에서 이틀간 묵었다.

 

울릉도 동관교회는 1909년 4월에 성도 30여 명이 초가삼간을 매수하여 최초로 감리교회로 시작했다. 그 후 장로교회로 변경하는 허락을 받아서 오늘날까지 예배를 드려오고 있다. 특별한 사연은 한국 한센병의 친구 매견시(Rev. James N. Mackenzie) 목사가 1913년에 이 동관교회를 방문하여 격려한 기록이 있다.

 

당시 배편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호주 선교부가 이를 돕기로 했는데, 이때 매견시 목사가 방문하여 긍휼사역을 담당하였다.

 

▲ 독도를 방문한 알파크루시스대학교 학술 탐사팀.©백학     

 

독도는 우리 땅, 독도 상륙은 날씨가 좌우한다. 독도에 오를 수 있는 날은 일년 365일 중 대략 50일에서 60여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오늘은 기상 상태가 양호하다. 20여 분을 사진 촬영으로 보냈는데 뱃고동 신호에 승선해야만 한다. ‘저 높은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떠났다.

 

열 번째 날, 오늘은 울릉도를 좀 자세히 둘러보는 날이다. 울릉도에는 인구 1만여 명에 교회가 40여 개가 된다고 한다. 교회가 많은 것은 반가워해야 되는 일이다. 어떤 분의 말에 의하면 산으로 둘러싸인 울릉도의 특성상 산을 넘기가 힘들기에 각 포구 마을마다 배로 옮겨 다니는 통행상의 이유라는 설명이 있었다.

 

지금은 여러 곳에 터널이 뚫어져서 편리하게 교통을 누릴 수 있다. 저녁시간에는 동관교회 장로로부터 울릉도 선교 100주년 기념교회가 세워진 경위와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열 하루째 날, 울릉도를 떠나는 날이다. 올 때와는 달리 사동항에서 출발하여 강릉항으로 갔다. 포항에서 울릉도로 가는 것보다 시간이 적게 걸리는 것 같다. 버스 차창 밖으로 강릉 단오제 축제장을 보게 되지만 학술탐사 여정의 주요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열두 번째 날, 양화진의 역사는 조선시대에 한강을 중심으로 교통과 국방의 요충 지대였다. 양화진의 깊은 강물에는 큰 상선들이 드나들 수 있어서 제물포를 경유하여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도성과 궁궐로 배분되는 천혜의 입지조건이다.

 

이곳 양화진에는 조선 말 고종 때부터 한국을 위해 공헌한 언론 교육 기독교 외국인 인사들 500여 명이 안장되어 있다. 조선 정부에서 하사한 부지이다. 현재 이곳은 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회와 100주년 기념교회가 관리하고 있다.

 

▲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방문한 알파 학술 탐사팀.©백학     

 

단체로 묘원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사전 예약을 해야한다. 영상 안내를 하기 전에 묵상기도로 마음을 준비시켰다. 영상시청이 끝난 후 묘원을 둘러보는 각 그룹별로 안내자가 배정된다. 방문한 날이 토요일에 방학 기간이어서인지 많은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묘원을 찾아왔다.

 

어린 학생들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서 한국 기독교의 밝은 미래가 보였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의 부흥 발전은 선교사님들에 의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으로 맺힌 열매이다.

 

호주 이민자, 디아스포라로 살면서 호주 교회가 한국에 끼친 선교역사는 매체를 통해서 단편적으로 조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인물과 사역들을 만나게 되니 받는 감동이 컸다.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의 순교와 그후 이어진 호주 선교사 한 분 한 분의 삶은 한국 교회의 밑거름이 되며 우리 각자에게는 맡겨진 소명을 다시 확인하는 한∙일선교역사 학술탐사 여행이었다.〠

 

백학|시니어 선교 한국 파송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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