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그리스도인의 문화관

주경식/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3/08/28 [12:39]

그리스도인과 문화

 

트위터(twitter)니 페이스북(face book)이니 하는 용어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작금의 문화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아이돌이니 K팝이니 하는 용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묘사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판국에 발빠른 문화들은 급속하게 교회의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옛날처럼 무조건 안된다고 할 수도 없고(그랬다간 퀘퀘 막히고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금방 매도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에도 영 석연치 않은게 사실이다(많은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상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어떤 자세와 접근법을 내세우든,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서 “문화”라는 주제를 쉽게 간과할 수 없다.

 

문화란 인간 삶의 총체적 활동이고, 우리 모든 삶에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은 ‘문화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만이 문화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듯 문화는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 구분 짓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기동하듯” 동시에 “문화 안에서 살고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아이폰’은 세계를 공통적으로 묶는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아이폰’을 비롯해 ‘아이패드’ ‘갤럭시 탭’ 등을 이용하여 그들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있는가?

 

한편 컴퓨터 게임과 중독에 빠져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이라면 이러한 현대 문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나 현대의 테크놀로지에 대해 결코 호의적 감정만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에 대해 놀랍고 흐믓한 마음을 품는 동시에 안타깝고 경계심 넘치는 심정을 갖기도 한다.

 

문화에 대해 놀랍고 흐뭇한 태도를 갖는 것을 무시하면 분리주의자가 될 것이며(종종 보수교회의 행습이 그러했던 것처럼), 문화에 대해 안타깝고 경계심을 갖는 태도를 무시하면 타협주의자가 될 수 있다(자유주의 신학에서 많이 발견되듯이).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문화에 대한 바른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상반된 문화 속에서

 

이천 년 전 예루살렘의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성령충만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온 세계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 복음이 처음으로 만난 세계는 헬레니즘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시대였다.

 

시민들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외치고 있었고, 예술과 학문이 크게 번성하던 때였다. 도덕과 사회관습은 어느 정도 고정된 체계를 확립하고 있었고, 정복자들은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고 거대한 도시와 수도들을 건설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복음은 풍요로운 자연적 생활과 고도로 계발된 문화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복음과 문화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조정되어야 하느냐였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질 때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유교, 불교, 무속 신앙 속에서 종교의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한국사회 자체의 사회적 윤리규범인 삼강오륜이나, 효도 제일주의 등의 윤리체계 속에서 복음은 조선의 문화와 많은 차이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10:35-37)

 

이쯤 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천하에 불효가 되고 국가의 근본 체계를 위협하는 것처럼 비쳐지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은 언제나 주위 문화와 묘하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경 또한 세상문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 상반되는 듯한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어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한쪽에서는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하고”(요일5:19) 라고 말하면 다른 쪽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31)라는 구절을 들고 나오며, 한편에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말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두 가지 태도

 

고대 교부 터툴리안이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설파했을 때 그는 교회의 삶은 세상과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극단적인 견해를 표명한 것처럼 보인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의 민감한 지도자들이 터툴리안과 같이 문화는 너무 오염되어 있고 세상은 악마적인 것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서 벗어나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가르쳤던 주장들이 있었다.

 

중세의 수도원 사회, 16세기의 재침례파교도들, 17세기의 경건주의자들, 19세기의 부흥운동주의자들, 그리고 20세기의 근본주의자들은 모두 그들의 사회 속에서 세상과 분리 (Isolation)와 은둔(Retreat)의 태도들을 강조했다.

 

다른 극단으로는 동화(Assimilation)와 항복(Capitulation)의 태도들이 있다. 이 태도는 분리주의자들이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갖고 세상을 분리시키려는 반면 동화주의자들은 이 대립을 불편시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나라”와 “이 세상”에서 다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낙관적이다. 중세기의 로마 가톨릭 교황,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이신론 (Deism), 19세기의 윤리적 자유주의, 20세기의 사회복음주의 등이 세상에 적응되고 동화된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국과 유럽의 대교회 교단들이 이러한 생각들을 품고 있다. 도덕, 정치, 예술, 철학등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대체로 세속적이고 인본적인 관념을 가진 비그리스도인 학자들로부터 전수되어진다.

 

기독교적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주위 문화의 비기독교적 시대정신에 항복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분리와 은둔의 태도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지배적인 반면,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는 서구의 인간주의적 사상가들이 말한 것에 동화하고 항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계속>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ACC(호주기독교대학) 교수

▲ 주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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