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넘치는 외교관의 따뜻한 이야기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3/09/25 [15:27]

▲ 호주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 집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한 김완중 대사. ©크리스찬리뷰   

 

그를 처음 본 인상

 

지난 2월쯤으로 기억된다. 호주에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은 김완중 대사가 시드니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제20기 민주평통 호주협의회 임원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해서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

 

격식 없이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 편하게 인사하는 그의 친근한 모습에 반해 기자가 말을 건넸다.

 

“대사님, 사람들을 친근하게 대해 주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언제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명함을 꺼내 주면서, 미리 알려만 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기자의 말을 편하게 받았다. 처음 보았지만 먼저 친근감 있게 다가서는 그의 인상에는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그 후 가평프로젝트와 가평 사진전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김완중 대사를 인터뷰할 기회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2023 캔버라 개천절 행사

 

▲ 개천절 행사장 입구에서 내빈들을 맞이하는 김완중 대사 부부(왼쪽).©크리스찬리뷰

 

그리고 7개월 만에 캔버라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인터뷰를 위해 연락을 취했는데 마침 개천절 행사가 캔버라에서 열리니 행사에 참석하고 그 후에 인터뷰하면 좋겠다고 기자 일행을 초대했다.

 

기자 일행은 9월 14일, 한국대사관이 개최하는 개천절 국경일 행사에 참석했다. 개천절 행사는 캔버라 올드 팔러먼트(구 국회의사당) 연회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리처드 말스 호주 연방 부총리를 포함하여 현지 각국 외교단, 한국전 참전용사, 교민 대표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큰 행사였다.

 

연회장 입구에서 내빈들을 맞이하고 있는 김완중 대사를 순서에 따라 입장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몇 개월 만에 만났는데도 기자를 기억하고 있는 듯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김완중 대사는 인사말을 통해 “한국전쟁 후에 누구도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규모를 가진 민주국가로 일어서리라 예상을 못했지만, 이제는 대한민국이 많은 부분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나라로 성장했다”면서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호주 참전용사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한국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구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개천절 기념행사에서 인사말을 전하는 김완중 대사.©크리스찬리뷰 ©크리스찬리뷰     

 

▲ 행사 후 참석자들에게 불고기, 잡채, 볶음밥을 저녁 식사로 대접했다.©크리스찬리뷰     

 

이날 행사에는 한국 국악에 맞춰 한복 패션쇼가 열렸는데 현지 외교단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대한민국 문화의 위상이 국제 무대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외교관의 길에 들어서다

 

그는 1990년 외무고시를 통해 외무부에 입부했다. 평범한 시골 출신이었지만 그를 외교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그의 군생활과 관계가 깊다.

 

“저는 시골 출신입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의정부에 있는 미2사단 캠프 스탠리에 카투사(KATUSA)로 지원했습니다. 미군들과 함께 군 생활을 하다 보니 그때 당시 한국의 위상도 눈에 들어오고 또 카투사들은 대부분 미군의 지시를 받고 근무를 하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 조그마한 사회에서도 미군들과 카투사 간의 갈등, 자존심의 대결 이런 것들도 있고요. 그런 환경 속에서 약소 민족으로서의 아픔과 젊은 날의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국제적 견문을 가지게 되었고, 제대하고 나서 앞으로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서 직업을 구하는 것보다 외교관으로서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무고시를 준비하고 외무부에 입부하게 되었습니다.”

 

▲ 개천절 행사에서 한국의 전통의상을 선보인 한복 패션쇼가 절찬리에 열렸다. ©크리스찬리뷰     

 

그는 상당히 말을 아꼈지만 당시 그가 젊은 날에 카투사로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며 겪었을 많은 애환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한국 남자로서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카투사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보직이다. 하지만 이 안에서 미군들에게 받았을 약소 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의 상처와 아픔이 오히려 그에게 긍정적인 인생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그는 외교관이 되어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애국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조국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외교관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완중 씨의 페루 외교일지

 

그는 2010년에서 2012년까지 페루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완중 대사의 아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페루로 이민 가서 16년간이나 페루에서 살았던 이민자의 딸이었다.

 

▲ 개천절 행사에서 한국의 전통의상을 선보인 한복 패션쇼가 절찬리에 열렸다. ©크리스찬리뷰     

 

그녀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스페인어 통역관으로 나왔다가 막 외교부에 입부한 김완중 씨를 만나서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페루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박만복 감독이다.

 

그녀는 아버지 박만복 씨를 따라 1974년 페루로 이민 왔다. 배구 불모지였던 페루에 여자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박만복 감독은 세계대회 우승 14번을 포함, 4번의 올림픽에 출전해 페루 여자 배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 놓았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는 6위,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4위, 급기야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2위로 은메달을 따내 페루에서 국민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김대사는 뉴욕에서 영사로 근무한 후 다음 근무지로 페루를 희망했다. 열악한 환경의 페루를 지원한 그의 선택을 모두 의아해했지만 김 대사는 아내의 제2고향이자, 장인·장모가 반평생을 살아온 이 가난한 나라에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완중 대사는 페루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할 때 실무관으로서 페루와의 FTA(Free Trade Agreement, 자유무역협정)협정을 이끌어내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그의 이야기가 2010년 KBS 1 TV 인간극장에 ‘완중 씨의 페루 외교일지’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페루는 한국과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한국과 교역량이 많은 나라입니다. 페루는 안데스 산맥으로 유명하잖습니까? 안데스 산맥 곳곳에 우리 기업들이 석유, 가스 개발 광구를 갖고 있고요.

 

그리고 페루는 러시아 다음으로 수산물 어획량이 많은 나라입니다. 대왕 오징어 같은 경우는 어획량의 70-80% 정도가 한국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한국과 교역이 많은 나라입니다.

 

제가 마침 페루에 부임했을 때 페루와 FTA가 추진중이었어요. 그때 페루 사람들의 FTA에 대한 생각, 페루는 FTA를 해서 한국에서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가? 교섭에 있어서 페루가 계속해서 자기들의 요구만 하고 적극적으로 나오지 하는가? 이런 속내를 알아야 하잖아요.

 

▲ 김완중 대사는 데이비드 헐리 (His Excellency General the Honourable) 호주 연방총독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주 호주 대한민국 대사로서의 업무를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2023년 2월 8일) ©주호주 대한민국 대사관

 

그래서 제가 페루의 수산업계나 기업들 정부관계자들을 만나서 페루가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고 왜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지 그들의 애로사항을 정리해서 서울 외교본부에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페루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고요.

 

한편으론 그들의 소리도 들어주고 다른 한편으론 우리의 주장도 관철해서 FTA를 빨리 체결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교섭은 물론 한국 본부에서 했지만 현지 사정이나 중간과정에 있어서 현지 대사관이 다리 역할을 함으로써 일을 성사시키게 되어 큰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은 저도 언론에 나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처가에서는 이미 페루 언론에 많이 노출이 돼서 미디어에 나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는데 페루와 FTA가 체결되고 제 장인이 페루의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으로 미디어의 소재도 되니까 계속 부탁이 들어와서 공공외교적 차원에서 방송을 허락한 것입니다.”

자도 기사를 위해 KBS1 TV 인간극장 ‘완중 씨의 페루일지’를 찾아보았다. 그의 젊었을 때의 순박한 모습과 외교관으로 국익을 위해 열심히 뛰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무국적 입양아들의 국적을 회복해 주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가는 편한 사람이다. 그의 아내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시골 사람처럼(실제 그는 함평이 고향인 시골사람이다) 순박한 사람으로 비쳐진 것이 좋았고 그러면서도 당당한 그의 모습에 끌려 결혼을 결심했다고 고백한다.

 

기자도 김완중 대사를 만나 느꼈지만 그의 아내의 묘사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그는 순박한 시골 정서를 가지고 있고 그에게는 친근감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그러면서도 당당한 그의 모습은 상대방에게 더욱 신뢰감을 주게 된다.

 

▲ 호주 연방 총독 관저에서 의장대 사열받는 김완중 대사.©주호주 대한민국 대사관     

 

그는 LA총영사로 있을 때 입양아 가운데 어느 나라 국적도 취득하지 못하고 국제 미아처럼 버려진 입양아들의 인권을 찾아 주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한국 입양아들이 미국인 부모 가정에 입양이 되었지만 여러 이유로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 입양아들이 안타깝게도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 퍼스 킹스공원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김완중 대사(오른쪽 2번째)가 로저 쿡 총리, 한기호 의원(왼쪽,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장)과 환담하고 있다.©크리스찬리뷰     

 

▲ 제막식에서 환영사를 전하는 김완중 대사.©크리스찬리뷰     

 

“미국에만 한국 입양아들이 12만 명이 됩니다. 그 중에서 1만 8천 명 정도가 시민권이 없습니다. 입양을 가다 보면 미국 부모와의 갈등도 있고 입양된 집에서 또 다른 집으로 입양이 되기도 하고 집을 나가기도 하고 범죄에 연루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입양부모와 관계가 끊어진 입양아들이 신분증도 없이 불법체류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냐, 그것도 아닙니다. 남자의 경우에는 18세 이상이면 국방의 의무를 가져야 하는데 이들은 18세가 넘었는데도 한국 군대를 갈 일이 없으니까 병역기피자가 되어 한국에서도 범죄자가 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갖는 것도 요원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외교부 본부에서 국장으로 일할 때 이 문제 때문에 병무청 국장과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해외 입양아는 예외로 한다. 이런 규정을 두어야 한다’, 그랬더니 ‘병역법은 어떤 법보다 특별법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입양아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LA 총영사로 가서 보니 의외로 이런 분들이 많은 거에요. 그래서 그런 분들을 한 분 한 분 우리 외교부, 또 병무청에 건의를 해서 한국 여권을 만들어 주고,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 캔버라 한인회 주최로 열린 삼일절 행사에서 어린이들과 함께한 김완중 대사 부부. © 주호주 대한민국 대사관

 

그분들에게 눈물겨운 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렇게 개별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국의회에 자동시민권, 즉 입양아로서 입증이 되면 자동으로 미국 시민권을 주라는 입법운동을 계속했습니다.

 

제가 LA 총영사로 있는 동안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그리고 네바다 주정부에서 이 결의안을 주정부에서 채택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무원이지만 이런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 큰 보람으로 남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자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흔히들 늘공(늘 공무원의 줄임말)들은 자리만 채우고 시간만 때우려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을 만들어 하면 자신만 피곤하고 그렇다고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니 그냥 타성에 젖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가 얼마나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호주 대사로 오기전 재외동포 영사실장을 역임했다. 재외동포들의 실태에 대해서도 전문가이다. 그리고 올 초 주 호주 대한민국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호주 대사로 오기 전 호주와 한국이 수교를 맺은 지 오래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깊은 관계를 가진 나라였는지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부임하고 나서 보니 한국과 호주는 너무도 중요하고 가까운 나라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한·호 관계가 역사적 전환기에 서있다

 

한·호 양국이 수교를 맺은지 60년이 넘었고, 지난 2021년 양국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 관계로 격상되었다. 주호주 대한민국 대사로 주안점을 가지고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제 한·호 관계가 역사적 전환기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지표를 보면 호주는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세 번째 무역 상대국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60개가 넘는 우리 기업들이 호주에 진출해서 양국 관계, 특히 경제통상 관계를 증진시키고 또 인적 교류도 늘리고 있습니다.

 

▲ 캔버라 한인회 주최로 열린 삼일절 행사에서 어린이들과 함께한 김완중 대사 부부.© 주호주 대한민국 대사관

 

그동안 우리 교역 수입의 60% 이상이 철광, 석탄, 천연가스 등 전통적 에너지 광물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앞으로는 이것을 뛰어넘어 양국의 교역이 그린수소, 그린 암모니아 등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탄소절감 기술협력도 이어지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주에서의 과학협력 분야까지 확대되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야에서 우리 기업이 호주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미·중 갈등으로 인해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 여러 불안요소들이 있는데 호주와 한국이 이러한 부분에서도 중요한 해양 안보적차원에서 파트너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한·호 관계가 외교 안보에 있어서도 실질적 전략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방산분야에서도 한국 기업들의 호주 진출이 눈부시게 늘어나고 있는데 주 호주 대사로서 모든 전방위적 분야에서 한국과 호주의 협력이 늘어나고 이것들을 더 확대시키고 유지해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인간미는 넘치지만 일을 잘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외교관으로서도 전문가이다. 그는 한국과 호주의 관계가 역사적 전환기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이제 양국이 포괄적이고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이 내적, 외적으로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말만 전략적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가 대사로 있는 기간 동안 집중할 것처럼 비쳐졌다.

 

기자는 크리스찬리뷰가 ‘가평 프로젝트’로 호주에 ‘가평길’이 있는 것을 찾아서 특종을 터트리고, 가평길과 가평전투에 참전한 살아 계신 참전용사들의 사진들을 촬영한 가평 사진전을 통해 공공외교에 기여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캔버라에서도 가평 다큐 사진전이 개최되면 좋을 것 같다고 희망했다. 그러자 그는 가평사진전이 대사관의 행사와 함께 진행되면 더 많은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 집무실에서 김완중 대사. ©크리스찬리뷰     

 

꽉 쥔 손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정

 

그의 따뜻한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다 보니 인터뷰가 길어졌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밀려드는 결제 업무와 또 다른 미팅이 잡혀 있어 시간이 없다고 직원들이 재촉해 왔다.

 

그러자 김 대사는 그래도 인터뷰를 위해 멀리서 오신 손님이니 우리가 좀 양보하자고 부드러운 말로 젊은 직원들에게 이해를 구한다. 좋은 리더의 자세를 엿보게 한다. 바쁘게 사진을 촬영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식사라도 대접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며 인사한다. 그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집무실을 나오며 그와 마지막 악수를 나누었다. 기자의 손을 거머쥔 그의 손이 뭔가 아쉬운 듯 한 번 더 기자의 손을 잡는다.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했지만 그의 악수는 뭔가 특이했다.

 

일반적으로 악수를 하면 의미를 담지 않고 형식적으로 손을 내밀고 상대의 손을 쥐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가 기자와 손을 잡고 뭔가 아쉬운 듯, 떼지 않고 다시 한 번 꽉 쥐면서 꽉 잡은 손을 통해 무언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급히 보내게 되어 미안합니다. 식사라도 같이 해야 하는데, 저의 진심을 아시죠. 오늘 인터뷰를 위해 먼 길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쉬운 듯, 쥔 손을 다시 한 번 부여잡는 그의 손을 통해 무언으로 전해지는 그의 온정을 읽을 수 있었다.

 

두 시간 후 시드니를 향해 오는 차 안에서 기자 일행은 그의 전화를 받았다. 무사히 잘 돌아가고 있냐고? 그리고 오늘 점심을 대접하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기자 일행의 안부를 챙긴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해 그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 많은 공직자들을 인터뷰했지만 그만큼 따뜻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가 호주 대사로 있는 동안 어떤 훈훈한 이야기들이 나올지 기대된다.〠

 

글/주경식|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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