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자리에 서야 한다

이명구/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4/04/23 [11:53]

 ©Davide Ragusa     

 

올해의 사순절과 부활절이 지났지만 예수께서 받으신 재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예수님을 체포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먼저 대제사장의 집에 가서 공회를 열고 예수님을 심문한다. 

 

고소자들이 고소할 증거를 얻고자 해도 못 얻다가 대제사장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결정적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그라고 주저 없이 대답하자 어찌 더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하고 사형을 결정한다. 

  

그리고는 그 당시 유대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간다. 빌라도의 판결로 예수님을 사형시키려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근거는 순전히 종교적인 죄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신성 모독죄이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유대종교법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으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 사형을 로마의 권세에 의뢰했다. 

  

로마의 권세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면 당연히 종교적인 죄로는 안 되고, 정치적인 죄여야 한다. 로마는 피지배국들의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종교문제로 사형을 언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세 가지의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소했다. 첫째, 백성을 미혹하고, 둘째 가이사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셋째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고 고소했다. 

  

모든 죄악 밑에는 항상 거짓말이 있다. 성경에 처음 등장해서 사탄이 한 말이 거짓말이다. 첫째, 둘째는 전혀 거짓말이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의 약함을 고쳐주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마귀는 항상 진실을 뒤집는다. 항상 거짓말을 한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핵심 고소는 세 번째였다. 자신을 왕이라고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빌라도가 그 점을 확인 심문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 말이 옳도다.” 하품 나온다. 형편없게 찌그러져 있는 초라한 죄인이 자신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으로부터 유대인의 왕이라는 대답을 들은 후 곧 바로 빌라도는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유대인 무리들은 더욱 소리지른다. “그가 백성을 소동케 했습니다.” 로마가 지배했던 세상에서는 세상을 소동케 하는 것이 가장 큰 죄다. 

  

로마는 그저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기만 하면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소동만큼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제사장 세력들은 예수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켰다고 고소한다. 아주 전략적인 고소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기가 통치하는 지역에서 예수가 소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당연하다. 예수님은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그 판결을 피하려고 했다. 예수가 갈릴리 사람인 걸 빌미로, 그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에게 예수를 떠넘긴다. 

  

한편 헤롯은 예수를 보고 싶어 했는데, 그의 관심은 예수가 일으키는 이적이었다. 헤롯은 그 기회에 이런저런 말로 예수의 이적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때 예수님께서 헤롯왕 앞에서 멋지게 이적을 베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어진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다시 받으면서, “너희들의 고소거리로 이 사람을 심문했으나 그 고소거리에 대해서 이 사람의 죄를 찾지 못했다. 

  

헤롯도 그렇기 때문에 이 자를 다시 나에게 보냈다. 이 사람은 죽을 일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때린 후 석방하겠다”라고 한다. 그러자 대제사장 세력들과 무리들은 일제히 소리 지른다.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자였다. 빌라도는 예수 처형을 피하려고 바라바 카드를 제시하고 바라바를 대신 처형하자고 거듭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리들이 소리를 지른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세 번이나 군중들의 뜻을 묻는다. 그러나, 무리들의 소리가 빌라도를 이긴다. 빌라도는 군중들이 하자는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눅 23:25).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하다(innocent)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아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유죄(guilty)로 판결하고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내렸다.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무리 앞에 굴복한 것이다.  

 

빌라도의 자리에 서야 한다. 그는 진실을 버리고 군중들을 선택했다. 물론, 정치적 입지가 별로 좋지 않은 그가 다스리는 지역의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난리를 일으키면 쫓겨날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있다. 그래서 빌라도는 억울한가?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진실을 버리고, 군중들을 택한 죄악은 작지 않다. 빌라도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버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시대가 발전하고 교양이 높아지면 이런 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를 해왔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전혀 환상인 것을 깨닫는다. 현대인들은 이전 사람들보다 더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인 우리는 믿음 때문에 나는 심판을 받는 자리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고 있는 예수님의 자리에 나도 언젠가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빌라도의 재판의 경우라면 반대로 되어야 한다. 

  

빌라도의 심판을 받고 있는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심판하고 있던 빌라도의 자리에 내가 서야 한다. 빌라도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심판하는 자리에 내가 서야 한다. 그때,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심판하는가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받는 심판이 된다. 

  

그때 가장 큰 걸림돌은 빌라도가 만났듯이 지금도 군중들이다. 성난 군중들이 소리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판결하면 나는 죄인이다. 그 자리에서 내가 예수님을 의인으로 판결하면 나는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이명구|시드니영락교회 담임목사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