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6)

번역 | 홍은희ㆍ정의경/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12/03 [16:08]
제5장 말씀을 넘어선 성결

1930년대의 이슈: 무흠론

 
1930년대 시드니의 일부 복음주의지도자들은 기독교대학생회(IVF), 시드니대복음주의연맹(SUEU: Sydney University Evangelical Union)같은 단체를 통해서 ‘무흠론’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무흠론이란 믿는 자는 성령을 체험하는 순간, 죄가 근절되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교리다.

추종자들은 무흠론을 때때로 ‘완전한 성화’, ‘최상의 구원’, ‘완전한 사랑’, ‘빛 가운데 걷는 것’. ‘성령 안에서 걷는 것’과 같이 표현했다. 이 가르침은 복음단체를 분리를 가져오고, 완전주의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이 때문에 결혼이 깨어지고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정신이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기독교 역사에서도 발견되는데, ‘반율법주의’로 알려져 있는 이단이 바로 그것이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예수의 피로써 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도덕적 법에 의해 구속 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며 도덕적인 법과 징벌이 적용되지 않다고 가르쳤다. 반율법주의는 칭의(구원 받은 것)와 성화(구원후 거룩해지는 것)를 왜곡했다. 이들은 예수의 보혈을 통과 한 사람은 죄의 벌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예수의 피가 믿는 자들의 죄를 완전히 근절 할 수 있으므로 믿는 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19세기의 성결운동의 탈선이고 복음주의의 어설픈 모방이었으며 잘못된 부흥운동의 결과였다. 말씀으로 점검되지 않은 체, 현실과 소통이 끝긴 체 성령교리가 온실 속에서 과보호를 받아 나타난 성장이었다. 복음의 체계를 이루는 3가지 통합요소, 성령, 말씀 그리고 세상이 서로 분리될 때 일어났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현대 완전주의 뿌리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온전함’의 결과 ‘완전한 성화’를 얻을 수 있다는 존 웨슬리의 가르침에 있었다. 그러나 웨슬리가 강조한 완전한 성화란 우리의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19세기 말 미국, 영국, 호주를 휩쓴 케직 운동은 웨슬리주의를 거부하며 이생에서 죄가 근절될 수 있다는 사상을 비판했다. 그러나 웨슬리파나 케직 운동 모두 더 큰 성결을 향한 추구를 강조했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시드니의 무흠운동은 다른 그리스도인과 연대까지 부정했다. 무흠론 운동은 결혼을 통하여 이어진 여섯 가족과 관련이 깊다. 타즈매니아 오트랜즈 웨이벌리의 애그뉴 가족, 시드니의 그란트 가족, 뉴질랜드의 덱 가족, 멜본의 그리프스 가족, 멜본의 닐가족, 식민지 설탕 제련소를 통하여 부를 만든 융 가족이다. 여기서 애그뉴 가족이 기폭제 역할을 한다.

헨리 융 (시드니 앵글리칸 신학자 브로톤 녹스의 증조할아버지)은 플리머스 형제단이 되었고, 형제단출신의 세대주의 신학자 J. N 다비의 영향을 받았다. 이 말세적 복음주의는 1909년 출간된 스코필드 성경을 통해 퍼졌고, 개신교 종말론자들사이에게 인기가 있었다. 융 가의 재림에 대한 긴박한 의식은 그들을 열렬한 복음주의자로 만들었고 3장에서 살펴 본 남태평양 선교회원으로서 활동했다. 

플로런스는 케직에 큰 영향을 받았었다. 1904년 설립된 카툼바 컨벤션이 카툼바에 있는 그녀 형제 집에서 열렸다. 융가는 전천년설 불길에 케직 핵심을 더해 수년 동안 카툼바 컨벤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융가의 전천년설 사상은 덱 가족에 의해 강화되었다. 그들 역시 플리머스 형제단이었는데 뉴질랜드로 이민해서 남태평양 선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들은 사촌 린드세이 그란트가 이끄는 무흠론 운동에 적극으로 참여했다. 그밖에도 결혼 등을 통해 계속 퍼져나간 이들의 영향은 인종주의 같은 다양한 요소가 첨가되었다. 결국 시드니 그룹은 델과 함께 사이비 집단이 되었다.

 
 사건들

1920년대와 1930년대 장로교주의를 깨뜨린 자유주의 논쟁은 보수주의와 자유주로 교회를 나누었다. 그란트가족은 시드니 애쉬필드장로교회 소속으로 자유주의 선봉이었던 사무엘 앵거스를 공격하는 데 최전선에 있었다. 그란트가와 합류한 이들로는 알란과 부루스 브라이슨이 있었는데 그들의 부모는 아프리카 내륙선교회를 섬기는 선교사였다. 

1930년 하워드 기니스가 기독학생회를 설립하기 위해 호주를 방문 했을 때, 브라이슨 형제를 방문했고, 이들은 시드니 복음주의, 형제단 신학을 잘 조화시킨 지도자로 자리를 매겨나갔다.

1930년대는 복음주의의 확장 시대였다. 특히 복음주의연맹, 기독학생회 등이 그 역할을 했다. 1932년 데이비드 그란트, 젝 덱, 네빌 바비지, 찰스 벨링헴, 켐벨 벅비, 부르스 브라이슨, 폴 화이트들이 그 지도자들로, 이들 모두 시드니 복음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1930년대를 주름잡던 학생지도자들의 열정을 볼 때, 이들 사이에 영적 완벽주의인 무흠론이 뿌리를 내린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1938년 새로 발간된 복음 간행물 ‘더 에디화이어’에 ‘영원한 성화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알란 닐이 기사를 실었다. 웨슬리의 성화론 대신, 닐은 ‘최상의 구원과 온전한 성화의 필요’를 주장했다. 이 기사는 큰 반발을 일으켰다. 멜본성경연구원(BCV의 전신)의 C.H 내쉬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성령에 대한 기사를 연재했다. 내쉬는 닐의 영적인 잠재력을 보고 그를 권면하는 쪽을 선택했다. 결국 알란과 로널드는 사임했다. 훌륭한 신학자 놀만 덱의로마서 7장 주석에 설득된 카툼바 운영위도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는 결단을 내렸다.

1939년 시드니대 복음주의연맹도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무흠론자들의 영향력을 제거했다. 위원회 사임자가 신임자를 천거하는 관습에 따라 1938~1939년 동안 위원회에 의해 천거된 7명 중 5명이 완전주의 입장이었다. 1940년 총회에는 86명이 참석했고, 완전주의자들은 조작시도에 불구하고 완패했다. 존 헤르커스가 알란 레인을 66대 20으로 이겨서 대표가 되었고 도날드 로빈슨이 필립을 65대 21로 이겼다.

완전주의는 점점 자기 안에 갖혀 고립되었다. 사실상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단체들은 완전주의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았다. 뉴질랜드 출신 베이질 윌리암스는 1944년 기독학생회의 간사로서 완전주의와 적극적으로 싸웠고, 완전주의자들은 오랜 친구들로부터 제명되었다.

시드니의 완전주의는 성결에 대한 갈망, 명문가의 자부심, 개인주의, 여성과 평신도 역할의 강조, 델 애그뉴와 린드세이 그란트와 같은 강력한 지도력이 혼합되어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었고, 곧 그 영향력도 사라져갔다.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은 기독학생회에서 완전주의를 완전히 몰아내는 도움이 되었다. 전쟁기간 중 여행을 제한한 정부정책은 그 운동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한편 시드니에서는 완전주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어쨌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들어서서 젊은이들은 체험적 신앙을 더 갈망했다. 성공회선교회(CMS) 선교사 헬렌 놀스는 호주로 돌아와 바킷 씽을 소개했다. 그의 성결론은 아너 오크운동과 워치맨 니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쿠링가이 형제단교회에서 커져갔다. 성공회목사인 른 에보트는 ‘정통기독교가 진실을 철저하게 선포’하지 않는 한, 완전주의는 계속 퍼져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완전주의는 복음주의의 삼대요소인 말씀, 성령, 세계 중에서 말씀연구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켜 말씀의 요소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완전주의는 체험에 대한 강조로 성령적 요소의 건강한 균형을 깨버렸다. 결국 정통복음주의자들은 성결에 대한 열망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을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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