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장수 목회’에 꿈을 싣고

글|송기태,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2/28 [12:18]
엔도르핀 에너지의 작은 거인

한국의 차세대 기독교 리더로 급부상하고 있는 소강석 목사, 그는 작은 거인이었다. 크지 않은 체구에 온몸에서 엔도르핀 에너지가 팡팡 터질 것 같은 인상이다. ‘맨발의 소명자’라는 책 제목처럼 그의 맨주먹 맨몸으로 맨땅에 헤딩하며 끝없이 펼쳐진 ‘소명의 마라톤’을 앞만 보고 질주했다.
 
 
▲  새에덴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시인이자 목회자인 소강석 목사가 오세아니아성령대성회 집회 인도차 시드니를 방문,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를 탄 사람처럼, 아니 떨어지면 죽는 호랑이 등에 탄 사람처럼 생사를 걸고 한 길을 달렸다. 프로선수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비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가 달려온 길은 호랑이도 자전거도 아닌 전혀 뜻밖에 ‘엿장수’였다.

 “어릴 때 가위를 철커덕거리며 다니는 엿장수를 보니 재미있어요. 돈은 안 받고 떨어진 고무신, 고철, 헌책, 뭐 이런 폐품 쓰레기만 받고도 달콤한 엿을 넉넉하게 떼어주더군요. 심지어 머리빗 다 빠진 머리카락 뭉치까지 갖다 줘도 사탕이나 엿 아니면 비누 같은 조그만 생필품을 주는 것을 봤습니다. 죄송스런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꼭 엿장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습니까? 신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겉은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지만, 내면에는 우울과 근심과 염려와 걱정밖에 없습니다. 목회는 그런 것을 잘 감싸주고 어루만져주는 소위 ‘마사지 목회’도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시한폭탄입니다. 겉으로는 믿음 있는 것처럼 마스크 쓰고 있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거든요.

저는 ‘엿장수 목회’를 합니다. 내면의 염려 보따리 다 십자가 앞에 쏟도록 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죄악의 보따리, 인생을 살아가다 생겨나는 온갖 폐품 쓰레기를 다 가져와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달콤한 복음을 받아갈 때 평안하지요. 엿장수 복음!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마사지가 아닌 엿장수 복음이 무한한 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엿장수 목회’는 다른 말로 하면, ‘섬기는 목회’이다. 온갖 더럽고 추악한 폐품 고물 덩어리를 가져와도 오히려 그런 것을 환영하며, 자기가 갖고 있던 엿과 생필품으로 바꿔주는 엿장수 같은 마음을 목사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목회자가 먼저 흉허물을 내어놓고, 성도들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며 복음으로 치유할 수 있을 때 목회의 첫걸음이 뗄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 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의하는 소강석 목사     ©크리스찬리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성안에서 자기 자신을 감추고 삽니다. 물론 어느 정도 신비감을 가릴 수 있는 베일은 있어야 하지만 그런 리더십은 아주 힘듭니다. 조그만 핸디캡이 발견되면 그냥 한꺼번에 무너지기 쉽습니다. 엿장수 목회는 서번트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건 형식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먼저 낮은 자리에서 복음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과 복음의 권세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위치도 역으로 더 높아집니다.”

 
불타는 개척자

이런 ‘엿장수 정신’ 즉 서번트 리더십으로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렇다고 장차 ‘챔피언감’으로 훈련받고 도전장을 내민 것도 아니다. 흔히 신학교에서 말하는 끌어주고 밀어줄 만한 성골(대형교회 인맥), 진골(중형교회 인맥)도 없었기에 그런 훈련을 받을 기회는 아주 없었다. 결국 오라는 데는 없고, 가진 돈도 없던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이자, 서울 올림픽의 해이기도 한 88년, 28세 된 소강석은 목사 타이틀도 없이 ‘전도사’ 타이틀로 1,800만 원 보증금에 38만 원 월세로 서울 가락동 지하점포 속으로 들어갔다. 개척 멤버 없이 ‘전도사 목회자’ ‘지하실 교회’ 등 교회가 안될 요소만 고루고루 갖춘 터였다.

 “때가 되어도 저는 부목사 연수를 한 번도 못했던 사람입니다. 누가 저를 부교역자로 써주는 사람이 없었던 서러웠던 계절이었습니다. 여러 군데 지원했지만 오라는 데는 없었습니다. 누가 끌어주고 당겨주고 보증을 해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직 제가 갈 길은 교회 개척밖에 없었습니다. 23평 지하에서 말입니다.

당시 쥐들이 우글거리고, 비가 오면 물이 줄줄 새어 물을 퍼올려야 했던 조그만 장소였습니다. 첫 예배를 드렸는데, 건물 주인과 간판집 주인이 인사차 참석했고, 아내와 장모 이렇게 달랑 넷이었습니다. 우리 가족만 모였던 저녁에는 쥐가 찍찍 소리를 내며 오가곤 했습니다. 그래도 양손에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어음 신용장을 들고, 가슴에는 불타는 영롱한 비전을 꿈꾸며 28살의 젊은 개척자, 프런티어 정신으로 도전했습니다.”


 
▲ 한국교회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고 있는 소강석 목사가 지난 해 한국교회 8.15대성회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국민일보


그때 그는 ‘여기서 실패하면 내 인생은 영원히 끝나고 실패한다’는 각오로 도전했다고 한다.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소위 끌어주는 밧줄도 끄나풀도 없던 그에게 도시 교회 목회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날마다 시행착오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설교도 전투기처럼 쌩쌩 날아다니며 마구잡이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융단폭격을 해댔다. 현대인의 심성과 상처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그저 일방적으로 쏘아대고 펑펑 터뜨리는 폭격기 같은 설교를 쏟아냈다고 회고했다.

 “희한한 것은 그래도 사람이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열정과 생명력이 성도들에게 전염된 것 같습니다. 그때 저에게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뜨거운 열정, 소명에 불타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이 주인 되신다는 목회 인프라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토요일마다 설교 리허설을 하고 나서 의자를 붙잡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서 빈 의자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이 자리에 앉는 성도들 정말 풍성한 은혜를 받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다 보면 눈물이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요.

그 당시 어떤 선배 목사님이 그래요. ‘소 전도사, 하나님께 순한 양들 보내 달라고 기도하게. 개척교회 때 악한 염소가 들어오면 목회자가 피가 말라 죽는다네’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 선배 목사님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지만 우선 사람이 그리워 죽겠는데 순한 양, 악한 염소를 가린다는 것은 사치스런 생각이지요.

그때는 지나가는 거지가 앉았다만 가도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여, 악한 염소도 좋습니다. 양이든, 염소든 그저 많이만 보내주십시오. 까짓것 염소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양으로 변화시키면 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몇 날을 기도했더니 정말 모난 염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개척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상처받고 문제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려고 할 때도 무릎 꿇고 빌었습니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바로 ‘가지 마오~ 가지 마오~ 나를 두고 가지를 마오~’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일꾼 되고 전도사가 되기도 하는 거예요.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나 봅니다. 그 이후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며, 신화적인 스토리가 쌓여가는 겁니다.”

 
엿장수에서 샐러드로

그는 개척 때부터 로드십(Lordship)과 신정주의를 목회철학으로 삼았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비전으로 사람들의 맨파워를 끌어내는 사람이 목회자라는 것이 그의 목회자상이었다. 또한 목회는 ‘본질 경영’이고 ‘원칙 경영’이란 면에서도 분명했다. 목회의 현장에 목회를 핸들링하는 분은 성령이 되시도록 하는 원칙이 그의 목회 철학 1조였다.

“주님이 주인이 되는 목회, 제 개인의 신앙에서도 주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철칙을 삼았습니다. 교회에서 조직상으로는 제가 당회장이지만, ‘하나님이 당회장이고 나는 부목사’라는 의식을 성도들에게 저는 물론이고 성도들에게도 주입시켰습니다. 물론 인간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약간의 의견 차이는 있지만 교회의 근간이 되는 인프라를 흔드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개척교회 때는 첩첩산중으로 어려운 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건들, 말도 통하지 않을 만큼 실수도 많았다. 사람을 잘 믿고 귀가 얇아 돈을 잘 떼이기도 했다. 그렇게 목회를 배워갔다.

 “교회는 항상 고비고비가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함께 하셨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신화적이고, 신비적인 스토리, 이를테면 어떤 환자가 일어난다든지, 신비한 기적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놀라운 일들이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면, 100명에서 200명, 400명 그리고 1천 명으로 불어나는 목회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 목회 이전에 하나님의 목회’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교역자 경험이 없지만 책을 통해서, 그리고 제 목회 현장의 임상을 통해서 제 나름대로 목회학과 교회성장학이 제 안에서 체계화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목회는 ‘엿장수 목회’에서 ‘용광로 목회’로, ‘샐러드 목회’와 ‘용광로 목회’의 병행으로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으며 ‘명품 목회’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서로 마음을 합하면 같은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는 먼저 상처받은 심령, 아픈 마음을 치유해야 합니다. 교회개척하면 교인들이 상처받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지만 그것을 포용하며,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큰 힘이고 무기입니다.

이건 엿장수 목회입니다. 그렇게 엿장수로서 모아온 고철들을 용광로 안에 집어넣어 불순물을 다 뽑아내고 동일한 비전과 꿈을 꾸는 정체성이 분명한 예수님의 명품 제자로 거듭나게 합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지요. 각 성도들이 가진 은사와 개성과 재능을 다 인정하며 그들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 ‘샐러드 목회’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샐러드는 각기 다른 다양한 야채들을 드레싱하여 조화를 이루며 전혀 다른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샐러드 목회를 하면서 그는 개개인의 은사와 장점, 약점과 단점을 서로 인정하며 봉사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연약한 것을 비방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한다. 위로와 격려와 칭찬을 하며, 현대인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며 사역과 봉사를 통해 ‘성취와 감동’을 맛보게 한다.

 
▲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에 자리잡고 있는 새에덴교회 성전은 5천여 명을 수용한다.     ©크리스찬리뷰


 “목회는 비전을 성취하도록 독려하는 ‘비전경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방향을 보며, 소명감이 분명해야 하고, 동일한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절대로 싸우면 안됩니다. 상처받은 심령을 치유하고 큰 비전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비전을 성도들에게 증여하고 공유해야 합니다.

또 목회는 ‘감동경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부시와 경쟁할 때 클린턴은 ‘나는 아버지 없이 자랐습니다. 나처럼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했을 때 사람들이 감동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만, 행동은 감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형식적으로 목회한 적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감성적입니다. 80년대까지는 외국에서 박사학위 받아왔다면 그 자체로도 설교에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는 아무리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박식하게 안다 해도 교인들 스스로 느낌이 없고, 감동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감성이 중요합니다.”

 
목회는 ‘감동경영’

그는 목회 현장에서 감동은 설교와 서번트 리더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진단했다. 특히 ‘웅변형, 속사포’형인 그의 설교 스타일에서 21세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과감하게 변화를 시도했다.

 “2011년도 언어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수필집, 영화를 보며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간증과 이야기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간증과 이야기의 힘은 놀랍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스토리(이야기) 경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영에 이야기가 없고, 간증이 없으면 감동을 못줍니다. 이야기가 있고, 스토리가 있는 교회는 역설적이지만 ‘사교문화’가 형성됩니다. 이단 비슷한 교회, 독재, 사이비문화 같은 문화가 형성됩니다.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만큼 열광한다는 뜻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말입니다. 사교문화를 보십시오. 영상이 잘 돼있고, 항상 대표기도 끝나면 간증이 뜨고, 마니아층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 설교 비평가가 ‘한국교회 설교는 다 나열형이다’라고 한데 주목하고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강의를 위한 강의인가? 이야기를 잘하는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부터, 성경을 오늘의 이야기로, 신학적 구조 분석에서 문학적 분석을 하고, ‘거룩한 전쟁’을 쉽게 풀어 이야기하는 게 목회자의 과제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의미 깊은 말을 했다.

▲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평화음악회에서 합창하는 참석자들(미국 레리 그랜트 총재, 호주기독민주당 프레드 나일 총재, 한국 김영진 의원, 소강석 목사, 일본 도이 류이지 의원(오른쪽부터)    ©크리스찬리뷰


 “옛날 밤중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주변에 모인 것은 화롯가에서 엿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으려고 모인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가 원시 경영설교에서 소위 ‘아트 스피치’로 변해야 하는데, 현대 설교가 거의 주입식이고 웅변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 점에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있다.

“광야의 외치는 설교는 안 들으려고 합니다. 저는 웅변을 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오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리 안 지르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데, 한 20분 지나면 소리칩니다. 다 자라난 배경입니다. 책망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죄도 책망할 때 일방적으로 웅변처럼 하면 무겁게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부족함과 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것처럼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감성터치 설교는 내러티브 설교, ‘이야기식 설교’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음악적으로 흘러나가야 합니다. 이런 걸 현대인이 요구합니다. 솔직히 저는 35~40%가 아트 쪽이고, 55~60%는 웅변적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부흥사는 ‘광야형 설교’는 잘하는데 상처입은 현대인에겐 부족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목회자의 감동경영 견인차로 ‘신뢰’와 ‘도덕성’을 들었다.

 “신뢰로 서로의 관계를 견고히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커도 신뢰가 없으면 안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작아도 신뢰가 있으면 됩니다. 배 13척과 군사 9명으로 전라도 지방에서 이순신 장군이 할 수 있다고 깃발을 들었을 때 흩어졌던 군사들이 다 모이지 않았습니까? ‘누가 하느냐’에 따라 모인다는 것은 신뢰의 문제입니다. 인격과 개인의 명예보다 공동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교회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분들도 6개월만 교육 안하고 놔두면 반란을 일으키고 반항하고 싶은 본능이 생깁니다. 어느 교인이든지 다 위기는 옵니다. 아무리 은혜로워도 신앙의 방향은 선악 중심으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중심이 생명이 되게 하고, 십자가를 경험하게 하는 훈련을 하는 ‘십자가 경영’이 필수적입니다. 목회가 영적전쟁이기 때문에 위기상황에서 갈등 처리를 잘해야 합니다. 이 어려운 때를 잘 끌어갈 수 있는 견인차는 서로 신뢰가 형성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그는 감동의 리더십이 형성되는 요인으로, 흔히 말하는 ‘혼창통’으로 서로 소통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포용하고, 전략적으로 해결하는 것 등을 들었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잘해주되, 서먹서먹한 사람에겐 더잘해주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생명나무 목회

소 목사는 새에덴교회의 독특한 목회 브랜드로 ‘생명나무 목회’를 들었다. 성도들이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겠지만 특히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에 대하여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 새에덴교회에서 열린 PPP대행진 기념예배및 평화통일 음악회를 마친 후 참가자들의 기념촬영     ©크리스찬리뷰


 “요즘 목사님들의 절대 다수가 윤리적 도덕적 설교에 주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또 필요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윤리적 도덕적 메시지를 많이 전하다 보니 성도들에게는 선악의 개념이 발달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소란과 분쟁이 휘말리면 꼭 선악의 마인드로 재단하며,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비방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선악 위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속에 있는 신앙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이 두 나무의 사건은 창세기 2장과 3장의 사건으로 이미 종결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의 빛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탄은 계속해서 선악과 사건으로 패러다임으로 오늘도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공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기원인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구약의 배경과 언어를 통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신앙의 본성의 판을 새롭게 짜야 합니다. 성도들이 선악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생명나무 신앙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그의 목회에서 핵심가치라고 할 수 있다. 개척 때부터 그는 ‘생명나무 신앙’으로 18주 과정의 ‘생명나무학교’를 개설하여 교인들을 양육하고 훈련해오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담임목사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교회가 분열되거나 다툼 없이, 생명나무를 선택하는 일원화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경험한다고 전했다.

이 ‘생명나무학교’는 작년에 LA에서 목회 프로그램 세미나를 했고, 다가오는 5월에는 유럽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넘어 이게 진짜 생명이냐 아니냐의 근원적인 질문에서 사생결단하는 목회 핵심가치이기도 하다. 그의 결론은 이랬다.

 “생명으로 충만하면 선악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성도들로 하여금 생명의 패러다임, 그 가슴에서 깊은 곳에서 언제나 생명이 흘러넘치도록 하는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소망이 충만했다.

이렇게 잘 정리된 목회론을 갖기까지 그는 이른바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 처절한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삶의 궤적을 추적할 필요를 느낀다.

 
대단히 불순한 동기라도

그는 전북 성춘향의 고향이 전북 남원에서 대대로 ‘꼿꼿한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던 유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서당에서 선생을 할 정도로 엄격한 한학자였다. 부전자전이라 그의 큰 형은 초등학교 때부터 회초리로 그를 다듬어가기 시작했다. 그 형 밑에서 공부를 배우고, 웅변을 배우고, 글짓기를 배웠는데, 이런 것들이 나중에 그의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  2박 3일 일정으로 시드니를 방문한 소강석 목사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4년여 만에 프레드 나일 의원과 반가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그만큼 그의 성장환경은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는 가정에서 전도 대신 양반 교육을, 예수님 대신 공맹을 배우며 자랐다. 고등학교를 군산으로 진학하면서 그에겐 호랑이 같은 형을 벗어나는 듯했는데, 새로운 ‘큰 형님’을 만나는 계기를 만났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동기 한 명과 1년 후배가 교회에는 예쁜 여학생이 많고, 나오기만 하면 저에게 소개시켜 준다고 하며 저를 자꾸 꼬드겼습니다. 저는 외로운 마음에 친구와 후배가 예쁜 여학생 보러 가자고 하여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습니다.

예쁜 여학생 만나러 갔다가 예수님께 코 꿰었지요. 그래서 저는 비록 교회 출석 동기가 불손하더라고 다 받아줍니다. 제가 그렇게 예수님 믿었으니 말입니다. 장사하러 오는 사람, 선거 때 표 얻으러 오는 사람 ……. 뭐 다양합니다. 그래도 다 받아줍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좋은 사람들 많이 얻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그는 예쁜 여학생 대신 예수님과 ‘불같은 첫사랑’이 이루어졌다. 뜨거운 사랑에 못 이겨 얼마나 찬송을 많이 불렀는지 한 달 만에 100곡이나 암송할 정도였다. 특히 고등부 여름수련회 때 흔히 말하는 ‘불을 받아’ 모든 공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했다.

 “학교가 특수반 만들어 놓고 일류 학교 입학시키는데 목매고 있었던 만큼 주일에 기숙사에서 교회 가는 게 허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뵈는 게 없을 만큼 교회에 푹 빠졌습니다. 주일에 교회가면 저녁에 들어왔고, 수요예배, 금요구역예배까지 다닐 정도로 소위 ‘광신자’라 할 만큼 미쳤습니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회장을 하면서 기숙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때부터 저에게 ‘목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고3 여름방학 때, 친구들은 대학시험으로 촌음을 아껴 쓰는 판에 그는 유유히 교회 수련회를 떠났다. 수련회장이었던 용화산 기도원에서 친구들이 방언을 받는 것을 보았다. 그도 방언을 사모하던 중 새벽 두시 쯤 캄캄 기도굴에서 뜨거운 태양빛보다 더 눈부신 빛이 들어오는 듯하더니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음성이 들렸다. 상상의 소리도 아닌 분명한 음성이었다.

 ‘사랑하는 종아! 모세를 부른 것처럼 이 빛 가운데로 너를 부르노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크게 쓰리라’

기쁨과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혀가 구르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방언이 터져나왔다. 참으로 신비하고 이해하기 힘든 영적 체험을 하면서 그는 ‘목회자’로 징집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한복을 입은 프레드 나일 목사가 소강석 목사에게 감사패를 전했다.     ©크리스찬리뷰


그러나 이 거룩한 소명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골수 유교 가문으로 긍지가 대단한 집안의 거센 반대는 예정된 코스였다. 부친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소명의 출발, 고생의 시작

 “아버지께서는 분을 못 이기셨습니다. ‘자식이 예수 믿는 것도 못마땅한데 목사가 되겠다니. 우리 가문에 무슨 저주란 말인가. 그렇게 밥 먹고 살 직업이 없어서 하필 내 자식이 목사가 되려고 하다니’하며 걸핏하면 몽둥이로 저를 찜질했고, 메주를 달아놓는 곳에 저를 묶어 매달아놓고 매질을 했습니다. 어머니, 형 모두가 때로는 협박을, 때로는 회유를 했지만 저의 소명을 아무리 설명해도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어느 추운 겨울 눈보라가 세차게 내리치던 밤, 매를 맞다가 ‘나가 이놈아! 우리 집안에 너 같은 놈은 자식으로 둘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엉겁결에 집을 뛰쳐나왔다. 몸을 추스르고 보니 내의도, 양말도 없이 봄 점퍼 하나에 성경 찬송만 가지고 있었다. 단돈 10원도 없었다. 한참을 걷다가 다리 위에서 펼쳐본 말씀이 시편 121편이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그리고 부르짖었다.

 “하나님! 저는 정말 하나님 편에 서왔습니다. 이 어린 출부지가 하나님 뜻만 좇아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니 제게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주시고, 오대양 육대주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는 세계적인 종이 되게 하소서”

울먹이며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되고, 감격과 서러움이 혼합된 4중주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절묘한 것은 도중에 만난 중학교 동창인 친구가 군산 갈 차비를 주는 것이었다.

군산으로 온 그는 신앙의 모태인 명석교회에 허락을 맡고 숙소로 정했다. 그리고 부흥회 하는 교회들을 좇아다니며 일주일씩 자기도 했다. 그러나 밥을 주는 곳은 없었다. 낮에는 성경 읽고 밤에는 기도했지만 배고픈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일주일씩 굶으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배가 고프니 더 추웠다.

그의 사정을 아는 교회 집사들이 데려다가 한두 끼씩 대접했지만 그것도 미안했다. 그래서 익산에 있는 친구집으로 갔다가 그것도 미안해 다시 교회로 오기도 했다.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자유롭고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외로운 집시생활을 하다 어느 날 우연히(사실은 성령님의 인도로) 생전에 가보지도 못한 광주로 가게 됐고, 그곳에서 광주신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박종삼 교장 선생님을 만나 제 이야기를 드렸더니, ‘만일 자네가 시험을 쳐서 1등으로 합격하면 하나님 뜻인 줄 알고 내가 자네를 믿음의 아들로 삼고 자네를 키워보겠네’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입학한 신학교에서 제 목회의 평생 은인이신 장모님 정금성 권사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제 목회의 잊을 수 없는 동역자 문정남 장로님과 김현숙 권사님 내외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스런 역사로 그곳에서 꼭 필요한 분들을 만난 것입니다.”

▲ 프레드 나일 의원와 소강석 목사의 만남의 자리에 함께 한 한인교계 인사들.(왼쪽부터 김환기 사관, 프레드 나일 의원, 고동식 장로, 소강석 목사, 송기태 목사)     ©크리스찬리뷰


장학금으로 학비는 해결되었지만 생계 대책은 전혀 서있지 않았다. 기숙사비도 없었고, 식권 살 돈도 없었다. 이때 그를 믿음의 아들로 삼아준 박종삼 교장과 전남 여전도회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밥은 굶어도 책은 사봤다. 그러니 밥값은 책값으로 들어가고 역시 굶기를 밥먹듯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비록 굶으며 새우잠을 자도 고래꿈을 꾸었다.

 “하루도 꿈 없이 잠든 적이 없고, 하루도 꿈 없이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꿈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 시절 배가 고파 등이 허리에 닿을 정도가 되어도 누구 하나 사랑의 손길 하나 주지 않았지만, 비록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수박 오이 장사를 하고, 방학 때는 노가다 질통을 지고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그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불러주셨던 소명과 약속에 근거하여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하루도 저를 안일하게 한 적이 없었고, 그 꿈을 꾸며 나태한 적도 없습니다. 그 어려운 시절을 넘기면서 항상 도전적인 신앙, 적극적인 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등산 기도원에 올라가면 많은 소나무와 잡목들처럼 저의 성도들이 이 나무들처럼 몰려올 것을 그려보며 막대기를 마이크처럼 들고 잡고 말씀 전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신학교에서 장학금 받아야 하니 기도와 더불어 학업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철야기도를 해서 졸릴 때마다 학교에서 ‘하나님 저 이러면 장학금 못 받습니다’하며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어쨌든 4년 내내 장학금 받고 다녔습니다. 그때 무릎 꿇고 기도하고 공부한 것이 오늘의 제가 있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다

신학교 내내 고학을 하던 중 3학년 때 아주 텃세가 심한 화순군 300호 되는 어느 벽촌에 들어가 교회 개척을 했다. 몇 해 동안 비어있던 헛간을 빌려 예배당으로 쓰면서, 겨울방학 내내 축호전도를 했다. 환자가 있으면 정성껏 기도하니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교회를 지을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의 분위기가 확 바뀌고 무서운 핍박이 일어났다.


 
▲ 인터뷰 중인 소강석 목사     ©크리스찬리뷰


조그만 전도사 녀석이 들어와 동네 사람들 꾀어 제사를 못 지내게 하고, 마을 전통을 못 지키게 한다는 이유였다. 더 큰 이유는 마을 한가운데 교회를 지으면 그 마을의 복이 떠난다는 것이었다. 마을 유지들이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하여, 교회 나가면 1만 원씩 벌금내고, 자진해서 내지 않으면 12,000원씩 내야하며, 교인 집에서 일해준 사람도 1만 원을 내며, 이를 신고한 사람은 상금 6천 원을 주며, 만일 교회에 땅을 파는 자는 아예 마을에서 추방한다는 기상천외한 결정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밤마다 마을 청년들이 와서 오물을 뿌리고, 천막교회에 화약을 던져 구멍이 나게 했고, 차임벨 줄까지 끊어버렸습니다. 어떤 때는 수십 명씩 술을 먹고 와서 저의 멱살을 잡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반상회 때마다 교회 몰아내기 의논을 하는 겁니다. 저녁예배 마치고 가는 여성도들의 머리채를 잡고 구타하기도 하여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마을 유지들이 승려와 무당을 데려다 절과 무당집을 지어주고는 마을 차원의 종교행사까지 하면서 교회를 방해해요. 분위기가 이러니 교회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교인들이 썰물처럼 싹 빠져나가요.”

이쯤 되면 물러날 만도 한데 그는 주특기인 기도에 들어갔다. 무등산 헐몬수양관으로 들어가 울부짖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쳐 바위를 깨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처럼!

 “아무리 기도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저도 얼마나 지쳤던지 ‘주동자 셋만 하나님께서 적당히 손봐 주십시오’하고 기도드렸는데, 교회 오면 더 기세 당당히 버티고 서있는 거예요. 이렇게 3년 반을 지나는데 어느 날, 이 풀무불의 시련이 끝나고 이 교회를 지을 뿐만 아니라 장차 더 큰 교회도 지을 것이라는 응답이 왔어요.

어느 날 한 여인이 찾아왔어요, 이 여인의 사연은 너무 기막혔습니다. 두 딸이 먼저 죽었는데, 이 딸들이 귀신이 되어 그 여인에게 들어왔다는 겁니다. 두 딸이 밤마다 나타나 엄마가 점 상을 받으면 대한민국 제일가는 점쟁이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요. 그리고 이 여인의 눈에도 다른 사람의 미래와 과거와 운명이 보여 도저히 괴로워 살 수가 없어 도시에 나가 점 상을 받고, 유명한 무당을 찾아다녔지만 신이 내리지 않았답니다.

그러다가 아랫마을에 사는 아주 유명한 무당을 찾아갔답니다. 그때가 제가 저녁마다 산에 가서 기도할 땐데, 그 무당 말이 희한해요. ‘나는 너를 무당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그런데 네가 영특한 무당이 되어도 네 병은 안 낫는다. 그러니 병도 고치고, 무당도 안되려면 교회로 가거라. 저 윗동네에 교회가 있으니 거기 가서 고침을 받으라’고 해서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 시드니순복음교회에서 열린 오세아니아성령대성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소강석 목사.     ©크리스찬리뷰


한 마디로 무당이 전도해서 교회를 찾아온 이 여인을 향해 기도했다. 장차 장모가 될 정 권사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귀신 쫓는 기도를 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도 하나님의 종은 역시 하나님이 쓰십니다. 제 손에 힘이 확 생겨요. 그래서인지 그 여인이 십자가처럼 확 누워서 노란 거품을 품더니 그 즉시 나아서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그가 한 주에 14명까지 전도해서 데려온 것입니다.”

 
공짜는 없다

어떤 일이든지 거저 되는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일화이다. 이 경험은 그의 평생에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며,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했다. 이러한 ‘승리의 경험’은 이후 교회 개척하고 어렵고 힘든 고비 때마다 큰 버팀목이 되었을 뿐만 아나라 평생의 목회 거울이 되었다.

 ‘경기도의 강남’이란 분당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스타일의 그가, 주변에 ‘세련된 강남풍’의 목회자가 즐비한 그곳에서 도시목회의 새로운 모델이랄 수 있는 1만 평의 대형교회를 건축하고, 2만 5천여 명의 성도들이 열광케 하는 그의 저력은 인간적인 면모가 아니라 그의 속에서 직접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온몸으로 증거하기 때문이리라. 또 그는 대형교회가 된 만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끊임없이 실천하고 있다.

▲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열린 오세아니아성령대성회 강사로 참석한 목회자와 사모들이 한자리에 모여 세미나를 갖고 기념촬영을 했다.     ©크리스찬리뷰


 “오늘날 교회들이 너무 개교회주의로 갑니다. 한국교회가 그래도 영광성과 거룩성이 있을 때는 연합사업이 잘되고, 매머드급 집회를 할 때였습니다. 교회를 향하여 뭐라고 조롱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훈련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자훈련과 성경공부하면서 각개 전투화 되어가기 시작했고, 개개인의 인격변화와 신앙성숙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질적 성장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큰 실수는 모임의 중요성,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밤예배를 철폐하고, 그 이후 연합사업과 메머드급 집회를 비판하고 없어지면서 한국교회는 응집력과 영향력이 약해졌습니다.

개교회주의가 되고, 네트워크화 되지 않으니 목회자들이 자기 왕국을 이루면서 개인적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옛날에 섬기고 헌신하던 시기에서 질적으로 높아진 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고발정신, 폭로정신, 개혁정신 높아져 이제는 저마다 루터가 되고 칼빈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부터 회개하지 않으니 한국교회는 언론에 두들겨 맞고, TV 브라운관을 통해 치부가 폭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세속적인 공동체가 돼가고 도덕적 영향력, 공신력이 추락했습니다. 큰 교회들이 이럴 때 연합사역을 다시 해야 합니다. 교회의 역사적 사회적 책임을 대형교회가 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익집단처럼 세속화된 집단처럼 보이는 이때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애국하고, 민족과 나라를 섬겨야 합니다.”

그 일환으로 새에덴교회는 각종 연합사업에 지원하고, 해마다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를 초청한다. 참전용사 50~100명의 항공료, 5박 6일동안 특급호텔 숙식, 관광까지 다 교회가 온전히 부담한다.

 “이전 정권 때 ‘반미면 어떠냐’의 말이 나오고, 성조기 찢기고 할 때, 이렇게 하겠다고 백악관 신우회에서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참석자들이 ‘왜 한국은 미국을 싫어하나, 예전에 도와줬는데 성조기를 찢고 태우는 이유가 뭐냐, 왜 북한과 그렇게 가깝나’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미국에 대해 잠깐 오해하고 있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전체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답변했습니다. 그 자리에 참전용사가 한 분 계셨는데 매우 섭섭해 하시더군요.

 
▲  소강석 목사는 본지와 인터뷰를 마친 후 하버브릿지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크리스찬리뷰


미국에는 약 10만 명에 달하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생존해 있습니다. 그 이후 이분들을 초청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정치활동을 하는 지역이나 버지니아 지역 등에 거주하는 참전용사들을 전략적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다녀가면 한국의 홍보대사가 됩니다."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한국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그의 눈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는 듯했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선교교회 담임목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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