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교회당 종소리, 담 광장에 울려 퍼지네

네덜란드 여행기| ①암스테르담

글ㆍ사진|김명동/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1/03/28 [11:58]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가방을 챙기다 말고 정말 떠나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짐을 꾸려놓고 나면 그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갑자기 내 잠자리가 너무나 안온하게 느껴지고 익숙한 것들이 따뜻한 빛을 바라며 나를 붙잡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곳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    운하 많은 물의 도시 네덜란드는 165개 운하 위로 1,300개 다리가 놓여 있다.             ©김명동

 어느 날, 아내가 지난 30년을 통틀어 가장 느닷없는 제안을 한다.

 “당신, 한 달쯤 여행 다녀오는 거 어때?”

 “왜?”

 “그냥”

 “일은 어쩌고?”

 “건강도 좋아지고, 이젠 좀 여유를 가지면 좋겠어.”

 “봐. 난 지금 여유롭거든.”

단박에 거절하긴 했지만, 아내의 제안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던 어느 날,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딸이 ‘아빠. 보고 싶어요.’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아내에게 묻는다.

 “혹시 암스테르담에서 한 달 있다 오면 어떨까?”

 “갔다 와요”

 “당신, 너무 쉽게 말하는데”

 “아니, 어렵게 말하는 거야”

 “아냐, 아니다. 내가 무슨 여행이냐.”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상상을 해본다.

언제라도 다시 보고 싶은 반 고흐의 그림이 있고, 렘브란트가 있는 곳. 암스테르담의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색에 잠기고 글도 쓰고. 그래, 유럽 교회들도 둘러보고 싶어.

아내에게 다시 묻는다.

 “나 진짜 간다.”

 “어디?”

“암스테르담.”

아내가 미소 짖는다.

아무튼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 암스테르담 여행의 시작점인 중앙역     ©김명동

운하 많은 ‘물의 도시’

화란 또는 홀란드라고도 불리는 네덜란드는 ‘낮은 땅’이라는 뜻이다. 나라 이름처럼 바다보다 낮은 땅이 국토의 4분의 1이나 되는데, 이러한 자연 조건을 극복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네덜란드 사람들은 대단히 인내심이 강하고 근면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영·호남을 합친 정도의 면적에 산이 없는 나라, 작지만 강한 강소국으로 우뚝 선 유럽의 관문이다.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넘는 고소득 국가지만 원래 검소한 민족성으로 유명한 나라다. 여왕이 평상복 차림으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나라, 천연가스가 있지만 미래를 대비한다며 꼭꼭 보관해 놓고 대신 러시아 가스를 수입해 쓸 정도로 자린고비다.

네덜란드의 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행정부 소재지는 헤이그이다. 인구 1,600만 명에 자전거가 1,200만 대 네덜란드는 풍차가 아닌 자전거의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네덜란드는 165개의 운하 위로 1,300개의 다리가 놓여있으며 강변에는 노천카페만도 2,000여 개가 있다고 한다.

 
▲    암스테르담 담 광장     ©김명동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와 ‘태양의 화가’ 반 고흐를 문화적 아이콘으로 삼은 암스테르담은 ‘물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도시다. 사실 암스테르담은 ‘암스텔강의 댐(Dam)’이라는 뜻이다. 13세기 무렵 이곳에 제방을 쌓고 정착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교훈으로 배우게 되는 미담 ‘제방의 뚫린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물을 팔뚝으로 막아 붕괴를 막았다’는 어느 소년의 얘기도 바로 화란을 무대로 하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향했다. 가이드북마다 입을 모아 말하는 암스테르담 여행의 시작점은 중앙역(Central Station)이다. 도대체 중앙역이 뭔데, 다들 중앙역인가? 아닌 게 아니라 이 역을 만들기 위해서 암스텔강 하구에 인공 섬을 만들고 8,687개의 말뚝을 박아 기초 공사를 하였으며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89년에 완성을 본 붉은 벽돌의 건물이다.

지금은 유럽과 네덜란드 각지를 연결하는 열차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결국 이 역은 여행 마지막 날까지 암스테르담 근교 선을 타기 위해 뻔질나게 들락거려야만 했다.

▲    담 광장 맞은 편에 있는 위령탑     ©김명동 

GVB 패스는 한국의 교통카드와 방식이 같다. 지하철에 타기 전 삐-. 역에서 나갈 때 삐-. 트램도 한국의 버스와 마찬가지다. 타고 내릴 때 트램 안에 비치된 단말기에 개찰을 해야 한다. 하지만 트램과 정류장을 공유하는 야외 지하철역에는 개폐식 문이 없기 때문에 야외 정류장의 단말기에 미리 개찰해야 한다. 개찰을 안 하고 들어갔다간 도착역의 개폐식 문 단말기에 아무리 카드를 갖다 대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들어온 흔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사람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럴 땐 당황하지 말고 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된다. 개폐식 문 밖, 들어오는 쪽 단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면 된다.

 “미안하지만, 이 카드 좀 저기다 대줄래요?”

 “삐-.”

이제 난 ‘들어온’ 사람으로 인정한다.

당당히 출구로 나가자 중앙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역에서부터는 걸음마를 갓뗀 아이처럼 조심스레 걸어야 한다. 암스테르담은 사람, 자전거, 트램, 자동차가 좁은 도로를 사이좋게 나눠 쓰는 까닭에, 그곳에 처음인 사람에게는 조금 복잡하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어떻게 길을 건너야 할지 감이 오지 않지만, 아주 넓은 도로가 아니라면 신호는 무시된다는 걸 곧 알 수 있다. 다만 이곳에서는 자전거가 사람보다 우선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전거를 피해가야 한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자전거가 멈추지 않을 수도 있고, 벨을 울리는데도 피하지 않으면 양복 자락 휘날리는 신사나 금발 미녀에게 욕을 먹을지도 모를 일이다. 

 
‘느림보 철학’ 돋보이는 자전거 도시

정장 신사와 배낭차림의 학생, 시장바구니의 아주머니 등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중앙역으로 몰려온다. 미니스커트의 아가씨도 시선을 개의치 않은 듯 폐달을 밟는다. 2천여 평 넓이의 역 앞 자전거 주차장은 이미 빈 공간을 찾기 어려운 상태. 자리를 못 찾은 사람들은 멀찌감치 역 앞 운하를 지나는 다리 난간에 자리를 매둔다. 열쇠를 꼭꼭 채워두는 모습들이다. 중앙역 옆에는 4천 대 주차규모의 3층짜리 대형 자전거 주차장도 있다.
▲  신교회(NieuweKerk)     ©김명동

네덜란드를 최고의 자전거 나라로 만든 것은 역시 자전거가 일상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데 있다. 암스테르담 어디를 가나 갖가지 모양의 자전거를 타고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가 하면 남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달리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도시의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전거 운전자들의 능수능란한 수신호, 그 수신호에 맞춰 자전거를 피해 운전하는 차량들의 방어 운전은 도로에서 자전거가 가장 우선한다는 원칙을 실감케 한다.

자전거도 생활의 필요에 맞춰 뒷좌석에 걸쳐 양쪽으로 큰 가죽가방을 늘어뜨려 서류뭉치나 물건 등을 싣도록 만들어 두든지, 앞에 바구니를 달고 있다. 또 아이를 태우기 위해 앞부분에 바퀴달린 대형 짐칸을 단 자전거가 있는가 하면 거리의 청소부들은 자전거 앞에 대형 쓰레기통을 달고 자전거로 도시를 누비며 거리 청소를 하고 경찰들은 자전거로 도심 구석구석을 다나며 순찰을 한다.

사실 암스테르담 시는 자전거 도로망을 확충하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 감세 혜택을 주는 한편, 자동차가 도심으로 들어오면 불편하도록 만드는 차량증가 억제정책을 폈다. 무료였던 기존의 미터식 주차시설에 요금을 부과하고 주차장 확장계획을 폐기했다. 암스테르담은 분초를 다투는 시대의 흐름에 역으로 맞서며 ‘느림보 철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어린이들은 4세 때부터 자전거 타는 법, 안전 운행법 등으로 이루어진 정규교과 과정을 통해 자전거 안전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초등학교 졸업 때 ‘자전거 능력시험’을 통과하면 그때부터 ‘자전거 오너’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지나치게 빠르다고 생각하면 폐달을 밟자. 우리 아이들에게 숨 쉴 공기를 주고 싶다면 폐달을 밟자.’

암스테르담이 시민들에게 자전거 이용을 권장하며 만든 구호다.

어쨌든 레이더 탐지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스텔스 전투기처럼, 조용히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만 조심하면 길 건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길을 건너는 것이 해결됐으니, 다음 문제는 길 찾기. 내게 네덜란드어는 사우디아라비아어 만큼이나 생소하기에 도로표지를 뚫어지게 봐도 위치 파악이 되지 않았다. 지도와 지형지물을 매번 비교하며 다녀야 했다. 넓은 도로 끝의 광장을 돌아 좁은 골목을 지나면 운하나 다리가 나오고, 그 다리 끝에는 또 다른 광장이 있고,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어디로 가야할까 지도를 펼쳐 들게 하는 오거리가 나왔다.

▲   구교회(Oude Kerk)     ©김명동

암스테르담 중심부 담 광장 (Dam Square)

중앙역에서 구시가지로 접어들면 고풍스러운 집들이 부채꼴모양으로 들어 서 있다. 구시가지로 이어진 담락거리는 16-18세기에 지어진 중세 건축물과 더딘 시계바늘처럼 느린 전차가 거미줄처럼 얽힌 도시를 꿈틀대며 달린다. 도로를 따라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과 톡쏘는 청량음료를 마시며 따스한 햇살을 즐긴다. 물결이 거의 일렁이지 않는 운하에는 작은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달리고 있고, 쉴 새 없이 흐르는 운하처럼 담락거리와 구시가지 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발길이 닿는 대로 흐르다보면 담락거리가 끝날 즈음 17세기 황금시대의 영화와 예술의 진면목이 느껴지는 왕궁과 담 광장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왕궁은 현재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여왕은 헤이그에 있다고 한다. 왕궁 앞에 널찍이 자리 잡고 있는 담 광장은 이곳의 만남의 광장이다.

13세기경 암스텔강에 댐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 광장 앞 왕궁을 마주한 곳에는 2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흰색의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 위령탑이 서 있는데, 기념비 주위의 계단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된다.  담 광장의 왕궁 바로 옆에는  암스테르담을 대표하는 신교회(Nieuwe Kerk)가 있고, 구교회(Oude Kerk)는 담 광장에서 도보로 약 5분 거리에 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담 광장, 정오가 되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7세기 교회당 종소리가 담 광장에 울려 퍼졌다.

구교회로 향했다. 네덜란드의 많은 교회가 그렇듯 처음에는 가톨릭 성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이제 개신교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다.  가방을 메고 교회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간 중세 속으로 들어가는 착각을 느꼈다. 교회당 안에는 촛불만 몇 개 타고 있을 뿐 아주 어두웠다.

구교회는 암스테르담의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로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1366년 무역상들과 선원들의 수호자인 성 니콜라스(St. Nicholas)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을 시작하였고 1566년 종각과 첨탑을 완성함으로 마무리되었다. 특이한 점은 렘브란트의 아내인 사스키아(Saskia)가 이곳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13세기 이전에도 이곳에 목재교회 건물이 존재했었는데 그 건물의 기초 위에 지은 석재 건물이 현재 교회의 골격이 되었다. 1390년 에스토니아에서 수입해 덮은 목재지붕이 현재 남아있어 그 덕분에 유럽에서 몇 안되는 특이한 어쿠스틱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었다.

영국의 BBC방송 합창단을 포함한 세계 유수의 연주가들이 매년 이곳에서 콘서트를 하고 있다. 1578년에 암스테르담 시가 공식적으로 인테리어들을 바꾸게 되었는데 이때 자랑하던 아름다운 장식물들 중 상당수가 사라지게 되었다. 중세까지 암스테르담의 대표적인 교회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담 광장의 신교회가 완공됨에 따라 점차 역사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지만 오랜 전통과 특이한 모습으로 인해 아직까지 많은 방문객이 찾는 명소로 남아있다.

신교회도 장중했다.  건물의 크기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성 카트리나(St. Catherine)와 성 마리(St. Mary)를 숭배하여 ‘성 카트리나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 고딕 성당들의 영향을 받아 1400년대 초에 지어진 교회 건물은 1421년과 1452년 두 번 있었던 암스테르담 대화재를 별다른 피해 없이 무사히 넘겼으나 그로부터 약 2세기 후 하수도 공사를 하던 인부들의 실수로 일어난 불이 번져 결국 건물 전체가 타버리는 재난이 일어났다.

▲    서교회에 있는 안네 프랑크 동상     ©김명동

훗날 복구된 건물은 비록 원래의 모습은 아니지만, 몇 번의 리모델링을 통해 더 아름다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지금은 왕족의 대소사를 비롯한 국가의 중요한 행사들을 담당하는 교회로 자리 잡았다.

1815년부터 시작된 왕족의 대관식은 예외 없이 신교회에서 치러졌고 매년 5월 4일에는 국가 공식예배가 중계와 함께 집전되기도 한다. 2002년 2월에 있었던 오렌지 왕자와 막시마 공주의 결혼식이 전 세계로 중계되면서 더 유명해진 이 교회는 왕가의 행사 외에도 유명한 전시회와 연주회 등으로 시민들에게 친숙하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고 정문 쪽을 찾아가니 굵은 철책이 완강한 표정으로 진입을 거절했다.

행사가 없는 주중에는 닫아 놓는가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안내인의 설명은 뜻밖이었다.

 “교회 정문은 아주 폐쇄되었습니다.”

 “아니, 교회 정문이 폐쇄되다니요?”

교회 정문에는 장중한 문이 철통처럼 굳게 다물려있었다.

 “냉난방 문제 때문이지요. 지금 출석하는 교인의 수효로는 도저히 교회 유지비를 충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허망했다, 어이가 없어서 교회 정문을 둘러보고 또 바라보았다. 냉난방 유지비가 안되어 예배당 정문을 폐쇄하다니.

 “교회로 오실 분은 담 광장 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시오”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고 건물은 거구의 늙은 몸을 새삼 민망해하듯, 우중충한 하늘 아래 서글픈 빛을 띠우고 있었다.

정문에서 무거워진 발길을 돌려 담 광장 쪽에 있는 문을 찾아갔다. 예배당 건물에 비하여 초라한 행색의 문이었다. 문 하나를 밀고 들어서는 순간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워낙 유명한 건물이니까 그런가 보다. 나도 그 유명세 때문에 여기 와 있지 않은가. 고딕 양식의 천정과 장식이 있는 둥근 기둥이 우아했다. 정면을 화사하게 열어주는 스테인드글라스는 꽃이 만발한 낙원이었다. 정성 들여 조각한 제단, 1645년으로 기록된 훌륭한 파이프 오르간, 하지만 넘쳐나는 예술품과 사람들 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신교회’라는 한 유서 깊은 교회가 그 큰 몸집을 가누지 못하고 이렇게 중병을 앓고 있는 원인이 무엇일까?  마음이 저려왔다.

이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서교회(Wester Kerk)가 있다.

 
안네프랑크의 집, 파시즘의 비극

1638년에 완공된 서교회는 화려하고 높은 첨탑과 렘브란트의 매장지로 유명하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높은 85미터짜리 첨탑 꼭대기에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의 황금 왕관이 보관되어 있다. 암스테르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첨탑은 암스테르담 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교회 내부에는 “렘브란트 이곳에 잠들다”라고 쓰여 있는 묘가 있으나 실제로는 어느 묘가 렘브란트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여행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     ©김명동   

교회 뒤편에는 안네 프랑크의 동상이 있다. 안네 프랑크는 15분마다 시간을 알렸다는 서교회 시계탑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안네 프랑크 집으로 향했다. 이정표가 되는 서교회 모퉁이를 돌아서자 긴 행렬이 눈에 띄었다. 안네 프랑크 집은 아무리 날씨가 안 좋아도 언제나 여행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나치 정권을 피해 2년 동안 몸을 숨긴 집, 그녀의 유명한 ‘안네의 일기’를 썼던 곳이기도 하다. 안네가 13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기록된 그녀의 일기는 수천만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아직도 이 소녀의 이야기를 지구 어디선가 읽고 있다. 그녀의 일기장에 이렇게 감동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왜 우리는 아직도 그녀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가.

 ‘안네의 일기’를 읽는 이들은 그녀의 일기 속에서 높은 문학적 가치를 발견하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숨소리를 죽이고 그녀에게 주어진 작은 공간 속에서 친구를 그리워하고 공포 속의 생활을 표현하는 이 일기장 속에서 인류역사 최초로 만들어진 인간이 인간을 학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스실, 유대인 학살 파시즘을 만난다. 그녀의 일기장을 읽고 또는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이런 엄청난 사건에 눈물을 흘리며 아직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 어디선가 진행 중인 파시즘에 치를 떠는 것이다.

박물관으로 변신한 안네의 집은 앞채와 뒤채로 나뉘어져 있는데 뒤채의 2층에 안네의 가족과 그녀의 첫 사랑 피터의 가족이 함께 숨어 살았던 은신처가 있다. 은신처로 통하는 비밀통로는 회전식 책장으로 은밀하게 가려져 있다. 은신처의 계단들은 너무 가팔라 찾아온 관광객들 모두 꾸부정하게 벽을 더듬어 올라간다. 안네의 일기에서 설명되어 있는 풍경 꼭 그대로다.

안네가 기대있던 그 벽을, 안네가 피터의 방으로 오르내리던 그 좁은 통로를, 안네를 불안하게 했던 싱크대의 물소리가 울리던 그 부엌을, 안네가 피터와 첫 키스를 나눴던 그 다락방을 , 내가 책에서 가슴 떨리게 읽었던 안네의 모든 이야기를 나는 손으로 만지고 있었다.

 “우와, 내가 안네 프랑크 집에 있다니! 그들이 살던 은신처에 지금 내가 있다구,”

마음이 우우 흔들렸다.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안네가 언니와 생활하던 방 벽에는 그들이 한 낙서와 붙여놓은 여배우의 사진들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배가 아프도록 웃어보고 싶다.’는 기록을 적은 안네의 골방을 쳐다보며 그날을 연상해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여행이란 바로 이런 감동을 맛보는 과정이 되어야 제맛이 나는 것 같다.〠<계속>

 

글·사진|김명동 크리스찬리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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