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로

-2010년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하며-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8/03 [10:51]
1. 한국과 일본, 그 오해와 인식

대부분 한국인들은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관해 잘 아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는 한․일관계의 지정학적 인접성과 역사적 관련성에서 기인한 것이지, 사실 일본의 실체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 상황, 중국의 부상 및 환경, 지역적 경제협력 등을 고려할 때 한·일 양국간 우호협력관계가 불가결한 만큼, 일본을 더욱 잘 알기 위한 국민적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 주 시드니 손치근 부총영사  ⓒ손치근

특히,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과의 관계는 가치나 사회구조가 판이한 중국과의 관계보다도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한․일양국은 민주주의나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할 뿐 아니라 정치상황, 가치, 투자조건, 문화적 구조, 교육여건 등이 동일하며 상호 호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양국 간의 관계 증진이 긴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한․일양국은 경제, 문화부문의 상호의존관계가 확대, 심화된 반면, 역사, 영토 문제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는 ‘비대칭적 발전’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일관계의 악화가 양국의 정권 차원을 넘어선 보다 구조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역사, 영토 문제가 일본의 국내정치 및 한일관계의 쟁점으로 부각된 배경에는 냉전체제의 종결이라는 국제환경, 일본 사회의 보수화, 한국의 민주화 등의 구조적 요인이 있다.

한·일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가운데 식민지 근대화론이 있다. 이는 일본의 보수적인 지도층이나 평균적인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일본의 경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식민지시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산업기반 시설 정비는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제2차 대전 때 사용되었던 전체 탄약보다 더 많은 탄약이 사용되었을 정도로 치열했던 6.25 전쟁으로 인해 이 산업기반도 거의 붕괴되고 소실되어 버렸다. 따라서 현재의 철도 등 산업기반은 휴전 후 한국인의 손으로 세운 것이며, ‘일본의 통치 덕분’이라는 일본인의 망언은 선입견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오해를 풀어 줄 수 있을까? 이러한 오해들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현존하는 역사인식의 차이만큼이나 서로의 정서면에서도 큰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역사,  영토의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 역사인식의 공유라는 완치를 위한 장기적 처방과 함께 악화방지를 위한 관리차원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한․일 우호 협력을 위한 최상의 방법론으로 양자 차원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차원에서의 해법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2.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해체와 통합요인

오늘날 세상을 ‘움직이는 힘’ 즉, `추동력(Driving Force)'이란 말은 인류역사를 만들어간 주요한 힘을 지칭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 힘은 조정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이 힘을 잘 이용할 수는 있다. 그래서 비전이 있는 국가는 이러한 힘을 잘 인식하고 적절히 자국의 위치를 설정함으로써 ‘움직이는 힘’ 으로 하여금 그 조직의 목표나 미래를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기술혁명, 경제 통합은 지구화의 중심을 향하여 통합되고 있다. 반면에 종교나 인종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체성은 반대방향의 힘을 가지고 힘을 분산하며, 해체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동아시아 전체의 통합적인 지역 메커니즘은 18세기 산업혁명 이래 서구의 신문명에서 온 문화 충격으로 무너질 때까지는 아주 안정되었다. 이 통합력의 특징은 인도문화권이나 이슬람 문화권과는 달리 종교적 기반이나 언어적 기반 이상으로 한자를 중심으로 뿌리 깊게 내려진 하나의 공통된 문화적 기초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해체의 주요 원인이 된 서구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의 참견과 함께 아편전쟁이 시작되고, 중국의 붕괴, 베트남이 프랑스에,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화로의 병합을, 조선은 소멸의 길을 걸으면서, 이 제국주의를 일본 제국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는 서구식민주의적 제국주의에 고취되어 타이완과 조선의 식민지화, 만주국의 보호국화, 그리고 최후로 중국에 대한 전면전쟁의 개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야, 이지역의 붕괴과정은 극도로 진행되어, 한자문화권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로 남겨진 것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제국주의적 차원에 있어서 통합을 재건해보려는 일본의 야망뿐인 대동아공영권이었다.

한편, 새로운 형식의 참견이 전자와 비슷한 분단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군에 의한 한반도의 점령과 한국전쟁, 타이완과 중국본토간의 분열로 이어진 타이완 지원을 위한 미국의 개입, 프랑스 및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연속적인 교전 등도 동아시아에 뿌리 깊은 새로운 단층을 만들었다. 동아시아가 주는 이미지 가운데 오늘날도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해체의 귀결이다. 즉 한반도의 남북대립, 타이완 해협 양안관계 및 한․일․중 상호관계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절의 원인이 된 서구 식민주의적 제국주의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국가 간 서로 거리감을 두는 여러 요인이 내부적이지만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메이지유신 이래 발전의 불평등이며, 또 다른 분단의 요인은 정치적 체제의 대립이다.

사실 이 지역의 진정한 반목은 이데올로기의 수준이라기보다는 더 깊은 국민의 의식 수준에 뿌리 내리고 있다. 문제의 원인은 일본제국주의의 후유증이고, 아주 치열했던 한국 전쟁의 후유증이다. 또한 이 증상은 외국의 간섭주의가 개입했던 만큼 심각하게 동포애에 상처를 내었고, 상호 증오의 폭을 가열시켰다.

이러한 후유증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인가? 이처럼 동아시아를 분열시킨 여러 요인은 이제 약해지는 단계로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방향으로 강력한 통합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경제 발전과 문화적 균질성의 상승작용이다. 이 경제 발전의 상승작용은 단순한 보완적인 무역관계로서 일방적으로 상대국만을 이용하는 대동아공영권식의 식민무역의 형태와는 다르다.

이 상승작용의 좋은 예로써 한국의 제철업을 들 수 있다. 한국의 제철소는 주로 일본의 지원으로 건설되었으나 조선부문의 발전을 촉진했고, 급속하게 성장하여 어느 면에서는 일본 조선소의 수준을 능가했다.

또한 상승작용의 제2의 통합요소로써 아주 유효하게 작용하는 문화적 균질성은 다음 2가지 차원으로 작용한다. 첫째 언어학적 수준으로 한자를 사용하여 어느 정도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둘째, 다같이 유교적 전통으로 형성된 사회형태로써 공업문명에서 비롯된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동일한 해결방식이 한 나라에서 다른나라로 자연스럽게 전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어느 곳에서든 중추절의 만월을 이태백의 눈으로 바라보게되는 친밀한 감수성의 교감에서 나오는 친근한 사고법이 예술이나 문학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제한할 수 없었다. 이제는 한국에서 발신하는 한류 열풍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아시아지역 문화교류의 계기로 보고, 이를 중심으로 문화공동체 형성을 유도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한류는 아시아적 문화사건이고, 지역 공동체를 마련할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3. 지역주의 접근방법을 통한 관계의 회복

일본 전략가들은 공공연한 북한의 적대감,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 한국의 적대감, 최근 긴장 완화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부터 느끼는 장기적 위협에 대한 우려를 지목하고 있다. 냉전기 이래 일본의 안보전략을 살펴보면 3단계로 변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제1기는 `자위상의 방위:Defensive Defense'(1954-80년대)로 `요시다(吉田)독트린'으로 불리는 동 전략은 외교정책 분야에서 미국으로의 종속과 함께 중상주의적 경제성장에 주력했다.

제2기는 `총합 안전보장:Comprehensive Security'(80년대)단계이다. 이는 70년대 오일 쇼크로 생성된 전략으로서 자원정치, 환경보호, 인간안보 등 비전통적 안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제3기는 `평성기(平成期) 군사적 보통국가화 단계:Heisei Militarization'(90년대 이후)이다. 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지, 발전되어 온 전략이다. 비례적인 국방 독트린 채택과 새로운 민족주의 요소 강화 및 미국의 전세계 군사전략과의 통합 가속 등 새로운 사고 및 접근법에 기반을 둔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방안으로 미국과 동맹관계를 선택한 일본에 대항하여 한국이 중국과 안보협력을 택하는 것은 적절지 않다고 본다. 그보다 미일안보체제는 일본의 독자적인 군사대국화를 견제하는 기능이 있으므로, 한․미동맹의 강화를 통해 미․일동맹의 대일 견제적 성격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미․일동맹이 유지되고 한․미동맹이 굳건하면 일본의 보통국가화는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현재 경제적, 사회문화적 교류는 점점 심화되고 상호의존적이 되어가는데 반해 정치적인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서 한․일간의 갈등이 되는 쟁점은 대체로 과거사 문제와 관련이 있다. 특히, 과거사 문제는 일본과 한국 관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 추진에도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자연스러운 안보 파트너가 될 수 있는 한국이 과거사 문제로 일본의 적대국이 될 경우, 지리적 근접성, 기술 역량 등으로 일본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본과 관련된 과거사 문제에 대해 미국이 적절한 수준에서 관여함으로써 과거사 문제는 역내 문제가 아닌 국제 문제임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제 한일 정치인들의 세대교체에 따라 점점 한일관계의 주역이 식민지 경험세대 혹은 이념형 세대에서 탈역사와 탈이념 세대로 옮겨가고있다. 그런데 일본 학교의 역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실시되고 있는 교육조차도 일본의 전쟁책임을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의 많은 역사 교과서들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 이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전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군사행동은 ‘사변(事變)’ 에 지나지 않고, 일본은 패전(원폭 포함)을 통해 응분의 대가를 치뤘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역사의 부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자국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갖고 있는 세대들이다. 과거사에 콤플렉스를 갖는 구세대와는 달리 과거사에 속박되지 않는 전후세대는 오히려 극적인 진전이나 반동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일관계가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협력의 선순환 관계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양국 국민 모두가 동의를 할 것이다. 한․일관계 악순환의 고리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의 변화만을 기대하면서 한국이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도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문제야말로 한국인의 일본이해에 최대의 심리적 장애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90년대 탈냉전 상황에서 새롭게 등장한 탈식민과제에 대한 보수적인 저항심리가 국가주의적 역사관과 국가관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주의에 입각하여 역사인식에 대한 상호인식을 촉진하기 위한 공동 채널이 많이 확산되어야 한다.

한반도의 지리적 특수성이라 할 수 있는 지정학적 대륙성과 해양성의 양 측면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가령 러시아나 중국에 대한 일본의 외교정책이 한․중 및 한․러 관계에도 미묘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한일양국간의 정책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한일양국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과거사청산 문제이다. 이를 통하여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방지하고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일본의 패권추구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

한편 국제사회에서 확장일로에 있는 일본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한․일양국이 국제사회에서 공통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과거지향적인 측면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시각에서 서로의 이해를 촉진시키고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는 한․일 협력을 기초로 우리의 대외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언제 생각해도 감회가 새로운 이러한 월드컵 같은 것을 계기로 형성된 양국간 협력의 모멘텀을 계속 살려서 두 나라가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러한 소망을 조금이나마 실현시키고자 양국관계의 전환 방법을 지역주의 접근방법을 통해 찾아본다.

한․일간 ‘닫힌 민족주의 경쟁’에서 벗어나서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관점에서 한․일관계의 해법 혹은 미래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한일양국이 어떠한 대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동아시아주의’라는 공통 정체성과 지역이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한․일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이 아시아, 세계질서에서 주도국가가 되려면 역사의 대의에 부합하게 처신하고 확고한 평화국가로서 주변국가와 국제사회의 신뢰회복이 중요하다고 설득할 필요가 있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의 R. 슈우만 외상은 `프랑스와 독일이 오랫 동안 계속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양국의 석탄과 철강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이 슈우만 플랜의 원안을 작성한 것은 쟝 모네였으며, 모네는 OEEC나 구주심의회가 단지 정부간 협력의 영역을 넘기 어려우므로 비록 한정된 분야라도 국가주권에 대한 대담한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유럽은 하나의 플랜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구체적인 업적을 거듭 쌓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불전쟁으로 말미암아 갈등지역인 로렌스지방에서 쫓겨난 난민의 아들로,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난 슈우만은 프랑스와 독일간 전쟁의 불씨를 없애고자 모네의 제안에 정치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슈우만의 호소에 대해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은 즉시 찬동했다. 이태리,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은 1951. 4.18일 파리에서 ECSC(구주석탄철강공동체)조약에 조인하였다. ECSC는 52년 8월에 탄생하여, 오늘날 EU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우선 경제적인 통합’을 모색해도 거기에는 반드시 정치적인 문제가 짙게 드리워진다. EU처럼 ‘단순한 경제문제’ 로 처리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아무튼 일본이 아시아 경제규모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경제통합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주도적인 힘이 없이는 진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전에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명으로 아시아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의 이미지가 남아있어 정경분리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가 후퇴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성장의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중국과 세계의 금융자본이 집중하는 일본이 손을 잡는다면 또다시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즉 아시아의 커다란 시장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될 때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런던대학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교수는 현 상태가 유지 된다면 2050년에 일본이 멸망하는데, 그 까닭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일본의 대책으로는 한국, 중국, 대만과 지역공동체를 모색하는 길밖에 없다고 한다. 이처럼 건설적인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면 이 4개국은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4. 경제관계의 현황과 바람직한 방향

1876년 제1의 개항 직전, 조선왕조는 드높은 도덕적 문화적 자존심 때문에 무역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국제시장에의 대응을 게을리했다. 그 결과, 무역의존도는 1-2%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였다. 스스로 준비 없이 강요당한 개항이었지만 그 이후 조선왕조의 무역의존도는 1910년까지 10%로 늘었다. 무역이 늘어남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생산이 회복되는 조짐은 이미 1890년대에 도처에서 확인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후 한반도는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그러한 정치적 종속 아래 무역의존도는 1940년까지 60%로 늘었다. 그 사이에 한반도 북부에서는 이후 1970년대까지 북한을 먹여 살린 높은 수준의 공업시설이 들어섰다.

해방 이후 남한은 다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경제가 되었다. 1950년대 말 무역의존도는 대략 2-3%의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참으로 고단한 처지였다. 결정적인 반전 계기는 1965년 일본과 국교 재개, 곧 제2의 개항이었다. 당시 지식층의 격렬한 저항 속에서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강행한 일본과의 국교수립에 대한 평가는 과연 어떤가? 지금까지 한․일협정 평가의 주류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자금마련 필요성과 미국의 압력이 결합돼 이뤄진 ‘굴욕회담’ 이라는데 맞춰졌다. 그러나 세세한 협상과정 공개로 한국 정부의 진의와 외교적 노력이 상당했음이 드러나 긍정적 평가의 계기가 마련된 측면도 있다.

경제적으로만 본다면, 만약 시기적으로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1973년 이후에 이루어졌다면 몇 배의 유리한 조건으로 타결되었다 하더라도 성과는 미미했을 것이다. 그 터전 위에 베트남 파병을 통해 구축한 한․미․일 태평양삼각동맹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능케 하였다. 그 사이 무역의존도는 무려 100% 수준에 육박하기도 하였다.

이제 제3의 개항이라고 부를만한, 미국, 유럽, 호주,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두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세계 GNP의 28.6%, 10.5%를 각각 차지하여 전 세계의 40%를 점유하고 있다. 미․일 양국과 FTA가 얼마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때이다. 일본만의 경제력도 한국․중국․러시아를 합친 것보다 크므로, 일본의 거대한 경제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일관계가 정치․외교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경제교류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일간 연간 무역액은 450억 불(2002년), 678억 불(2004년), 784억 불(2006년), 826억 불(2007년)로 꾸준히 증가하여 2008년 기준 일본은 한국의 제2위 교역국이고, 일본에 있어 한국은 제3위의 교역국이다. 이는 한․일간의 지속적인 교역량의 증가와 일본에의 수입의존이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일 무역규모의 비약적인 증가는 한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반면, 대일 의존적인 산업구조와 만성적인 무역적자는 우리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제약하였다. 한․일 경제통상 문제를 거론할 때 언제나 중요하게 거론되는 문제가 양국 간의 무역불균형문제이다. 특히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 흑자폭 감소 등을 고려할 때, 약 300억 불 규모(2007년)의 대일무역수지 적자의 시정은 시급한 문제로써, 장기적으로 접근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이다. 최근 일본의 관세율은 평균 5.1%, 공업제품은 2.4%로 일부 부품을 제외하고는 국제적으로 최저수준이기 때문에 무역전체에 있어서는 관세 인하에 의한 적자삭감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비관세 장벽 철폐 등 관세율 이외의 대일 무역수지 개선의 방법을 살펴보면, 1)자본재 수입대체 확대라는 산업구조 조정과 함께, 한국측의 투자환경개선으로 수입대체형 투자를 적극 유치하는 것이다. 대한 직접투자를 적극화하는데 역시 최대의 걸림돌은 노동문제, 노사관계의 문제이다. 2)산업협력의 추진에 있어서는 기계류, 부품․소재산업의 자립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육성, 지원 등 기업 차원에서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소기업진흥책에 관한 정책적인 면에서의 협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3)불모의 경쟁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각자 탁월한 분야 및 비교우위산업을 살린 균형 잡힌 수평분업체제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리적인 거리는 물론 경제발전수준이나 산업구조 및 문화적 배경에 있어서도 다른 어떤 국가보다 가까운 한일 양국은 협력관계를 보다 심화시켜 나가야 할 최고의 파트너이다. 이미 양국은 철강, 전자, 통신분야 등 세계에서 강점을 가진 분야에서 기업제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관계의 폭은 계속 더 넓혀 나가야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양국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하고 투자, 무역활동도 호주와 뉴질랜드의 CER처럼 단일경제권으로 행해지도록 제도적인 환경정비, 즉 FTA 협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FTA의 주요내용은 양국간의 상품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FTA의 취지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자본과 노동의 국제적인 이동도 자율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5. 일본의 역사관과 사회적 가치관

중국인의 역사관이 연속적이며, 절대적인 선악관으로 전체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일본인의 역사관은 단속적이며, 상대적인 선악관으로서, 세부적인 측면에 치중하여 역사를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즉 일본은 국제사회의 조류에 따라 세계 최강자를 쫓는 즉 아편전쟁 이전에는 중국, 아편전쟁 이후에는 영국 등 유럽,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을 배우고, 따르는 역사를 보였다. 자국에 유리한 것은 선, 불리한 것은 악으로 보는 상대적인 선악관과 전체적인 측면보다는 세부적인 데이터 등 사실성 여부에 치중하여 역사를 보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동일 한자문화권의 중국과 일본의 역사관에 있어서 사뭇 대조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만세에 단 한 번도 외침을 당한 적이 없었다고 칭송했던 과거 일본인과는 대조적으로, 단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한 적이 없었던 한국인의 역사관은 어떤지 자문해 본다.

또한 같은 유교적인 영향권 아래 형성된 사회적 가치관도 한․일간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한국과 일본은 같은 유교적 토양에서 형성된 사회적 가치관이다. 에도시대의 막번체제는 300여 개의 성이 각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 각 번은 영주를 추대하며 무사, 상인, 장인이 모여 성하시를 형성하고 충성을 중시하였다. 충과 효의 양자택일의 상황에서는 충을 택했다. 한편 조선에는 일본 성곽의 수만큼이나 서원이 있었다. 조선인은 ‘충신은 효자가문에서 나온다’ 고 믿으며, 효와 충을 동시에 성립시켜야 했다. 또한 본래 한국어와 일본어는 같은 계통으로 공통적으로 고유어와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어에는 愛에 해당하는 고유어가 없고, 公은 ‘오오야케’라는 고유어는 있다. 반면, 한국어에는 愛에 해당하는 ‘사랑’이라는 고유어는 있지만, 公에 해당하는 고유어는 없다. 낱말의 소실과 생성에는 가치관이 개입한다. 일본에는 개인을 무시하고, 한국은 반대로 公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사회적 가치관(Ethos)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상황에 따라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번갈아 작용해 왔다. 한때는 국가적 번영으로 이끈 가치관이 시대가 바뀌어 상황에 맞지 않을 경우 망하게도 했다. 즉, 에도시대에는 조직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투철한 직업의식 등 멸사봉공의 가치관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순기능으로 작용하여 일본이 성공적인 국민국가를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역기능을 하자 2차 대전을 일으켜 쓰라린 역사를 만들어냈다. 전후 일본인의 가치관은 또다시 순기능을 하여 산업화사회에 성공했고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렇듯 영광과 번영 그리고 좌절과 패망이 동일한 가치관에서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많은 한국인은 곧잘 전후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예로 들어 일본지도자들에게 독일지도자들이 보인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역사인식을 기대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메이지시대 이래 보수기조를 유지해왔고 천황제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일본에서 독일지도자들이 보인 투철한 과거사 인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일본민족 고유의 신앙이자 일본문화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도와 일본의 심볼인 천황과의 관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논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제공한 천황의 선조이자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에 관한 신화로부터 출발한다. 일본신도는 12세기를 분기점으로 크게 대비되는 바, 그 이전의 신도는 신불일체(神佛一體)의 전제하에 신의 본체는 부처이며, ‘본지(本地)’인 불보살이 일본의 중생구제를 위해 신으로서 일본에 ‘수적(垂迹)’했다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적 신도였다.

이에 반해 12세기에 등장한 이세신도(伊勢神道)는 신도와 불교의 관계를 역전시켜 신도의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출현하여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되었다는 신도우위설이다. 이렇듯 천황과 신도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근거삼아 논의되는 이데올로기와 종교지만 그것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때문에 일본의 역사에서 신도의 강화는 곧 통치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의미한다. 더구나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대통령과 수상을 비롯한 국가 지도자와 국민이 자기들의 조상이 범한 죄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진정으로 참회할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회개를 기본으로 하는 기독교신앙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본다.

한편 최근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웃나라에 대한 아무런 편견과 왜곡 없이 상대방 문화에 대한 비상한 호기심과 적극적인 접촉을 하고 있다.

특히 필요한 것은 ‘한․일관계’ 라는 한정된 틀, 매우 특수한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국제화된 교류이다. 이것은 일본인들보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한국은 일본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일본을 보고 평가하였다. 일본 역시 한국을 그 수많은 나라 중의 한 나라가 아닌, 특수한 관점에서 보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두 나라가 국제화된, 글로벌한 환경 속에서 서로 한발자국씩 물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세계국가 가운데 한 나라’로서 상대를 바라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6. 마치면서

요컨대 한일관계는 휴화산과 같다. 언제 다시금 활화산으로 변화할지 모르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평소 경제 및 문화 분야의 우호협력관계를 확실히 해두는 것이 우리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과거 한일관계의 구조적 특징이었던 분야별 비대칭 발전은 경제적 상호의존, 문화침투 등 실질적 지역통합 효과가 정치․외교 면에서의 파국적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우선 일본 전문가의 분야별 육성이 절실하다.

또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와 같은 기관을 통해 대일 마이너스 이미지를 줄여야 하고, 국민감정에 치우친 정서에서의 조속한 탈피가 요구된다. 한국경제의 대일의존도가 30%를 상회한다는 사실을 상정한다면, 경제협력의 중요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화적, 인적교류를 통한 상호이해 증진과 한류의 자연스러운 확산분위기를 조성하고, 양국간 각종 현안해결에 민간의 역할도 강화해야 한다.

이번 아소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은 양국의 고유 쟁점을 넘어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한․일 협력의 의의를 찾았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일양국이 미래 비전을 모색하기 위한 ‘한․일 신시대 공동 프로젝트’에 대해 정부 차원의 지원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앞으로 한․일공동연구는 기존 양국 간의 쟁점 해소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협력과 새로운 분야의 협력을 위해 한․일 양국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특히 한․일 비전그룹의 목적은 한․일 양국의 공동번영과 동반자적 평화질서의 창출에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일 비전 모색은 단순히 양국관계 및 지역질서에 한정되지 않고, 국제사회에서의 존재감 강화와 소프트 파워 향상을 위한 적극적 연계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한․일 양국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2010년 한․일 병합 100년을 맞아 일본이 해야 할 일은 미국의회가 1993년 11월 하와이 왕국 전복 100년을 맞아 사죄결의를 채택한 것처럼, 일본도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국회결의, 총리담화 등을 통해 무라야마 담화에서 한 단계 나아간 역사인식을 제시해야 한다는 도쿄대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의 주장이 실현되기를 시드니에서 간절히 기도드린다.☺



손치근 
일본 게이오대에서 법학박사 학위 받음. 외교통상부 동북아1과 및 외교정책실 정보과 등 본부 근무. 주 파푸아뉴기니, 일본,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및 요코하마, 나고야총영사관에서 근무함. 현재 시드니 총영사관 부총영사.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