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연합교회 한국인 1호 김바나바, 김에스더 부부 목사

나란히 백인교회 담임, 호주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빚을 갚아야죠

글|김명동,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05/02 [11:13]
▲ 김바나바 목사와 김에스더 목사(왼쪽). 파라마타센터너리연합교회에서                       ⓒ크리스찬리뷰    

 
호주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 UCA)에서 첫 번째 한국인 부부 목사가 탄생했다.

지난 3월 16일 호주연합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켄트허스트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에스더(김영숙 51세) 목사, 2008년 호주연합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5년째 파라마타센터너리연합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김바나바(김봉건 52세)목사가 그 주인공.

김에스더 목사는 “지금 호주교회는 청년들의 신앙이 식어지고 있고 목사 지망자도 현격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라며 “영어도 짧고 호주 문화도 덜익숙한 저희들을 백인교회 담임목사로 부르신 것은 이때야말로 복음을 전해준 호주교회에 복음의 빚을 갚으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38년 살았어요. 제남편도 부산에서 태어났고요. 그런데 저는 어려서 몰랐지만 어떤 외국인 선교사님이 집으로 오셔서 어머니께 뭐라고 하셨는데 영어니까 잘못알아 들으셨대요. 어머니가 고마워서 그 선교사님 가실 때 뭘 주셨나 봐요. 그러니까 그 분이 영어로 기도를 하고 가셨대요. 뭐라고 기도하셨는지 모르지만 언니도 신학을 하고 일본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고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호주 선교사님들이셨어요. 이젠 복음의 빚을 갚아야죠.”
 

▲ 김에스더 목사는 켄트허스트연합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성도들로부터 목회의 상징으로 성경, 물, 포도주, 빵을 전달받았다.  ⓒ크리스찬리뷰    

 
삶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성도들

켄트허스트교회는 재적 50여 명, 교인 100%가 백인이다. 여성목회자로 어려움이 없느냐고 물었다.

“저를 너무 좋아하세요. 목회나 예배준비 시 도움을 요청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세요. 켄트허스트라는 지역이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 분위기가 많이 나는 도시여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가 있으시고 따뜻하시고 순수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이고 새로 오시는 분들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시고 교인들끼리 교제도 잘 하시고요. 물론 교회가 다 그런 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여성목회자를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교회도 있어요.사실 저는 남편도 사역하고 있으니까 남편이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서 1시간 내에 있는 교회를 찾다 보니까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학교와 노회 측에서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해주셨어요.”

그녀는 “목회를 시작한 후 부족한데도 교인들이 사랑으로 덮어주고 있다”며 “삶과 실천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교인들을 보며 많은 도전을 받는다.”고 말했다.

“장애인 모임이 일주일에 한 번 있어요. 그분들을 찾아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선물을 준비했는데 교인들이 기대 이상으로 큰박스로 7박스를 준비하신 거에요.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주저 없이 나섭니다. 자기들이 할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하고 싶어 하세요. 그리고 한국 분들이나 이민자들이 교회를 찾아오면 따뜻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한국 분들이 주위에 많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한인사회에 우리교회를 소개해 보겠다고 했어요.”

▲ 안수받는 김에스더 목사     © 크리스찬리뷰


김 바나바 목사가 섬기는 파라마타 센테너리연합교회는 재적 120여 명, 백인과 한인을 비롯해 아프리카계, 중국계 등 11개 국가출신 교인들이 출석하고 있다.

“제가 다니던 교회입니다. 제 모교회라고 할 수 있죠. 이 교회 역시 백인들 중심교회지만 이민자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떠나가는 것을 많이 봐왔어요. 이것이 안타까운 부분이었어요.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를 찾으면서 이 교회로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학교 측에도 요청을 했고요. 그런데 그 교회는 모교회이니까 학교법에 의해 안 된다는 거에요. 정 원하면 다른 교회를 갔다 와라, 그러다가 결국 이 교회에서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2부 예배를 할 수 있느냐는 거에요.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거다, 그런 부분이 서로 맞아 떨어져 저를 불렀어요.”

▲ 김 목사 부부가 장례식을 마친 후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 크리스찬리뷰

교회는 재정적으로 부유한 교회였다. 그러나 교회 구성원이 대부분 노인들이어서 죽어가고 있는 교회였다. 김 목사는 부임하자마자 3개년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현재 두 번째 단계를 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 단계는 ‘사람을 모으는 일’에 주력했고요, 두 번째 단계는 ‘제자훈련’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제자훈련 받은 성도들이 교회의 리더로 목회와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일’입니다. 현재 2단계로 15명을 제자훈련 시키고 있습니다. 나이는 20세에서 69세까지이고요.

이민자들이 절반, 백인이 절반, 젊은이들이 절반 나이든 사람이 절반, 남자가 절반, 여자가 절반입니다. 그러니까 남녀, 이민자와 백인, 연령의 비율을 잘 맞춰서 15명을 택하여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2년째인데 또 2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훈련이 끝나면 이분들로 하여금 리더로 목회와 지역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게 합니다. 성도들이 행복해 해요.”

김 목사는 그동안 목회에 관한 컨설팅으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뭐니 뭐니 해도 성도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며 교제한 것이라 했다. 그는 이를 ‘예수님의 식탁교제’라고 부른다.

“지금도 아내와 함께 한 달에 한 번 양쪽교회 교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하고 있는데 지난 3년 동안 성도 250여 명을 한 달에 10여 명 씩 초대를 해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집은 주일만 되면 우리교회 사람 아내 교회 사람으로 늘 들끓어요. 저는 예수님의 식탁교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사실 교회에서 ‘하이!, 하와유!’ 그러고 나면 끝이거든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잘 몰라 다시 만나도 서먹서먹해요. 그러나 식사를 하게 되면 분위기가 확 달라져요. 그리고 보통 4시간 교제가 기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장단점, 은사가 막 나와요.

아, 저 사람의 좋은 장점을 잘 활용해야겠구나. 아, 저 사람은 이런 어려움이 있구나. 그러니까 성도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돼서 제자훈련 시키는데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내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아요.

또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도 꼭 집으로 초대하여 기존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식탁교제가 저에게는 중요한 목회의 하나입니다.”

김 에스더 목사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식사교제는 한인 목회자들의 장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백인 목회자들은 그렇게 못해요. 우리는 이것도 목회의 연장선이다 생각하고 하잖아요. 성도들을 초청해서 식탁교제를 하는 게 목회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심지어 어떤 분들은 백인 성도들인데 그렇게 오래 교회에 다녔는데도 서로를 잘 몰라요.”


▲ 파라마타 센터너리 연합교회당 입구에서 김 목사 부부                   © 크리스찬리뷰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교회 성도 두 분이 무릎 수술을 동시에 받으셨어요. 수술 후 재활실로 가셔서 물리치료를 받고 계셨는데 심방을 가서 보니까 두 분 간격 사이가 1미터 정도 밖에 안됐어요. 제가 한가운데 서서 하이! 하면서 두 분 볼에다 뽀뽀를 했는데 한 분이 ‘저 분이 누군데 뽀뽀 합니까?’ 그래요. 그래서 서로 모르냐고 그랬죠. 그랬더니 모른대요. 우리교회 다닌 지 30여 년된 분들이거든요. 같은 교회를 30여 년 함께 다녔는데도 서로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백인교회가 가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교회 오면 자기가 앉는 지정석이 있어요. 아무나 못 앉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끝나면 가고, 그러니까 두 분은 30년을 서로 다른 의자에 앉았던 거에요. 서로 오고가는 시간도 다르고요. 그 충격이 너무 컸어요.

한국인교회는 예배 끝나면 식사하지 않습니까? 그 때 서로 인사하고 새로운 분들도 알게 되고요.”

김 에스더 목사가 덧붙였다.

“그 교회 주변에 아파트들이 굉장히 많아요. 아파트가 있다는 것은 젊은이들과 이민자들이 많다는 얘기잖아요. 사실 가만히 있어도 새로운 분들이 많이 교회에 나왔다가 슬그머니 나가요. 그래서 백인 사역자들을 보면 마음은 따뜻해도 이 마음을 잘 표현 못하세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새로 오시는 분들을 잘 섬기는 은사가 한국 목회자들에게는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오신 분들이 잘 정착을 하고 있잖아요.”


▲ 목사 안수식에서 남편 김바나바 목사로부터 인사받는 김에스더 목사     © 크리스찬리뷰


‘예수님의 식탁교제’는 서로의 벽을 넘어 의사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틀이 됐고 김 목사의 개인적인 비전인 ‘제자훈련’과 발맞춰 교회가 성장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실제로 교회에서 그는 주목받고 있다. 그가 사역한 후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사실 이 교회에는 젊은이들이 없었다. 자연히 어린아이들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아이들이 태어나서 두 살, 네 살 아이가 4명이 있다. 이곳 현실을 볼 때 고무적인 현상이라는 것. 그런데 3명이 또 임신 중이라는 것이 더욱 희망적이라며 교회는 축제분위기다.


그날은 ‘천지가 개벽’하였다

두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연은 남다르다. 이들은 “사업을 하면서도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할 수 없었다”며 “주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살다보니 지금 이 자리에 서있다”고 밝혔다.

“저희들은 캠퍼스 커플이에요. 결혼 후 ROTC 장교로 군에 갔습니다. 양평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때였어요. 처형이 예수님을 전하러 온 거에요. 그 당시 처형은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 얘기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게 사실처럼 들려졌어요. 믿어보고 싶어졌어요. 예수님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어요.”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처형의 얘기를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깝게 지내던 신학생 처형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그래, 한 번 들어주겠다,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하며 시작 한 것이 아닌가. 내내 가슴이 뛰었다. 그 무렵 친구 누나가 교회에 같이 나가자고 권유하면 삿대질하며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그 다음 날 군에 있는 목사님을 찾아가 성경을 읽고 싶은데 성경을 하나 줄 수 없겠느냐, 하니까 성경을 하나 빌려 주시더라고요. 전 사단 상황장교로 있었는데 마침 그날 당직근무였어요. 그래, 밤에 시간이 나니까 성경이나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사실 그 당시 전 담배를 하루에 세 갑씩 피웠습니다. 겨울이니까 난로가 있었고 군화를 신은 채 담배를 물고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실에 검정색 전화가 있었는데 선배 되는 분들이 제대하면서 말하기를 이 전화는 신경 쓰지 마라 이 전화는 청와대 직속 전화기 때문에 지난 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울린 적이 없는 전화다. 그래서 그 전화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안 썼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는 거에요.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죠. ‘네, 당직 김 중위입니다’ 그런데 아무 소리가 없는 거에요. 수화기를 내려놓았죠. 그런데 또 벨소리가 울려 받았는데 마찬가지로 아무 소리가 없어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다시 벨이 울라고 받으면 아무 말도 없고, 그렇게 서너 번 반복되니까 등골이 오싹거리며 식은땀이 났어요.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받으면 아무 얘기는 안하고, 그때 제 마음속에 음성이 들리는 거에요. ‘그 담뱃불을 꺼라 그 담뱃불이 꺼지는 순간 전화벨이 그칠 것이다’ 전화벨은 계속 울리고 난로 위에다 담뱃불을 끄는데 안 꺼지는 거에요. 정신을 가다듬고 담뱃불을 껐어요. 그런데 마지막 불씨가 떨어지는 순간 정말 전화벨이 그쳤어요.
그날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날 그 시간 이후 그의 삶은 하늘과 땅처럼 변했다. 그리고 교회에 첫발을 디뎠다. 처음 가는 교회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고 푸근했다. 하얀 성가복을 입은 성가대의 모습이 눈부셨다. 그들이 찬송가 ‘예수 사랑해요’를 불렀다.

그 순간 ‘사랑’이라는 말이 청천벽력처럼 그의 마음을 내리쳤다. ‘나는 이 나이껏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무엇을 베푼 적이 없다. 누구에게 져 준 적도 없다. 누구를 너그러이 용서해 본 적도 없다. 오직 내 위상과 안전을 위해서만 이를 악물고 아등바등 피땀을 흘려오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삶을 투쟁의 연속으로 생각했던 지난 시절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렸다는 예수님의 삶이 떠올랐다.
그날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바로 자랑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의 표정은 ‘천지개벽’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당황했다.

“장남인데 제사는 어떻게 하구?”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교회를 택했고 어머니는 툴툴거리며 안 가던 절로 향했다.
 

▲ 김바나바 목사     © 크리스찬리뷰

▲ 김에스더 목사     © 크리스찬리뷰


실직자ㆍ노숙자 허기 채워주며 영성 쏟아 큰 결실

“그 당시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어요. 자동차 부품 공장이었는데 규모가 컸어요. 장남이니까 사업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해서 제대를 했죠. 그리고 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주 5일 근무제를 시작했고요. 수익금은 직원들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나봐요. 번 돈을 직원들과 나눴어요. 그리고 그 당시 모두 일급제인데 전 월급제로 했고요. 이런 것들이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사람들은 저를 보고 사업 체질이 아니라고 쑤군거리더라고요.”

그 후 IMF 외환위기가 터졌고 그 역시 좌절과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시련이 오늘날 목사가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니 세상의 낭패는 축복이기도 했다.

“공장 문을 닫았어요.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사랑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새벽기도도 안 빠졌던 것 같아요. '왜 하나님이 공장 문을 닫게 했을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말이지요.’ 그 후 식당을 시작했는데 참 잘 됐어요. 점심시간마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먹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까 식당은 강남에 1개, 강북에 하나, 규모가 꽤 큰 식당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무렵 노숙자들이 많았습니다. 매일 50여 명씩 죽어갔을 때였으니까요. 매주 토요일마다 저희들이 서초, 반포복지관에 가서 노숙자들에게 식사대접을 했어요. 돈을 벌기보다는 노숙자들을 섬기자. 물론 토요일 식당 문을 닫았고요. 아이들도 같이 가서 설거지를 했어요.”

독거노인과 실직자 노숙자들이 몰려들었다. 밥 한 공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국 한 그릇, 김치 등이 담긴 그릇들은 갖다놓기가 무섭게 동이 났다. 비록 1식이지만 사랑이 담긴 밥과 뜨거운 국은 허기 이상의 것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힘이 들어 한 번쯤 건너뛰고 싶을 때도 이곳이 아니면 굶을 수밖에 없는 얼굴들이 떠올라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그 절박함과 절실함을 공유하고 싶어 노숙자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이들은 무료급식을 한다고 했을 때 몇 달이나 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산에서 올라왔으니 자리를 잡기 위한 형식적인 일이라고 넘겨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 년이 넘도록 계속되자 이들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면서 저희들한테 아픈 얘기도 꺼내며 신앙상담까지 하기에 이르렀어요. 참 많은 분들을 교회로 인도했지요. 남의 말을 들어주고 그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을 하고 그분들을 교회로 인도하게 되면서 이런 은사가 우리들에게 있었구나,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돈보다 가치있는 보화를 발견하면서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꼈어요.”

그날따라 이상한 기분이었다. 거룩하고 충만한 성령이 느껴졌다.

“한 교회 가서 설교 듣는 것이 성이 안차는 거에요. 마음에 불이 타오르니까. 한국은 대형교회들이 많으니까 시간에 맞춰 설교를 들을 수 있잖아요. 주일날 세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들었어요. 그런데 간 교회마다 창세기 12장 말씀을 가지고 똑같은 주제로 설교를 하더라고요.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는 기간이 아니었는데요.”

순간 가슴이 뛰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마음속으로 떠나라는 말씀이 들려왔다. 하나님의 뜻은 이들에게 이렇게 갑자기 전해졌다. 주님께서 그들을 사역자로 부르고 계신 것이었다.

“저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게 되면서 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노숙자 섬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더 깊이 우리 삶을 올인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 같았어요.그런 가운데 유학원을 찾아갔더니 호주를 권하더라고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깜짝놀랐어요. 식당일을 하니까 아이들하고 지낼 시간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대신 용돈을 충분히 주고 사고 싶은 것 사게 하고, 먹고 싶은 것 사서 먹게 했죠. 그런데 그날 집에 들어가니까 아이들은 이미 잠이 들었고 불을 켜보니까 아이들이 스티커를 벽에 붙이며 놀았는데 호주 지도가 벽에 그려져 있는 거에요. 타스마니아까지 그려져 있더라고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호주로 인도하시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 무렵 그들은 한마디로 ‘잘 나가던’ 때였다. 지인들은 ‘미친 짓’이라며 말렸다. 그 넓은 길을 놔두고 왜 그 좁은 길을 택하는가, 한마디로 왜 사서 고생하는가.

“그 당시 식당 주변으로 50층 빌딩 두 개가 완성이 됐어요. 그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주변에서 돈을 갈고리로 긁어 모은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의 종의 길을 택했다. 그러니 인간의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는 그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요 택함 받은 자의 막중한 은혜이다.


▲ 목사 안수를 받고 첫 번째 성찬식을 집례하는 김에스더 목사.     © 크리스찬리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

이들이 호주에 온 것은 1999년 11월 4일.

“저희가 나이도 많고 영어도 잘 못하고 어떻게 영어권에 가서 목회를 준비하라는 건지 앞이 캄캄하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사라한테 아이를 갖게 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사라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들면서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저희들을 부르셨으니까 하나님이 가능케 저희들을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이내 마음에 평안이 왔어요.”

이민생활에 있어서 첫 번째 장애물은 언어. 이들은 영어 학교에 다니면서 홈 청소를 병행하며 주의 길을 닦았다.

“대학준비반이었습니다. 큰 아들 나이 또래하고 영어공부를 하는데 영어가 언어로 들리는 게 아니라 농기계 부서지는 기계음으로 들리는 거에요. 이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이들은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언어문제를 해결했다. 그들만의 생존 영어 방법이다. 나이가 들다보니 새로운 단어를 외우는 게 쉽지 않았다.

“책 한 권을 사면 나눠보면 되잖아요. 그런데 저희들은 책을 사면 꼭 2권씩 샀어요. 그래서 저희가 갖고 있는 모든 영어책은 두 권씩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올 때 좋은 책들을 많이 가지고 왔는데 하루에 보통 18시간씩 영어공부를 했어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기억력은 떨어지는 반면에 이해력은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영어를 외우려고 하지 않고 영어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3개월 지나니까 영어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 에요. 영어공부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영어점수를 받았습니다.”

호주연합교회 신학교를 택한 이유를 물었다.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한결같이 호주연합교회 신학교를 추천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가서 상담을 해보니까 이민자들에게 문이 열려있고 특히 여성목사 안수의 길도 열려있고요. 함께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 영어가 잘 들릴 줄 알았어요. 첫 수업인데 영어가 하나도 안 들리더라고요. 신학용어도 생소하잖아요. 일 주일에 4백-5백 개 단어를 서로 나눠 찾아가지고 공부했어요. 자연히 잠자는 시간이 줄어들었죠. 일 년을 그렇게 찾다보니까 2년차는 단어 찾는 횟수가 없어져요. 3년차가 되니까 사전 없이 원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됐어요.”

여기에서 그들은 이 말을 보탰다.

“약하면 약한 모습 그대로 보여줘야 합니다. 창피해도 그냥 열어 보입니다. 잘난 척하고 자신을 감추면 그냥 무시하고 도와주지 않아요.”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목사 후보생 신청을 했다. 그런데 더 이상 유학생에게는 목사 후보생 자격을 줄 수 없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면 어떻게 사역하라는 것인가” 당황했다. 가도하며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해요. 마침 그때 18세 미만 이민항목이 생겼어요. 우리 아들이 그 항목에 걸리는 거에요. 우리 아들이 이 항목으로 영주권을 받게 되고 아들이 우리를 초청하는 식으로 해서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18세 미만 이민 항목이 바로 없어졌어요. 그리고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않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더라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 다문화교회를 꿈꾸는 부부 목사는 여러 민족이 매주일 같이 모여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며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목회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다문화교회 모델 만들어 간다

그들은 앞으로 목회를 충실히 감당해서 달려갈 길을 완주하는 것이 목표. 그러나 한 가지 꿈이 더 남아있다. 바로 ‘다문화 목회’다.

김 에스더 목사는 “지역의 특성을 살려 그 장점을 가지고 목회를 할 생각”이라며 “교회 가까이 은퇴마을이 있는데 그 분들을 섬기면서 교회에 나오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말은 교회 구성원이 전부 백인이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하셔서 누구든지 교회에 나오면 반갑게 맞이할 거에요. 그래서 영어권 예배에 오시고 싶은 분들은 제가 있으니까 오셨으면 하고요. 그래서 그분들이 다른 이민자들과 예배를 드림으로 인해서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 되어 여성이나 남성이나 어느 민족이나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간다는 것을 그분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바나바 목사는 “지금 5년이 됐지만 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투표를 하게 되면 항상 100% 찬성이 나온다.”면서 “노회에서도 100% 찬성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 그게 고맙다.”고 말했다.

“현재 11개국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는데 그 중 한국 분들이 20여 명 계십니다. 앞으로 다문화교회를 꿈꾸고 있는데 여러 민족들이 매주일 같이 모여서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실천하면서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저희들의 목표입니다.”

아이들을 돌봐주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산다는 이들 슬하에는 동우(28) 모세(22) 두 아들이 있다.

‘사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는 얘기를 주저함 없이 자연스럽게 말하는 김 목사 부부.

기자를 배웅하는 김 목사 부부의 얼굴에선 편안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앞만 향해 달리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긴장된 얼굴이 떠올랐다.〠
 
 

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