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노(老) 전도사의 일생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김명동/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1/01 [11:43]
▲시드니 최초의 여전도사로 일했던 홍순춘 전도사는 1983년 7월 호주로 이민와서 1991년 1월 6일 3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서 은퇴했다. ⓒ크리스찬리뷰

스물하나에 혼자 몸이 되어 어린 유복녀를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주의 종의 길을 택한 홍순춘 전도사. 그런 어머니의 비장한 각오와 불타는 믿음의 삶은 불행을 축복의 그릇으로 쓰임 받게 만든 거룩한 여자의 일생이었다.
 

뜨거운 가슴을 지닌 만년 소녀

홍 전도사는 와이타라 정부주택에 살고 있다. 그녀의 집을 찾아갔을 때 팔순을 넘긴 은발의 노 전도사는 해맑은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참 고운 얼굴이라는 느낌. 소녀 같은 수줍음도 남아있었다. 일생을 기도해온 주의 종이라 영혼이 강건하기 때문일까. 신앙으로 함빡 익은 향내 나는 과실을 연상케 했다.

어딘지 모르게 신이나 있는 표정의 그녀와 눈인사를 나누는 것도 잠깐, 그녀는 우리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찬의 검소한 삶이란 이런 모습일까.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실 한편에는 오래된 소파, 저렴해 보이는 탁자와 의자, 성경문구가 적힌 빛이 바랜 벽걸이 액자와 공로패, 낡은 시계 등 노 전도사의 삶이 묻어나는 소박한 가재도구들이 놓여있었다. 벽에 걸어놓은 달력에는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있다. 궁금하여 살펴보니 하루 일정과 가족의 생일 등을 적어 놓은 것. 기자가 신기하여 물었다.

“이날도 생일 다음 날도 생일 또 그 다음 주도 생일, 아니 이달에 생일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홍 전도사 자택 거실 벽에 걸려 있는 달력 ⓒ크리스찬리뷰
 
 
홍 전도사가 자랑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번 달이 제 생일인데 생일이면 서로 대접을 하려고 해요. 딸은 딸대로 자기가 하기를 원하고 손자 손녀들도 자기 집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회덮밥 해드린다고 야단법석이고 그래서 날짜를 아예 정해줬어요. 그리고 또 함께 교회를 섬기던 권사님이 생일을 기억하시고 교역자를 대접해야 한다며 만나기를 원하시고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아요.”

홍 전도사는 벽에 걸어 놓은 자녀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키운 자녀들이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며 공경하면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 장수하리라”는 축복을 주신다는 첫 계명의 약속이 떠올려진다.

끌끌한 가족을 소개하면 외동딸 신재호(60) 사모의 남편이 최정복(66) 목사로 호주 Greystanes 연합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2012. 10.28 은퇴) 손자 손녀는 두 명이고 증손을 다섯이나 보았다. 하나같이 효자들이란다.

건강을 걱정하자 “물론 내 나이쯤 되면 건강을 걱정할 때”라며 “나는 일찍부터 예수님한테 배운 게 하나 있는데 일을 위해서 건강해야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요즈음은 이렇게 기도드린다.

“주님 오래 일할 수 있게 해주시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기쁨을 줄 수 있을 때까지 살았으면 합니다. 그거 못하면 찾아가셔도 좋고요.”

그녀의 음성은 아직도 청청하여 활기가 있다.

홍 전도사는 1956년 청주고등성경학교를 거쳐 1977년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59년 충북 음성 무극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해 동산교회, 대전 제일교회에서 헌신했으며 서울 염산교회를 거쳐 1983년부터 시드니연합교회에서 8여 년간 사역, 이곳에서 목회여정을 마무리지었다. 그 후 사위인 최정복 목사가 시드니교회(형주민 목사)를 개척하자 그곳으로 옮겨 지금껏 섬겨오고 있다. 

▲장신대 신학대학원(목회학) 졸업 기념사진 ⓒ홍순춘

홍 전도사는 1980년 7월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안식관 건립에 전 재산인 땅 1800평을 장로교 총회에 기증했다. 이 기금이 밑거름이 되어 전국여교역자 안식관이 경기도 양평에 세워지게 되었다. 

▲홍순춘 전도사는 은퇴 여교역자 노후를 위해 전 재산인 땅 1천800평을 통합 총회에 기증,  이곳(양평)에 전국여교역자 안식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크리스찬리뷰

6.25전쟁으로 남편과 사별

홍 전도사는 1930년 9월 4일 충북 미원이라는 산골마을에서 아버지 홍종오 씨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조단구 씨 사이 사 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면장이었던 까닭에 면장 집 딸이라 불리면서 자라난 그녀는 모태신앙이다. 그녀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했으나 불신자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늘 괴롭혔다고 한다.

  “어머니는 교회 권찰이셨는데 아버지의 핍박을 보통 받은 게 아니에요. 교회간다고 성경책을 세 번씩이나 찢고 불사르고 했어요. 쌀을 주고 산 성경책인데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핍박 중에도 주일성수를 꼭꼭 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 몰래 성미를 항상 준비하셔서 구역장에게 직접 갖다 주시기도 하고 교회로 가져가시기도 하셨지요.

교회가 집에서 가까웠는데 어머니는 새벽기도도 안 빠지고 다니셨어요. 그때 내가 4살인가, 잠에서 깨어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갔는데 어머니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홍순춘 전도사의 새벽기도 오가는 길 ⓒ크리스찬리뷰
 
 
초등학교 때는 주일학교 성가대와 무용단에 뽑혀 각 교회를 돌면서 합창과 무용 그리고 성극을 했던 것이 그녀의 유년시절이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6년 동안 개근을 하고 중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인 가게에서 일을 할 때도 “성실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매사에 철저하게 책임을 다하는 성격이었다.

“중학교 다니면서 일본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용돈을 아버님께 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요. 그래서인지 내가 교회 나가는 줄 알면서도 아무소리 안하시더라고요. 그러다가 8.15 해방을 맞았지요.”

홍순춘 전도사가 열여덟이 되자 아버지는 결혼을 서둘렀다. 홍 전도사는 다음 해 신보식 씨와 결혼을 했다.

“시댁은 종손 집안으로 유교적 관습이 깊이 뿌리를 내린 집안으로 시아버님은 한의사였어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보살피기도 하고 면장으로 30여 년간 봉사한 존경받는 유지였지요. 남편은 일본에서 공부하여 직장생활 하던 중 해방이 되어 귀국하게 되었고요. 이런 시댁식구들의 극진한 대접과 사랑을 받으며 행복했어요.”

그러다가 6,25를 만났다. 전쟁은 그녀에게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남편이 인민군 총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녀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아직도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는데 전쟁이 일어났어요. 이른 새벽인데 총소리가 들리더니 인민군들이 몰려 오대요. 인민군이 시아버지를 붙잡아갔어요. 피하여 있던 남편이 돌아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보고 오겠다며 아버님을 찾으러 나섰어요. 그런데 아버님은 돌아오셨는데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거에요. 그런 후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한 사실을 40일 만에 알았지요. 시신을 찾았는데 부패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신발과 옷차림으로 겨우 알아볼 수 있었는데 전쟁 중인데도 장례를 치렀습니다.”

전쟁의 아픔은 우리 민족 전체의 아픔이라지만 “그때 안 나갔더라면 ...”하는 홍 전도사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저려왔다.

“9개월 후 딸을 낳았습니다. 유복녀이지요.”
 
▲6.25 사변중 유복녀로 태어나 어려운 시기를 보낸 홍순춘 전도사의 외동딸 신재호(가운데)는 간호사가 되었다. 왼쪽은 대전제일교회 김만재 목사. ⓒ홍순춘
 
 
하나님에 대해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하나님이신가. 끝까지 왜 축복 안하시는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하나님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자칫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얕은 생각과는 다르신 분임을 나중에야 깨닫고 회개했다. 이 땅에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이 아님을 알았다. 그 남편의 죽음을 통하여 기도가 눈물의 기도가 되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되었다.

며칠 후 시어머님마저 세상을 떠났다.

“대농가의 큰살림이 갑자기 나에게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홀로 되신 시아버님과 어린 시동생들을 돌보야지요, 갓난 피투성이 딸이 있지요. 일꾼들 밥해 먹여야지요. 앞이 캄캄했어요.”

홍 전도사는 신앙의 줄을 붙잡고 그 비운을 극복하려고 안간 힘을 다했다. 그렇게 4년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 인생의 허무를 느꼈습니다. 친정어머님이 보고 싶어지대요. 시아버님께 말씀을 드렸지요. 친정집에 다녀오겠다고요. 그렇게 해서 6년 만에 친정에 갈 수 있었지요. 그리고 다음 주일날부터 어머니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교회를 갔습니다. 그 감격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뒤부터 홍 전도사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다니며 딸이 훌륭하게 성장해달라고 기도했다.
 

삼각산에 오르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성경 읽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흥회하는 곳마다 집회하는 곳마다 찾아다녔어요. 어느 날 삼각산 기도원집회에 참석했는데 은혜로웠습니다.”

홍 전도사는 이날 결혼반지인 금반지와 가지고간 모든 패물들을 몽땅 하나님께 바쳤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2시쯤 되었을까. 그날따라 이상한 기분이었다. 거룩하고 충만한 성령이 느껴졌다. 그때 비몽사몽 가운데 환한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키가 크고 발에 끌리는 하얀 옷을 입으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저를 쳐다보시는 거에요. 금방 예수님이신 줄 알았어요. 눈물이 쏟아지면서 회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필름처럼 나의 어려서부터 지은 죄로부터 시작해서 이때까지 지은 사악한 죄들을 다 고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도 모르게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잠깐인줄 알았는데 그새 두서너 시간도 더 흘러간 것을 알았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 그녀를 사역자로 부르고 계신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기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한 번도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난 아닌데, 난 아니야. 여자인 내가 왜. 난 전도사 체질이 아니야”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도 그녀의 영은 이미 ‘아멘’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사역하라는 것인가”

확실한 말씀이 없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다시 엎드렸다. 그런 후 주일날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목사님이 청주고등성경학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삼각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면서 홍 전도사는 “할렐루야”를 외쳤다.

“그날 목사님과 함께 기도하게 되었고 마음에 성령님이 허락해 주셔서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지요.”

청주가서 신학교에 다니겠다는 딸의 말을 듣고 처음에 아버지는 당황했다.

“전도사가 되겠다는 거냐?”

 “네, 아버지”

“아이는 어쩌구?”

“공부 마칠 때까지 좀 길러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생각해보자고 하셨다.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스물여덟의 홍 전도사는 일곱 살 된 재호를 친정집에 맡기고 청주로 떠났다.

“그렇게 되니까 시댁에는 못 가게 됐지요. 나중에 맏동서가 저를 데리러 왔는데 시아버님이 찾는다는 거에요. 공부를 하고 있다고 되돌려 보냈지만 마음은 안 좋았어요.”
 

주의 종의 길로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는데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미국인 선교사님 집에 가서 재봉틀 일을 했어요. 제가 만드는 일은 인형 옷이었는데 만든 인형 옷을 미국으로 보내면 미국선교회에서 팔아 돈을 보내주었어요. 기숙사비 내고 학비 내고 딸 아이에게 용돈 보내주고요.”

단단한 결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친정에 두고 온 어린 것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미만 알고 어미만 찾던 것을 떼어놓고 온 어미가 어찌 딸의 생각을 반시라도 잊을 건가. 숨어서 울었다. 날씨가 추워지니 더욱 생각이 났다. 치마꼬리를 붙잡고 “엄마, 엄마”하며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딸아이의 엄마 찾는 울음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제나 어린것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볼 것인가.

“정말 어려운 세월이었습니다.”

홍 전도사는 그 질곡의 세월이 일부나마 고개를 들고 일어나자 참던 눈물을 흘렸다. 기자의 두 눈에도 어느 새 그렁그렁 이슬이 맺혔다.

홍순춘 전도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첫 목회지인 음성 무극교회로 떠났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이때 합치게 됐다.

“전종근 목사님이 숭실대 대학원에 다니시게 되어 본의 아니게 그 교회를 떠맡게 됐어요. 졸업선물로 받은 밥그릇 하나, 수저 한 벌 그리고 이불 짐 하나, 살림 짐이라는 게 그게 전부였지요. 짐을 싸가지고 가보니까 사택이 교회에서 30분 거리에 있었는데 사택이라고 해야 혼자 사는 어느 집사님 댁이었어요. 방 한 칸이 길게 있어서 집사님은 부엌 안채에서 살고 우리 모녀는 골방인데 농사 진 곡식을 보관하는 그런 방이었어요. 그러니까 위쪽에는 곡식이 있고 두 모녀가 간신히 누울 자리만 있는 거에요.

그 다음 날부터 교회 종을 치며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주일설교를 시작했지요. 그 당시 무슨 책이 있었겠어요. 하나님이 영력을 주셨어요. 교회는 흙벽돌로 된 초가집 창고였는데 교인이라고 해야 장년 8명 어린이 10명이 전부였어요.”

눈물의 기도는 새벽마다 하늘 보좌를 흔들어 댔고 날이 밝으면서 산과 들과 도랑을 건너 가가호호 방문하며 전도했다. 그리고는 눈물 콧물을 치마로 훔치면서도 그녀는 딸 재호가 명철하게 자라주는 것이 큰 낙이며 위로였다.

생활은 말이 아니게 쪼들렸다.

“성미 두 말을 줘서 밥은 먹었는데 그릇이 있어야죠. 옛날에 푸닥거리하고 사잣밥이라고 해서 그릇에 밥을 담아 논두렁에 버리는 게 있었어요. 그 접시를 주워 닦아서 반찬 그릇하고요, 상이 있었나요? 뭐. 사과궤짝 위에 그릇 몇 개 놓고 먹었어요.

마침 텃밭이 교회에 있어 채소 길러서 먹고 아이 건강을 위해 가끔 생선을 사서 아이에게 해주고 아이가 고생을 했지요. 이런 환경 속에서도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참 착했어요.”

홍 전도사는 그때 일을 아프게 떠올린다. 딸애에게 내복을 그때그때 사 입힐 수가 없어서 해진 데를 잘라 잇대다보니 세 토막 내복이니 삼층 내복이니 하며 놀려 대기도 했다 한다. 모두 주의 종이 걸어온 눈물겨운 생활이다.

교회는 부흥되어 장년 30여 명, 어린이 5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살핌을 감사하며 시무하고 있던 중 홍 전도사는 어느 날 청주에 있는 기숙사 사감선생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어느 기독교 기관에서 직원을 채용하는데 내가 생각이 나더래요. 그러니 올라왔으면 좋겠다. 교회에 사표를 냈어요. 그런데 사표를 냈다고 금방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며칠 후 사감선생님께 갔어요. 그런데 늦게 오는 바람에 이미 다른 사람을 채용했다는 거에요. 정말 큰일 났대요. 직장은 안되고 교회에서는 나왔지요, 딸애는 학교를 옮기려고 그만둔 상태지요.”

홍 전도사는 통곡했다. 사악한 인간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진실로 엄격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받아 주십사 기도했다. 하소연할 때라곤 주님밖에 없었다.


다시 삼각산에 가서 통곡

그러나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홍 전도사가 낙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맹아학원에 계시는 장로님 한 분이 우리 사정을 알고 찾아와 딸애를 학교에 넣어 주셨어요. 그런 후 나는 딸애를 그 장로님한테 잠시 맡기고 삼각산으로 올라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어요. 삼각산 갈대숲으로 들어가 기도하기 시작했죠. 그때는 가을이었는데 바람이 불고 추웠어요. 그런데 얇은 옷 하나 달랑 입고 간 거에요.

사실 입을 옷 하나 변변한 게 없었거든요. 너무 추웠어요. 이럴 바에는 다 팽개치고 아이 곁으로 가버릴까도 싶어 몸부림치며 기도했어요. 주님이시여, 이 여종이 미련했습니다. 더 눈물을 흘리게 해주소서. 얼마나 지났을까. ‘내려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들렸어요. 그런 후 삼각산 본 성전으로 내려왔는데 우리 딸애를 학교에 넣어준 그 장로님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장로님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동산교회에서 목사님 보조자로 사역해 달라는 거에요.

사실 동산교회는 내가 신학공부를 할 때 섬기던 교회여서 성도들 대부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어요.”

그 후 그녀는 동산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역했다. 여기에서 가장 곤욕스러웠던 추억은 장례식 일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런데 한 여 집사님이 나에게 수의를 입히라는 거에요. 전도사가 할 일이라고. 그때는 여전도사가 이런 궂은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한 번은 젊은 여인이 폐병으로 각혈하다가 죽었어요. 예배를 드렸는데 목사님도 유가족도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거에요. 하는 수없이 소독약, 솜 물, 수의를 들고 시신이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피투성이 된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수의를 입혔어요.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런 일을 감당했겠어요. 똥으로 악취가 진동하고 악취 나는 옷을 벗기고 씻기고 옷 입혀 관 속에 넣는 일을 수없이 했어요.”

그녀는 전도사라고 교인에게서 대접은커녕 앞질러 고생하면서 뛰어야만 했다. 위로나 보상은 전혀 없고 봉사만 소리 없이 했다. 하나님은 목회초년생이며 겁쟁이인 그녀를 호되게 훈련시켰던 것이다. 그 후 그녀의 목회사역은 날개를 달았다.

“몸이 아파 괴로워하던 앉은뱅이 청년이 있었어요. 함께 지냈던 미국인 선교사님께 도움을 청했지요. 선교사님은 그 청년을 전주예수병원으로 보내 치료받도록 해주셨어요. 그 후 그 청년은 맹아학교 수학선생이 되었지요. 또 이홍제 청년을 고등성경학교에 보내 등록금을 대주고 공부를 시켰어요. 그가 신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에서 목회를 하다가 미국에 가서 공부하여 훌륭한 목사가 되었지요.”

교인도 늘어가고 목회일이 재미있어지는데 대전제일교회에서 교섭이 왔다. 1996년 4월 홍 전도사는 그 교회로 부임했다. 대전제일교회는 교인 수 1천400여 명으로 당시에는 대형교회에 속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신앙 안에서 잘 자라나는 딸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공의로우신 분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환난은 축복의 보증수표라고 했다. 그 환난을 이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축복을 마련하고 계시는 분이다.

홍 전도사는 이곳에서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가슴에 담긴 지식을 가르쳤다. 옷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옷을, 밥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밥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섬겼다.

“교도소, 병원, 도시산업현장, 공군학교, 고아원, 탈출병 등등 마음이 상해있는 자들을 찾아가 다양한 방법으로 돌봤습니다. 재활원 전도는 어린 불구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고요.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교도소 전도 중 사상범인 김응일이라는 청년이 있었어요. 그 청년이 전향을 했는데 10년간 찾아가 성경공부를 가르쳤지요. 그 후 모범죄수로 석방이 되어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고요. 무엇보다도 교도소 큰 강당에 죄수들 1천여 명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일은 꿈만 같았습니다.”

이러한 빈민선교는 고스란히 서울 염산교회에서도 이어졌다. 홍 전도사는 1977년 10월 서울 염산교회로 부임했다.

“이곳에 오니 말이 서울이지 교인들의 삶이 대전보다 더 빈궁했어요. 아현동, 염리동, 대현동 지역인데 산꼭대기 달동네에 살고 있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심방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지만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기에 오히려 감사했어요. 더욱 감사한 일은 이곳에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목회학 공부를 한 겁니다.

여기에서도 마포경찰서 서대문 구치소 안양교도소, 미혼모의 집, 고아원, 양로원, 병원 전도 등을 도맡아 했는데 물불을 가리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홍 전도사는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안식관 건립을 위하여 자기가 지금껏 모아둔 전 재산인 땅 1천800평을 장로교 총회에 기증했다. 이 기금이 밑거름이 되어 경기도 양평구 용문면 마용리에 6층 건물의 안식관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당시 은퇴한 여 교역자들의 노후를 위해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었습니다. 처음 안식관 건축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많은 이들이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하며 의문을 가졌어요. 마치 90세의 늙은 사라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실제로 아들을 갖게 되었고 그후 기쁨과 감사가 넘쳐 다시 웃었습니다. 처음 웃음과 나중 웃음은 똑같은 웃음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내용에 있어 전혀 다른 웃음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안식관을 건립한다고 하니 사라가 웃었던 것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끝내 안식관은 건립되었어요.”
 

크리스찬 삶을 묻다

홍순춘 전도사가 시드니에 도착한 것은 1983년 7월, 딸의 초청이었다.

“딸이 시드니에 먼저 와 있었어요. 사위가 시드니대학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 후 사위는 귀국하여 한남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호주로 다시와 신학 공부하여 목사가 됐어요.

그리고 딸애가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 출석하게 됐고요. 반 년이 지나 정식으로 그 교회 전도사로 임명이 되었지요.”

홍 전도사는 1991년 1월 6일 시드니 연합교회에서 3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은퇴했다. 

▲최정복 목사(오른쪽) 가정과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서 가족찬양하는 홍순춘 전도사. ⓒ홍순춘

홍 전도사의 하루 일과는 새벽 4시 30분 기상으로 시작된다. 잠시 묵상한 후 전철을 타고 교회로 향한다. 새벽기도는 자녀들뿐 아니라 교역자, 열방을 위해서 그리고 기도 부탁받은 사람들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하려면 그녀의 말마따나 ‘정신없이 기도해야’ 한다. 게다가 한국에 아는 성도들까지도 기도 식구 명단에 얹혀진다. 새벽기도회가 없는 주일날은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 찬송가를 부르고 시드니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강단에 은혜의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주중에 약속이나 볼일이 있을 때는 새벽기도회 마치고 집에 갔다가 다시 나오려면 힘드니까 교회에서 아예 오랫동안 기도하다가 차 한 잔 마시고 볼 일을 보러 갑니다. 그리고 월요일 하루는 무조건 쉬는 날입니다. 이 날은 집안 일을 하지요. 빨래도 하고 정원도 가꾸고 밭일도 하고요.”

기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사의 격랑을 살아오셨다. 크리스찬에게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고.

“가장 귀한 것이 주일성수 잘하는 거지요, 뭐. 운동이다, 컴퓨터 게임이다, 골프다, 이런 것들이 발목을 잡아요. 또 십일조생활, 헌금에 너무 인색해요. 그리고 기도생활입니다.” 
 
▲홍순춘 전도사의 주일 오후스케치 ⓒ크리스찬리뷰

홍 전도사는 마지막 화살을 교회로 돌렸다.

“요즘 목사님들 기도가 너무 부족해요. 우리 사위가 외국인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외국인 교회는 새벽기도회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최 목사한테 새벽기도회를 안 하는 대신 목사 혼자라도 가서 하라고 그랬어요. 한번은 내가 딸집에 가서 자면서 사위를 데리고 교회로 가서 새벽기도를 드린 적이 있어요. 그때 ‘목사님, 강대상으로 올라가서 하세요.’하고 말하기도 했는데 기도의 뒷받침 없이는 목회가 힘이 듭니다.”

그동안 현장에서 배운 그녀의 쓰고, 달고, 기가 막히고, 눈물겹고, 기쁘고, 은혜로운 목회 체험들이 오죽이나 많은가. 그러나 참는 눈치다.
 

백발 노 전도자의 남은 소망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소원이 뭐냐고 물었다. 예수 잘 믿고 기쁘게 하나님 앞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두툼한 사진첩들을 내왔다. 사진첩에는 그 옛날 힘차게 전도를 하던 모습들을 찍은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를 회상하는지 그녀는 즐겁게 웃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간 홍 전도사는 액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영정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액자 리본, 머리 핀, 장례감사헌금 그리고 가정교훈과 유서까지도 미리 준비를 해 놓았다.

“묘지와 수의도 준비해 놓았지요. 나는 정부 연금으로 살지만 누구에게든지 내가 대접하면 대접했지 받는 성격이 아니에요.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지금까지 자녀들에게 단돈 10불도 용돈 달란 적이 없어요. 어떤 때 성도들이 대접한다고 데려가면 몰래 먼저 돈을 내요. 대접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심방가면 어려운 가정이 있잖아요. 돈을 손에다 쥐어주고 와요. 그러면 그렇게 고마워해요.”

▲홍순춘 전도사는 천국갈 준비를 이미 마쳤다. 영정사진, 액자 리본, 묘지와 수의, 장례감사헌금, 유서 등을 모두 준비해 놓았다. 그는 월요일은 무조건 쉬는 날이다. 빨래도 하고 정원도 가꾸고 밭일도 해야 한다. ⓒ크리스찬리뷰

홍 전도사는 어린 시절 자다가 눈을 뜨면 어머니가 꿇어 앉아 기도하고 계셨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그 사랑의 눈물을 평생 잊지 못한다. 홍 전도사도 그렇게 살아왔다.

자녀들이 홍 전도사의 그런 충성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으니 그 이상의 큰 교육이 또 어디 있겠는가. 반드시 그들도 어머니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모를 잘 만난다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 했다. 더욱이 기도하는 어머니의 만남은 일생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

대담 후에 우리는 최상의 정성이 깃든 점심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야채와 생선, 닭요리와 불고기와 국 등이었는데 그릇 하나에서부터 숟가락과 냅킨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알뜰할 수가 없었다. 홍 전도사는 야채는 집에서 직접 키운 것이라고 말했다. 대접하는 게 그렇게도 유쾌한지, 노상 웃으면서.

홍 전도사는 자동차가 주차해 있는 골목길까지 나와 “잘가요”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비록 몸은 쇠하였으나 주님 품에서 젖 뗀 아이처럼 어여쁘고 어여쁘다.
 

에필로그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 그 사랑.

기자는 이 지혜롭고 큰 그릇을 가진 홍순춘 전도사에게 큰 감동을 느꼈다. 자신과 공동체, 조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성령이 임하기를 갈구하는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기자가 가진 열정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시편 71편 말씀대로의 심정이다.

이제 하늘의 상급이 남아 있을 뿐이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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