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음의 여정에 함께 하는 이들

‘Others on my journey’

김동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2/26 [10:41]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표현이 있다. “If you want to go fast, you go alone, but if you want to go far, you go with others.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라. 그런데, 멀리 가고 싶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가라.”

2013년 한해를 시작하는 시점에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지혜의 말이다. 성경에서도 ‘이웃|타자 others’ 나 ‘타자성 otherness’에 대한 말씀들이 많은데 그 성경 말씀들의 공통적인 결론은 ‘하나가 되는 것,’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내용은 성경이 제시하는 ‘믿음의 공동체 community,’ 즉 ‘모이기에 힘쓰는 믿는 자들의 모임 ubuntu’의 삶과 모습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모이기에 힘쓴다’는 말이 낡은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말에는 ‘지정된 공간적인 장소에 사람들이 모인다’라는 ‘단정적인 명제형(definitive)’의 의미도 있지만, ‘한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공동의 관심사로 모여서 하나가 된다’라는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진행되는 상태의 명령형 (imperative)’의 의미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모이기에 힘쓴다’를 굳이 영어로 표현하면 ‘to gather together’ 가 된다. ‘to gather, or to assemble’이라는 말은 ‘여럿이 함께 모인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는 ‘together’말이 주로 따라 붙는데 이 말의 뜻도 ‘함께 모임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의미의 단어가 합쳐지니 그 뜻이‘여럿이 함께 한 장소에 모여 서로 하나가 된다’로 해석된다.

쉬운 예로 축구 경기를 들면, 특정 경기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경기장에 모여든다. 그 경기장에는 인종, 언어, 문화등의 모든 면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gathering’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면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이름을 함께 외치면서 하나가 된다. ‘togethering’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자신들이 하나가 되어서 응원한 팀이 이긴다면, 경기 이후의 ‘togethered’된 공동체의 모습은 인종, 언어, 문화를 초월하는 서로 하나된 모습이다.

호주는 First Peoples 로 불리는 ‘호주 원주민 (Aboriginal and Torrest strait Islander)들의 사회’와 ‘Second Peoples로 규정되는 이민자들의 사회’로 구성된 나라이다. 결국 호주는 대한민국에서 호주로 이민와 정착한 사람들인 ‘한인 사회(Korean society), Korean gathering’과 같이 호주라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여러 First & Second Peoples의 크고 작은 모임들이 모여서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다.

그런데 이 많은 민족들과 크고 작은 사회들이 호주라는 장소에 모여있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호주라는 사회는 아직까지는 ‘gathering’ 단계에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한인 사회나 호주 전반적인 사회가 ‘gathering’단계에 머물고 있는 여러가지 사회적 현상들이 있다. 인종차별, 타인종 폭력 등이 대표적으로 표출된 현상들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인 사회뿐 아니라 호주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보편적인 방향이 생긴 것인데, 그것은 ‘gathering의 사회’에서 ‘togethering의 유기적인 공동체’로 성숙해 나아가는 것이다.

1887년에 독일 사회학자 Ferdinand Tonnies 박사에 의해서 출판된 ‘Gemeinschaft and Gesellschaft : community and society’의 개념에 의하면 ‘gathering’의 사회(gesellschaft/society)와 ‘togethering’의 공동체(gemeinschaft/community)는 서로 별개로 존재하지 못하고, 또한 서로 공존하지 못하는 상관/대립관계 속에 존재한다. 즉 사회가 발전하면 공동체가 사라지고, 공동체가 발전하면 사회가 약해지는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딜레마(dilemma)라고 부른다.

전쟁에 참여한 한 장군이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전쟁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의 승리를 위해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할 것인가와 같은 딜레마인 것이다. 그런데 딜레마라고 규정되는 ‘상관과 대립의 공존’이라는 개념이 최근에 개인적인 관심으로 접하게 된 핵융합 관련 책을 참고해 보니, 핵융합 원리의 핵심이다. 에너지는 ‘상관과 대립이 공존하는 구조’ 안에서 형성이 되는데, 그렇다면 ‘사회와 공동체’의 상관과 대립의 공존이 사회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전에 형성되지 않은 새로운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결론을 내리면, 우리가 ‘모임, 사회(gathering, society, gesellschaft)’에 머물러 있으면 끊임없는 딜레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만을 판단하는 진보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 영원히 갇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내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아, 즉 성경에서 말하는 나의 이웃을 둘러보아 그들과 ‘공동체 community, ubuntu, gemeinschaft’를 이루고자 모여서 힘쓸 때,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가르치는 사회에서 탈피해서 ‘무엇이 더 큰 일인가’를 생각하는 공동체로 성숙하게 될 것이다.

퀸슬랜드주 고등학생들은 ‘OP’(the overall position)라는 내신등급을 받고서 대학에 진학을 한다. 그런데 OP를 잘 받기 위해서는 개인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지만, OP를 잘받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해야 할 것은 자신의 반과 학년 전체가 공부를 잘 해야 결국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들도 OP를 잘 받게 된다.

‘나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과 최고의 OP를 받아야지’라는 옳고 정당한 것만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우리가 함께 열심히 해야지 좋은 결과가 생긴다’라는 더 큰 일을 가르치는 좋은 교육환경이다.

예전에 어느 목사님의 설교 예화이다. 시골에 윗논에 농사짓는 사람이 있었고, 아랫 전답을 관리하는 이웃이 있었다. 모내기를 위해서 논에 물을 대는데, 윗논 주인이 며칠 걸려서 물을 대 놓으면 곧 물이 빠지고, 그래서 다시 물을 길어서 대 놓으면 다시 물이 며칠내로 빠지곤 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조사를 했더니, 바로 아랫 논에 농사짓는 이웃이 윗논 구석의 잘안보이는 곳에 물꼬를 틀어놓고 윗논물이 아래로 흘러 들어오게 해놓은 것을 발견했다. 당장에 찾아가서 따지려고 논길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이런 마음이 들었다.

“과연 내가 지금 따지러 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괜히 이웃과 불편해지면 앞으로 계속 볼 사람인데, 내가 따지지 않고 이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그 농사꾼이 결론을 내리고 다음에 물을 댈 때는 이렇게 했다. 먼저 아랫 논에 물을 대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논에 물을 댔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옳은 일만을 가르치는 사회에 속하지 않고, 요한복음 14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과 또한 더 큰 일을 감당하는 천국 공동체의 백성과 일꾼을 불림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에서 천국 공동체의 마인드와 태도(mind & attitude)를 가지고 살아갈 때에 이 사회와 공동체에 불어넣는 새로운 에너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본 지면을 통해 그 새로운 에너지의 구체적인 형태를 ‘호주 원주민 사회와 한인 사회’ 그리고 ‘Gates vs Jobs’라는 제목으로 다음 호부터 연재할 예정이다.〠


김동원|브리즈번 크로스웨이연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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