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로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목잡이

오페라 가수 테너 김재우

송기태/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2/12/26 [10:50]
올려보아야 할 사람


그는 올려보아야 했다. 키가 훤칠해서 고개를 들고 올려보아야 하지만, 그보다 그가 그동안 이룬 성취들이 그를 올려보게 한다.

“아름다움은 신의 미소, 음악은 신의 목소리”라는 말을 연상케 할 만큼 그의 준수한 외모와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음성은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화음을 빚어내어 만인의 사랑을 받아왔고,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이다.

그가 바로 지난 5년여 동안 영국 오페라단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이제 막 호주로 귀국한 오페라 가수 김재우 씨이다. 이제 막 집을 얻고, 차도 사면서 정착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 그를 만났다. 몇 년 전 호주에서 ‘잘 나가던’ 그가 호주를 떠나게 된 동기부터 추적할 필요를 느꼈다. 가장 큰 동기라면 영국 국립오페라단에서 주역을 하는 것이었다.
 
▲영국 오페라단에서 5년여 동안 열정적으로 활동하다 지난 해 12월 귀국한 테너 김재우 씨. 사진은 모짜르트의 가장 대표적인 비극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 중에서.ⓒ김재우


“호주에서 성악가로서 탄탄한 길을 걷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도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을 때 들어온 것이 영국이었고, 그곳을 위해 기도를 했죠. 당시 콴타스 승무원이었던 아내에게 영국 주재원의 기회가 주어졌고 아내와 상의한 끝에 영국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호주국립오페라단에서 활동할 당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중에서 김재우 씨.ⓒ김재우


호주에서는 벌써 2007년까지 계약이 돼있었고 영국에 2007년 3월에 가서도 7월에 타스마니아 심포니와 ‘멜델스존 심포니’ 공연과 ABC와 음반제작 그리고 12월에 오페라 오스트렐리아와 ‘돈 죠바니’ 등 계약이 있었던 터라 영국에서의 첫 일 년은 호주와 영국을 오가며 스케줄을 소화했습니다. 
 

▲유럽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높인 테너 김재우 씨. 그는 귀국 직전인 2012년 만 해도 40회 이상의 연주를 할 정도로 바쁜 일정들을 소화했다.ⓒ김재우

처음 영국에 갔을 땐 오디션 자체도 제가 갖고 있는 스펙으로도 잘 먹히지 않았습니다. 일단 동양인이고, 바운더리에서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니 처음엔 거들떠도 보지 않더군요. 아무리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주역을 했더라도, 영국의 무대는 호락호락하지않았습니다. 오디션을 위해서 편지를 넣은 곳들에서 답장도 오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8년 초에 본 오디션을 통해 영국 롱보로우 썸머 페스티발에서 ‘라 트라비아타’(한국명: 춘희)의 테너 주역 ‘알프레도’를 맡겨 왔습니다. 영국에서의 첫 공연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일랜드에서 모짜르트의 ‘마술피리’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09년엔 영국 디바 오페라에서 두 개의 오페라 ‘코지 판 뚜떼’와 ‘오르페’로 프랑스 전역과 스위스 그리고 영국에서 40여 회의 공연을 했습니다. 하지만 성악가로서 더욱 더 큰 무대에 서고 싶었던 욕심은 계속 됐었습니다.” 
 
▲영국 BBC라디오 방송 출연 후 반주자를 비롯한 관계자들과 함께.ⓒ김재우


간단하게 요약해서 들으면, 영국에서 활동이 일사천리로 쑥쑥 진행된 것처럼 들리기 쉽다. 그러나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다. 그의 음악과 리듬이 사람들의 영혼 비밀한 곳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더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음악성’이 아니었다. 바로 호주에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영어 문제였다.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국립오페라단으로서 이제까지 동양인이 없을 정도로 보수적(혹은 폐쇄적)인 곳이었으니 당연한 요청이었다.
 

좌절을 넘어

“2008년 말에 영국 국립오페라단의 오디션을 봤습니다. 그 자리에서 캐스팅 디렉터가 관심을 보였고 2009년은 모든 역할이 캐스팅됐기에 커버(역할하는 성악가를 백업하는 역)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영국 국립오페라단과의 첫 경험이기에 그것도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페라단은 저에게 관심을 가졌고 저에게 무대에서의 오디션을 제안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영국국립오페라단은 모든 오페라를 원어가 아닌 영어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오디션이 끝난 뒤 몇 주가 지나서 캐스팅 디렉터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자기 사무실에서 단독 미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나에게도 기회가 오는구나’하는 기쁜 마음으로 미팅 당일에 부푼 마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캐스팅 디렉터의 얘기는 황당했습니다. 저의 노래 실력으로는 ‘라 트라비아타’, ‘리골렛또’ 등 베르디의 역할을 줄 수 있는데, 저의 영어에 있는 약간의 액센트로 인해 역할을 전혀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큰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이유있는 평가였다. ‘고치든지.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럴 때 선택은 너무도 분명하다. 포기하지 않으려면, 아니 그들의 ‘타당한 요구사항’에 맞춰야 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들이 얘기하는 걸림돌인 영어를 고쳐보기로 결심을 했다.

“그 분이 말씀하기에도 저의 영어를 알아듣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관중들이 액센트를 들으면 오페라에 집중을 할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영국 국립오페라에서 동양인을 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유럽 성악가들을 쓸 때는 그들의 액센트를 가지고 이유를 댄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리뷰에도 그 성악가들의 영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평이 있었어도 그들을 쓰는대는 영어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동양인들에 대해 보수성향이 짙은 오페라단이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제가 얼마간의 시간을 가지고 영어를 그들의 기준에 맞게 고치고 다시 오디션을 보겠다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영국인 음악코치와 공부를 한 후 영국국립오페라단에 연락을 해서 오디션을 다시 보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오디션을 보고 저는 잊어버리고 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두세 달이 지난 2009년 초에 연락이 와서 도니제티의 작품 ‘람메르모어의 루치아’라는 작품에서 테너 주역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도 ‘장미의 기사’라는 작품에서 이탈리안 싱어로 공연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호주에 거주하게 되면서 영국을 오가며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 영국 에이전트와 계속 계약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런던 공연 후 지인들과 ⓒ김재우

 
산 너머 산

그 터널같은 난관을 통과하자 서광이 비쳤지만 또 다시 넘어야 할 고개는 많았다. 제일 큰 문제는 비자문제였다.

“처음에는 아내의 동반비자로 3년을 받고 갔는데 더 이상 연장되지 않는 비자였습니다. 그것이 끝날 때쯤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아쉬웠지요. 그때 영국국립오페라단과 한 번 더 후속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전에 공연을 같이 했던 ‘디바 오페라단’에 제가 호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무척 안타까워했어요. 얼마 후에 그 친구들의 메이저 스폰서가 제 노래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분들이 네 소식을 듣고 도와주고 싶다고 한다. 어떻게 더 있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방법은 공부였습니다.

예전부터 여건만 되면 더 공부를 하고 싶었던 터라 석사과정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분들이 제 학비를 대주었습니다. 호주 달러로 학비가 일 년에 3만 불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론 그분들 덕분에 3년을 더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을 학교만 다니면 오페라 필드에서는 잊혀질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영국법상 해외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음악활동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고 권위있는 영국왕립음대(Royal College of Music)에 일 년 만에 끝낼 수 있기를 원한다고 제의를 했습니다. 그들도 성악가가 온다는 게 관심 있었던지, 2학년에 입학시켜 주어 일 년 만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유래에 없어던 일이라 그들도 저를 위해 회의를 했었던 거죠.”

이 기간 동안에 리골렛또과 영국 최고 공연장의 하나인 런던 바비칸 홀에서 엘가의 게론티어스의 꿈을 주역으로 공연하는 등 여러 오페라단에서 공연도 했다. 특히 그는 석사학위를 딴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영국인의 ‘아름다운 후원’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좋은 분을 만나 10만 불 넘는 후원을 받았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음악 일을 못하게 합니다. 그곳에 살려면 5~6만 불의 생활비와 학비를 합하면 10만 불 정도되지요."

이 엄청난 후원에도 불구하고 더 대단한 것은 ‘아무 조건 없는 후원’이라고 했다.

“저에게 후원했지만 전화 한 통 없고, 이메일도 없었습니다. 제가 중간에 네 번 정도 감사편지를 쓴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조건이나 요구가 없었습니다. 저에게 후원에 대한 부담감을 주시기 싫으셨던거죠.

저를 후원하신 분은 비즈니스 하시는 할머니였고, 남편은 수학박사였습니다. 동양인에 대하여 따뜻한 배려와 시선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양자로 중국인과 홍콩인 한 명씩 입양한 분들이지요.”

그 사랑의 빚을 얻어 쓰면서, 그리고 영국 체류 5년 8개월 동안 그의 음악은 더욱 높아지고 깊어졌다. 마음의 느낌을 목소리로 승화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귀국 직전 2012년도만 40회 이상 연주를 할 정도로 바빴다. 일 주일에 한두 번은 보통이고, 몰려있을 땐 세 번 이상까지 할 때도 있었다.


깊어진 신앙

영국 가서 또 하나의 큰 수확은 ‘신앙’이라고 하였다. 그곳에서 조그만 한인교회를 섬기면서 ‘교회 공동체’의 새로운 맛을 알았다고 밝혔다.

“순수한 목사님을 만나서 그분을 통해 공부도 많이 하고, 그분의 삶을 통하여 크리스찬으로서 정도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데 도전을 받고 집사도 되었습니다. 과거 시드니에 있을 때는 시드니 아닌 다른 지역에서 공연이나 일이 많아 본의 아니게 순모임 구역예배 등을 못했습니다. 첫 몇 해는 영국에서의 공연이 주였기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제자반 공부도 마치고, 감사하게도 호주에 오기 전까지 구역장을 2년이나 했습니다.

하나님이 영국으로 왜 보냈을까?’를 생각해보니 저의 신앙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시려는 뜻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정보다 3년이나 더 머물면서 구역장 등 교회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호주에 있을 때는 교회에 깊이 몸담아 봉사하지도 않고 그저 ‘주일 신자’로 살았는데 영국에서 저희 가정이 신앙으로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저희가 섬긴 런던 레인즈파크 교회는 선교에 중점을 둔 교회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의 아테네에 단기선교를 갔었는데 그곳에 있는 많은 난민들을 섬기며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임무가 이것이고 그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영혼들한테는 우리의 선교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의 모태는 신앙으로 출발한다. 뿌리 깊은 신앙가문 출신이었다.

“저는 모태 신앙인으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당연히 교회 산하 유치원을 다녔고 말입니다. 어머니는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를 7세부터 섬기셔서 지금까지 65년을 다니셨습니다. 평생 성가대 대원으로 지내시다가 최근에 권사직과 성가대원직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는데 젊으셨을 때는 성가대 지휘도 하시고 교회봉사에 적극적이셨습니다.”

이런 신앙 가문의 영향으로 그가 처음 호주에 왔을 때는 교회 개척의 창립멤버로 활약하기도 한다.

“제가 브리즈번에서 유학생으로 있을 당시, 전우창 목사님께서 호주로 오셔서 화성장로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그때 저도 창립멤버로 서투른 영어실력으로 각 교회마다 편지를 보내 예배드릴 장소도 얻고 목사님 식구들과 어렵게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교회가 어느덧 20년이 지나 이제 5월이면 목사님께서 은퇴를 하십니다. 제가 꼭 참석해서 축가도 부르고 목사님과 사모님을 축하해 드릴 계획입니다.”

새롭게 갈무리된 신앙으로 시드니에서 새 출발을 다짐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는 신앙이란 한 마디로 ‘놓치면 삶이 골치 아픈 것’이란 기막힌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성악가로서 그는 모든 찬송을 다 좋아하지만 ‘오 신실하신 주’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늘 함께 계신 주님으로 인해 두려움이 없음을 고백하는 찬송이 좋습니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그리고 영국에 갔을 때 주님으로 인해 두려움보다는 담대함으로 나아감으로써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신앙 가문, 음악 가정에서

그의 부모는 그에게 신앙만 물려준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천직이 된 ‘음악’이란 재능을 물려주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연세대, 어머니는 숙명여대 성악과를 졸업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인의 가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랐지만 특히 음악을 삶에서 경험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음악보다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셨기 때문이죠. 하지만 제 안에 잠재되어 있던 성악가로서의 재질은 속일 수 없었는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한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찬양을 하며 계획되어지지 않았던 꿈을 꿔왔었죠. 그러던 중 서울예고에서 피아노와 미술을 전공하던 교회 선배 누나들의 권유로 서울예고 시험을 봤고 합격이 되서 지금까지 성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의(敎義)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음악 때문에 교회에 다닌다”라고 포프는 말했는데, 그는 ‘교회와 음악’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셈이다. 음악으로 쭉쭉 뻗어나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던 그에게 닥쳐온 시련이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10대 때는 사실 큰 문제없이 예고에서 성악공부를 해오다가 대학진학에서 쓴 맛을 보았습니다. 재수를 하며 한 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호주 퀸슬랜드 음악원(Queensland Conservatorium of Music, 현재 그리피스 대학교에 합병됨)의 학장으로 계시던 앤써니 캄덴 선생님이 서울에서 하는 오디션에 친구의 소개로 보게 됐습니다.

장학금을 제공한다는 말에 한국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호주로 생애 첫 해외 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으로 올라가는 시기에 성악 담당 선생님께서 캔버라 호주국립대학(ANU)으로 자리를 옮기시게 됐습니다. 저도 고민 끝에 선생님을 따라 캔버라로 가게 됐죠.

그런데 그 선택이 저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 선택을 하지 않고 일 년을 다른 선생님과 공부한 후에 한국에 들어가서 군대를 나오고 그러한 후의 삶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하나님의 선택이 저를 지금까지 호주에 있게 하신 겁니다.”
 
 
정석을 걷다

‘그 선택’ 이후 그는 성악가의 길을 차근차근 정석의 단계를 잘 밟아갔다고 회고했다.

“처음 오페라단에 들어갈 때는 합창단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영 아티스트로 발탁된 후 주역단원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무리하지 않게 잘 올라갔습니다. 저에게 오페라단에서 큰 전환점은 영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라보엠 주연으로 발탁된 것입니다.

1999년 29세의 나이로 15회에 걸쳐 테너 주인공을 함으로써 오페라단에 저의 자리 매김을 확실히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후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25주년 기념 콘서트 독창자, 존 서덜랜드와 지휘자 리차드 보닝의 결혼 50주년 금혼 기념 콘서트 독창자(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등등 명실공히 호주에서 굵직한 공연들을 통해서 음악인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졸업도 하기 전에 단원이 되어 영 아티스트 주역 싱어로 활동하다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그게 훨씬 낫습니다. 프리랜서는 자기에게 맞는 곡을 고를 수 있고, 자기가 시간조절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전속단원은 주어지는 곡들을 해야 합니다. 자기의 역량이 안맞아도 소화해내야 합니다. 물론 프리랜서를 하려면 극복해야 할 것도 많지요, 그런 것들을 잘 극복하고 조합하면, 프리랜서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경험과 기량을 전속단에서 갖추고 나면 느낌이 옵니다.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활동량이 더 많아졌습니다. 뉴질랜드와 이태리로 가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시간을 제가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악가'란 한마디로 ‘목소리로 마음이 강퍅하고 지쳐있는 사람을 위로해 주는 목잡이’라는 독특한 정의를 내린 그는 오늘도 성악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 길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걸을 것이다. 영국에서 새로운 내공을 길러온 그는 이제 공연과 더불어 후배 양성, 제자 양성에도 눈을 돌리려는 계획도 생각 중이라고 하였다.

“훌륭한 악기(성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 성악가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영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르침의 재미와 기쁨도 경험했습니다. 저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최대한 올바른 길로 이들을 이끄는 것도 선배 성악가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바트에서 열린 멘델스존 축제에 솔리스트로 초청받은 김재우 씨가 TSO, TSO합창단과 공연에 앞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장면.(2007. 8.3) ⓒ크리스찬리뷰


10년 쯤 후에는 당연히 지금과 같은 성악가로 좋은 무대(유명한 곳이나 알려진 곳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리를 들으며 기뻐해 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 있을 것이고, 20년 후에도 공연을 하며 좋은 성악 선생으로 남아있고 싶습니다.”

성악가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도 조언했다.

“성악은 단순히 목소리의 좋고 나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는 기본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밖에 부수적인 것들이 좋은 성악가 그리고 진정한 성악가로 남을 수 있습니다. 쉬운 예로 성악가는 여러 가지 언어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단순히 그 언어를 발음 공부로만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좋은 목소리를 뽐내는 사람으로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 언어를 충분히 습득하여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 단순히 새들이 소리를 뽐내듯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쓰여진 배경 등 그 이상의 것을 습득함으로써 깊이 있는 성악가가 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주연을 맡은 김재우 씨(호주국립오페라단) ⓒ김재우

가정 우선주의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이름과 이미지가 동일한 콴타스 승무원으로 일하던 ‘천사’(배천사)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1998년에 만나 지금의 아내와 2년 정도의 연애 끝에 2000년에 결혼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풀타임 단원으로 있었기에 정해진 휴가가 아니면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멜본 시즌과 시드니 시즌 사이 일주일이 비어서 6일을 잡고 한국에 들어가서 ‘도둑결혼’처럼 해치우고(?) 왔습니다. 돌아온 다음 바로 오페라에 투입(?)이 되서 신혼여행은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혼 후 7개월 만에 신혼여행을 갈 수 있었지요. 결혼 후 첫 아이를 갖기 5년까지는 둘 만의 신혼생활을 맘껏 즐겼으니 신혼여행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영국이라는 곳이 눈에 들어왔고 성악가로서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런던의 상징인 테임즈강의 타워브릿지를 배경으로 런던올림픽 기간 중 가족 나들이를 즐긴 김재우 씨 가족.ⓒ김재우


그의 삶은 ‘가정 우선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가정의 소중함과 가치를 더없이 귀한 덕목으로 삼고 있었다.

“가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내와 두 딸(다희, 7세, 다인 3세)이 있는데,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누구보다 우선이고 그들을 위해서 노래하며 살아갑니다. 그 어느 것도 이들과의 관계에 해를 끼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이 먼저 사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을 지키지 못하며 선교를 하거나 전도의 길을 간다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원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그는 ‘손’을 많이 사용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성악을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기에 다른 길은 생각도 못해봤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오면서 어떤 것에 재주가 있나 생각해 보면, 요리에도 관심이 있고 이것저것 고치는 것도 좋아합니다. 집에 고장난 것이 있으면 일단 뜯어보고 시작을 하죠. 그러면 그 안에서 문제점을 발견을 하고 고치기 시작하는데 큰 기술적이거나 공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면 많이 고쳐내는 편입니다.   
 
▲ ‘마술피리’ 중에서 테너 김재우 씨 ⓒ김재우


그리고 브리즈번에서 유학시절에 같이 살았던 형이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영향을 받았는지, 아니면 먹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인지 요리도 잘하는 편입니다. 칼질은 거의 주방장 이상의 실력입니다. 제 어머니도 음식을 잘하셔서 어렸을 때 그 영향도 분명히 받았을 겁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최고의 의미와 행복은 ‘신앙 안에서 가족과 함께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호주로 귀국한 김재우 씨. 본지는 김재우 귀국 독창회를 2013년 상반기 중 시드니에서 개최할 예정이다.ⓒ크리스찬리뷰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우리 곁에 온 성악가 김재우! 앞으로 그가 들려주는 노래는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약이 되고, 모든 지혜, 모든 철학보다 한층 더 높은 하늘의 계시처럼 들려지기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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