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2/27 [16:18]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산상수훈은 한마디로 세상과 다르게 사는 법이다. Live different!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살고, 이전의 삶과는 거꾸로 살라는 법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달라지는 것, 다르게 사는 것이 곧 새로워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특히 긍휼이 그렇다. 긍휼이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삶이다. 왜냐하면 긍휼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긍휼의 가치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긍휼이 무엇인가? 긍휼은 용서보다도 선행되는 것이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참된 용서를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입으로는 쉽게 용서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고 거북한 것을 경험한다. 그 용서가 긍휼에 기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서에 앞서 그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참된 용서가 가능하다.

또한 긍휼은 모든 은혜와 사랑의 출발점이다.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때 비로소 사랑할 수가 있고 은혜도 베풀게 된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것은 남을 동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동정은 사랑으로 발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긍휼은 사랑의 시발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도 우리를 동정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진노하면 화를 쏟아내지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 설령 잠시 잠깐 분노를 참아낸다 해도 긍휼을 베풀지는 않는다. 세상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베풀고 있다. 은혜도 그렇도 상도 그렇고 축하도 그렇고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베푼다. 상을 받을 만한 사람, 축하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은혜도 받을 만한 수고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사랑도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베풀게 된다.

그러나 긍휼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벌을 받아야할 사람에게 오히려 따스한 손을 내미는 것이 긍휼이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조건없이 그냥 베푸는 것이 긍휼이다. 그저 사랑하고픈 마음으로 베풀기만 하는 것이 긍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47).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가족에게 문안하는 것은 긍휼이 없이도 가능하다.

이미 사랑을 받고 문안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죄인 취급을 하던 세리를 사랑하고, 짐승 취급을 하던 이방인을 문안하기 위해서는 긍휼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렇듯 긍휼은 자격을 묻지 않는다. 긍휼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긍휼에는 조건도 없지만 대가도 없다. 세상이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긍휼에는 대가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긍휼 

또한 긍휼은 타인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자기가 상처받고 자신이 아파하는 것처럼 동일시하는 것이 긍휼이다. 그래서 도저히 남의 고통과 불행을 못 본 척 할 수가 없는 것이 긍휼이다.

그러나 세상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쉽게 외면한다. 나 혼자 살기에도 바쁘다고 생각하며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원수지간일 경우 타인의 고통과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긍휼이 그다지 인기가 없다. 오히려 타인의 약점이나 아픔을 이용해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요즘 한국에서는 학교 폭력 사태와 왕따 현상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같은 학급의 학우에게 날마다 욕설을 내뱉고 때리고 금품을 갈취하는 등 너무도 심하게 괴롭히면서 결국 피해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또 얼마전 공지영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도가니>라는 영화가 큰 이슈가 된 바가 있다. 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2000년부터 5년 동안 청각장애 학생을 상대로 교장과 교사들이 비인간적인 성폭력과 학대를 저질렀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그 어린 아이들에게 소위 교육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짐승만도 못한 짓을 벌인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들은 애당초가 긍휼을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소외되고 약한 자들에게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미움의 대상이나 대적자들에게 복수하기를 즐겨한다. 되로 받으면 말로 주려고 앙심을 품는다. 인터넷 상에 악성 댓글이 비근한 예다. 악성 댓글을 통해 쏟아낸 비방과 악담에는 긍휼의 마음을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한 사람의 인격과 삶을 무참히도 짖밟아 버린다. 긍휼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 세상은 용서하는 일은 시시하다고 여긴다. 특히 아무런 사과도 받지 않고 화해를 위해 내가 먼저 용서하고 손을 내미는 것은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허락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긍휼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시하고도 자존심이 상하는 용서를 베풀어주셨다. 더욱이 당신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는 이들을 향해서도 용서를 구하셨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3~34).

예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었을까? 그분 안에 긍휼이 불붙듯 일어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어누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는 긍휼을 베푸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가 있었겠는가!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8:12).

우리는 여전히 불의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하나님을 믿는 것,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구체적인 행동의 긍휼 

긍휼이 세상에는 없는 숭고한 가치요, 용서보다 선행하는 가치요 은혜와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했는데, 대체 긍휼이 무엇인가? 우선 긍휼은 동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우리는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을 돕지는 않는다. 그저 마음 뿐일 때가 있다.

가끔씩 “마음만 받어” 이런 말들을 듣게 되는데, 그것은 긍휼이 아니다. 마음으로 때우는 것, 그것은 동정일 뿐 긍휼이 될 수 없다.

또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자기 이름을 위해 구제하고 돕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에는 타인을 위한 사랑이나 이해가 없이, 그저 자기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남에게 선행을 베푸는 경우다. 즉 마음에는 없는 구제와 선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선일 뿐 긍휼이 아니다.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불쌍한 느낌의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다. 우리말 긍휼로 번역된 헬라어 ‘엘레에오’는 마음으로 느끼는 자비, 용서, 친철, 은혜의 구체적인 행동을 뜻한다.

즉 마음과 행위가 동반된 것이 긍휼이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직접 병문안을 가거나 아니면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해 주고, 가슴이 답답한 일을 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간을 내어서 들어준다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이다.

그래서 긍휼은 언제나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사랑의 출발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끼리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세상에서 억눌린 자 원통한 자 억울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도록 하자.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우리의 몸으로 긍휼을 나타내도록 하자.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될 것을 믿는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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