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러드와 토니 애봇의 신앙

김석원/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9/02 [09:57]
 
▲ 바이블소사이어티에서 발간한  ‘IN GOD THEY TRUST’ 

최근 바이블소사이어티에서는 연방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노동당의 케빈 러드와 자유당의 토니 애봇을 포함한 지금까지 주요 정치 지도자들의 신앙배경과 성격을 다룬 책 'IN GOD THEY TRUST'를 출간했다.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이번 연방선거에 참여하는 교민들을 위해 케빈과 애봇 두 사람의 관한 내용을 요약 정리해서 전재한다. 최근 선거는 인물전이 되면서 정책보다는 지도자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면이 많아졌고, 이 글이 선거에 필요한 판단에 좋은 자료가 되길 기대한다.

저자 로이 윌리엄스는 이책에서 바톤부터 길라드, 케빈 러드에 이르기까지 호주 정부 총리들의 신앙을 평가하고, 이들의 영적생활이 이들의 결정과 호주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 가늠한다.

책은 현재 하드 커버의 경우 $19.95 ($6.95 우송비 별도), e북은 www.biblesoceity.org.au/pm을통해 $17.95에 판매되고 있다.<편집자>
1941년 이래로 신앙적 색깔이 분명한 리더가 총리후보로 경쟁하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이들의 성장 과정은 양 후보를 다르게 특징 지우고 있다.

▲ 케빈 러드 (Kevin Rudd) 
 
케빈 러드 (Kevin Rudd)

중국 외교관 시절에는 평신도 설교자로도 활동
 
러드는 주일예배에 거의 빠지지 않는다. 스웨덴(1981 ~1984)과 중국(19 84~1987)에 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지역교회 활동이 쉽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평신도 설교자로 활동했다.

러드는 신학과 교회사에 넓은 식견이 있고, 종교적 표현을 자주 사용해 이야기한다. 2012년 11월 한 인터뷰에서, 러드는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 헬라원어로 누가복음 연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모차르트의 부활절 라퀴엠, 소설은 도프토예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 그림은 라파엘이전시대 작품들을 꼽은 것도 기독교적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러드는 1957년 9월 21일 선샤인코스트 누사에서 남서부 20킬로 떨어진 유문디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버트 러드는 성공한 지역사업가 소유의 400에어커 땅을 경작하는 평범한 소작농의 삶을 살았다. 가족으로는 부인 마지, 자식으로는 말콤, 루리, 그랙 그리고 막내 러드가 있었다.

버트와 머지는 다른 배경 출신이었다. 머지는 엄격한 카톨릭교도였지만 포용적이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책인 로이드 더글라스의 ‘로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이후사건을 로마인의 눈을 통해 그린 소설이었다. 그녀는 항상 민주자유당을 지지했고, 러드는 어머니가 ‘(보수적인) 퀸슬랜드 카톨릭 농촌여성협회 분위기’였다고 회고한다.

버트는 개신교 출신이었다. 아내보다는 덜 종교적이었고, 아내를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는 지역 ‘프리메이슨’의 회원이자 정치성향은 보수적으로 ‘컨츄리파티’(현재 내셔널파티 국민당)의 형식적인 당원이었다. 그러나 러드는 아버지 신앙을 제대로 파악할 기회도 없이 아버지를 잃었다.

실제로 러드가를 지배했던 것은 어머니의 영성이었다. 부모는 남버의 성 요셉 카톨릭교회에서 결혼했고, 자녀들에겐 가톨릭교육을 시켰다. 아이들은 신앙의 중요성을 깊이 느끼며 자라났고, 매주 엄마를 따라 ‘호주전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무로 지어진 조그만’ 유문디 성당에서, 나이순으로 앉아 미사를 참석했다. 격주 토요일에는 교리문답시간, 주일저녁에는 기도문시간까지 함께했다.

그러나 1968년 12월 14일 저녁 러드 가족의 상황은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브리스베인에서 돌아오던 버트는 새벽 2시쯤 유뭔디 남쪽 100킬로 지점에서 전신주를 박고 병원으로 실려갔고, 8주 만에 로얄 브리스베인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남은 가족은 집까지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버트는 유산도 별로 남기지 않았고, 약간의 생명보험비도 가족들에게 바로 지불되지 않았다. 마지는 별수 없이 주변의 친지와 교회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살아야 했다. 이것도 오래갈 수 없어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뭔가 해야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간호사로 훈련받은 적이 있던 마지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마지의 실제적이고 강한 믿음은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었고 막내 아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러드는 어머니가 매우 극기적이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러드는 학교생활이 힘들었다. 마지는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고, 지적인 러드도 열심히 공부했다. 1969년 중반 어머니 신앙과 학교의 배려로 애쉬그로브 마리스트 칼리지에 러드는 기숙사 장학생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러드는 기독교 형제단이 운영하던 이 기숙사의 2년간을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아했다. “학교는 매우 나쁜 학교가 아니었지만.. 난 행복하지 않았다. 11살 때 아버지가 죽은 뒤 나는 외롭고 불안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곳으로 던져졌던 것이다.” 매주 세 번씩 아침 미사에 참석하고, 정기 기도시간도 참석해야 했다. ‘남자답게 행동하라’란 학훈의 이 학교는 운동을 강조했고. 러드 같은 지적인 소년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당시 학교생활은 거칠고, 혹독하고, 실수를 허락하지 않는 제도화된 카톨릭 구식학교였다.”

1971년 중반 가족이 이사하면서 러드에게도 새로운 계기가 찾아왔다. 남버는 잘 자리잡힌 동네로 “퀸슬랜드 외곽 바이블벨트의 중심지”라고도 불렸다. 마지는 강인했고, 자녀들에게도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은 절대로 낭비하지 않고, 개인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죄였다.

마지가 가장 좋아했던 성경구절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었다.(요 15:2) 러드는 마리스트 칼리지 실험이 실패한 뒤, 남버 공립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거기서 도리어 학업능력은 향상되고 놀라운 발전을 거쳐 모범학생이 되었다. 1974년 마지막 학기에는 최우수학생으로 뽑힐 정도였지만, 러드는 더 노력해서 많은 열매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남버고등학교 동안 어릴 적 신앙은 많이 상실된다. 혹자는 1974년경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러드 자신은 “거의 불가지론에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황무오설, 성직자의 교권, 기타 가톨릭의 공식교리를 거부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축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어릴 적 믿음을 포기한 뒤 신앙을 회복하지 못하는 많은 모태신앙자들과는 달리, 러드는 자기 신학을 완전히 새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가기 직전인 1975년 일 년간 그는 브리즈번과 시드니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시드니에서는 엘우드 그리스도의 교회, 웨슬리 미션, 스콧쳐지 등의 여러 개신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는 자신의 어릴적 가톨릭신앙을 공식적으로 버리지도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이때부터 교단이나 종파보다는 복음의 기본 메시지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1975년 후반까지 그는 상당히 에큐메니컬적이었다. 1976년 ANU에 입학할 때는 카톨릭 남자 기숙사 대신 개신교계 남녀공학 기숙사인 버그만 칼리지에 들어갔다. 지원서에는 자신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고만 적었다.

ANU에서 러드는 정치활동에는 관심도 없었다. 대부분 공부에 집중해 1979년에는 아시아연구전공으로 학부를 ‘퍼스트클라스오너 (최상급성적)’로 마쳤다. 외부활동은 주로 에큐메니컬계의 학생기독운동 SCM에서 했다. 버그만 칼리지에서는 ‘와우저(청교도적 윤리신앙을 강조하는 사람에게 붙이는 별명 역주)’로 통했던, 이후 복음주의적 네비케이토 선교회에서 속해서 활동했다. 그곳에서 본훼퍼의 ‘감옥서신’을 처음 읽었다고 한다.

1976년 오리엔테이션 때 버거만에서 러드는 미래의 부인 데레사 레인을 만났다. 처음 한두 해 동안 이들은 ‘삶의 의미나 기타 모든 주제를 놓고 고양이처럼 싸우며 논쟁’했다. 그녀도 기독교에 열심이었다. 버거만 학장은 테레사는 ‘기독교와 성에 관한 철저한 성경공부 과정’을 만들어보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교단 문제에 있어서는 데레사도 러드와 비슷했다. 그녀의 배경은 관용적이었다. 로버트 매글린 기자에 따르면 테레사의 어머니는 “성공회, 카톨릭, 감리교 뭐든지 다 기독교라고 생각하는데서는 아버지와 의견을 같이 했고, 카톨릭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와 견진도 다시 받아야만 성당에서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신부의 설명에 열 받은 아버지와 함께 대신 성공회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러드와 데레사는 1981년 11월 14일 캔버라 래이드에 위치한 아름다운 성 세례요한 성공회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러드는 오코너에 위치한 연합교회에 출석했지만, 아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교회 예배와 성공회에 좋은 인상을 받은 러드는 이 교회에 계속 남는다.

▲ 토니 애봇 (Tony Abbott) 
 
토니 애봇 (Tony Abbott)

애봇의 기독교는 정치적 보수주의 색깔
 
토니 애봇의 신앙심도 강하고 깊이 내면화돼있다. 오랫동안 애봇은 시드니나 캔버라의 성당에서 매일 미사를 참여했고, 지금은 전 같지는 않아도 여전히 신실한 카톨릭 신자다. 러드처럼 그도 종교와 정치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써왔다.

애봇의 전기작가인 데이빗 마는 그의 두 가지 독특한 성격을 지적한다. 하나는 철저한 정치적 본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반 세상을 향한 종교적 사명감”을 가진 남성적 기독교를 열렬히 따르는 신자라는 점이다. 애봇은 정치를 단순히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로 이해한다. 애봇의 종교는 철저하게 정치적 보수주의 색깔을 띤다.

애봇은 신학에 큰 관심이 있지는 않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고는 훨씬 도전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가졌다. 예를 들어 1979년 시드니대학 신입생 설명회 때, 학생회장으로 한 말을 보면 잘 나타난다. 전도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 자리에서, 애봇은 “모든 실체, 모든 인간의 업적은 영원의 대로에서 보면 별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남아계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애봇의 2008년 책 ‘베틀라인스(전선)’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독교 진리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온 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두 번째 명령은 인간 윤리의 당연한 기본이다. ‘저 사람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란 질문은 많은 윤리문제에 최선의 답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애봇 자서전 작가들은 그가 “정치적 결정은 절대로 종교적 이유로 내리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분명히 했다”라고 전한다. 물론 그를 향해 ‘광적인 수도승’이나 ‘카톨릭 (싸움)대장’이란 비아냥에 대한 반박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에게 기독교적 색깔이 없다고 해도 여전히 좋은 지도자감이기 때문이다.

애봇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형적인 자유당 총리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의 카톨릭 신앙은 그 자체로도 독특한 면이 있고, 특히 돈과 전문가로서의 특권에 대한 무관심에서 잘 드러난다. 법을 공부했지만 실제로 변호사 업무를 한 적이 없었다. 한때는 노조에서 일하기도 했고, 콩크리트 배송공장의 현장 매니지로 일하기도 했다. 대기업들 사이에서는 애봇이 호주 역사상 최초의 민주노동당(70년대까지 존재했던 노동당에서 뛰쳐나온 카톨릭 반공산주의 소수당 역주) 총리가 될 것이라는 농담까지도 있다. 뼈있는 농담이다.

부모도 모두 카톨릭 신자였던 성장배경, 그러나 결혼과 양육 경험 속에서 얻어진 ‘유연성’(그에겐 아내 마지 사이에 세 명의 딸이 있다) 기타 다양한 요소들이 애봇의 신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중 하나가 학교다. 그는 철저하게 사립학교 출신이다. 시드니 북부해안의 최고 카톨릭 학교 삼인방인 린필드의 홀리 패밀리 콘벤트 학교, 밀슨스 포인트의 성 알로이시우스 칼리지, 리버뷰(래인코프강가)의 성 이그나티우스 칼리지를 나왔다.

리버뷰로 잘 알려진 성 이그나티우스는 호주 카톨릭 남자학교 중 최고 학교로 예수회가 운영한다. 예수회는 16세기 중엽 스페인의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세운 선교회로, 흔히 ‘하나님의 군사들’이라고도 불리는 선교중심의 단체다. 교황에게 절대적인 충성서약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애봇이 리버뷰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엄청난 책읽기다. 그는 매년 다양한 책들을 읽어왔지만, 성경을 그렇게 자주 집중해서 읽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태도는 진지하다. 최근 그는 “서구 문명은 성경없이는 세워질 수 없었다.”라고 말했고, 이것은 리버뷰의 예수회 교사들의 영향이 틀림없다.

애봇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건은 시드니대학의 경험이다. 1975-6년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 그는 봅 산타마리아(카톨릭 정치운동가, 기자)의 전국시민협회이 운영하는 한 달짜리 캠프에 참여해 큰 도전을 받았다.

1976년 초 대학에 입학하면서 카톨릭계 성 요한 칼리지 기숙사에 들어가 데모크라틱스 클럽에 가입했고, 곧 리더가 되었다. 그는 호주 전역 대표들이 2년에 한 번씩 모이는 회의가 열렸던 멜본에서 산타마리아를 직접 만났고, 이 경험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애봇은 이제 정치를 자기 소명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산타마리아와의 만남은 1998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이후 20년간 계속되었다.

세 번째 중요한 경험은 1980-1983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험한 의식의 변화다. 시드니대 마지막 해에 (옥스퍼드 대학의)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평생을 결정짓는 발판을 마련한다. 그곳에서 그는 폴란드 아일랜드 계의 미국인 예수회 신부 맨코와스키와 친구가 된다. 애봇은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1983년 중반 시드니로 돌아오자 애봇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신부가 되겠다고 밝혔다. 당시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던 미간 케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전기작가 마치클 더피에 따르면 “그녀도 오랫동안 애봇의 친구이자 카톨릭 신도였지만, 애봇이 종교나 영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놀랐다”고 전한다. 이 말은 애봇의 종교적 관심은 호주밖에서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1984년 2월 애봇은 맨리의 성 패트릭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 생활은 별로였던 것 같다. 처음부터 애봇은 자신이 ‘물 밖의 고기’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1987년 3월 27일 삼 년간 참아왔던 고통과 실망을 뒤로 한 채, 신학교를 그만두었다.

몇 달 후 그는 ‘불르튼 잡지’에 솔직한 필체로 ‘왜 나는 사제훈련을 그만두었나?’란 글을 썼다. 1987년 8월 18일 5페이지에 걸친 이 글은, 애봇이라는 미래 총리 후보감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필독서다.

▲ 토니 애봇(왼쪽)과 케빈 러드 

이 글을 보면, 애봇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따르고 변호해야 할 바티칸 교리를 ‘100% 공감하기 힘들었다.’ 당시 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던지는 질문 속에서 전통신앙은 흔들렸다. 최근 그의 말을 빌면 ‘역동적인 예수 신앙은 당시 내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이점에서 그가 신학교에서 가진 ‘독신주의 문제’나 ‘동성애적 문화’에 대한 비판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다. 그러나 이점을 주목하는 외부비평가들은 이런 경험들이 총리 토니 애봇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봇은 ‘바티칸의 독재(교황 중심의 교회 통치 조직을 의미 : 역주)’에 대해서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교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말한 바 있다. 카톨릭에 대한 그의 생각을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준 발언은 2008년 7월 베테딕트 16세의 호주 방문과 국제청년의 날 행사 때 쓴 글에서 나타난다. 그는 카톨릭교회에 대해서 호감을 보이면서도 무비판적이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엔 애봇은 급진적인 세속주의자로, 반 카톨릭적 개신교도가 아직 남아있다 해도 그들조차 애봇을 걱정할 일은 없어 보인다. 적어도 최근 세 번의 주요 정책-이라크 전쟁, 난민문제, 국제재정위기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문제 등에서 그는 바티칸과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애봇은 개인적으로 중절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절을 범죄화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반복해 왔다.

동성결혼합법화 문제는 애봇이 러드과 가장 크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애봇은 합법화를 반대하고, 이 문제를 찬성하는 야당 의원들의 개별 찬성 기회조차 반대해 왔다. 그러나 러드는 최근 반대의사를 철회했다. 2013년 5월 20일 2천 여자로 된 발표문을 통해 이유를 밝혔고, 그 후 한 달 만에 총리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회와 종교단체들이 결혼을 남녀의 결합으로만 정의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하면서도, “세속적인 호주사회는 이제 동성애결혼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 논리에 반대할 것임을 안다’면서도, “나는 그들도 내 의견을 존중하기 기대한다. 이것은 기독교 가르침을 바탕으로 깊이 고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애봇의 동생인 크리스틴 포스터는 동성애 결혼을 지지하는 레즈비언이고, 러드의 동생 로리는 한때 수녀였고, 이제는 합법화를 극렬히 반대한다. 최근 로리는 노동당에서 이 때문에 탈당까지 했다.〠

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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