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

한국을 통해 뿌려진 국제농아사역의 씨앗

글|김석원, 사진|김인화 | 입력 : 2013/09/30 [11:21]
 
▲ 한국 청각장애인 선교 대부로 알려진 국제농아인선교회(DMI) 국제 대표 네빌 뮤어 선교사. 1978년 12월 네빌과 릴 뮤어 선교사에 의해 한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농아선교의 이 작은 불씨가 전세계 23개국으로 확대되었다.      © 김인화
 
지난 9월 6일부터 8일까지 국제농아인선교회(Deaf Ministries International, 이하 DMI) 국제 대표인 네빌 뮤어(Rev. Neville Muir) 선교사가 한인들을 대상으로 DMI 후원을 위한 콘서트와 선교집회 차 시드니를 방문했다. DMI와 네빌 선교사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멜본 프라한에서 태어난 네빌 선교사는 국제농아인선교회 사역을 한국에서 시작했으며, 지금은 한국과 호주 내 신앙인들의 도움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농아선교를 펼치고 있다.

그러나 시작부터 특정 단체나 교단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움직여온 터라 호주 한인교계에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번 대양주의료선교회 초청 집회와 열린문교회에서 열린 DMI 후원을 위한 콘서트는 호주한인교회들과의 가교를 놓으려는 구체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DMI는 월드비전(선명회)이나 컴패션처럼 한국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퍼진 또 다른 기독교 사회구제단체라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가 누린 축복을 증언한다. DMI는 농아로서 기독교문화사역자이기도 한 박영선 씨, 멜본에서 활동 중인 DMI 한인사역 담당자 오세황 목사를 통해 한인교회들과 보다 많은 교류를 희망하고 있다.

다음은 집회 전 열린문교회에서 있었던 네빌 뮤어 선교사와 인터뷰 내용이다.

- 1978년에 한국 선교사로 가셨지요? 어떻게 한국, 그것도 농아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저의 모교회는 멜본에 있는 아이반호 그리스도의 교회였는데, 한국전쟁 소식을 통해 일찍부터 한국선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잊혀졌지요. 그 후 전 농아교사가 되었고, 일본 쿄토의 한 대학 초청으로 일본에서 농아교육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노르웨이에서 파송된 선교사인 아내를 만나,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한국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나섰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한국 입국은 한국 성결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가능했고, 미국계 OMS란 선교단체가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전에 미국에 살면서 알게 된 분들인데, 미국장로교를 비롯해 다양한 교회들이 같이 일했지요. 단체는 이후 사라졌지만 개인적인 도움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 DMI 로고      © DMI

- 한국 사역은 어떤 면에 가장 어려우셨나요?

“저는 그리스도의 교회 출신이라, 목회자의 권위나 위상을 그리 특별하게 취급하는 분위기에서 자라지 않았고, 평신도 선교사로 나가는데 별 고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목사 안수 여부의 차이가 많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OMS를 통해 안수를 받았습니다.

개교회나 교단과의 관계를 갖는 것도 쉽지 않아 전적으로 제가 알아서 움직여야 했지요. 지금도 농아 목회자들은 거의 젊고 대화가 쉽지 않아서 기존교회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좀 지나서 유일하게 농아선교에 관심이 많은 한국 침례교단과 공식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지요.”

- 한국에서는 어떤 사역을 시작하셨습니까? 1978년에 들어가신 것으로 아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교회나 사회 환경도 많이 개선되있지 않았나요?

“한국은 크게 발전했지만 농아문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래 농아들은 가정에서 버려져 고아원에 보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19세만 되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아원에서 나가야 하는 규정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하프웨이하우스(사회복귀를 위한 중간다리로 제공하는 임시기숙사)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세 명의 농아 자녀를 둔 어머니가 찾아와서 인천에다 교회를 세우자고 요청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럴 여력이 없어서 조금 도와주기만 할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교회가 커지면서 제가 모든 책임을 맡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정적으로 주변 동인천감리교회의 격려를 많이 받았지만, 재정이나 설교 모두 제가 다 알아서 해야 했거든요.
 
당시에 저는 한국어 설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농아 성도들의 숫자는 자꾸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숙사에 불이 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교회가 사역의 중심이 되버렸지요. 계획하지 않았던 '농아교회' 개척이 저희의 주요한 선교방법이 되버린 셈이지요.”

-영어 수화와 한국어 수화가 다를텐데 설교 때 통역을 쓰셨나요? 그리고 한국 농아들과 대화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통역을 쓸 형편은 안 되었습니다. 수화는 영어와 한국어뿐 아니라 미국식 수화와 호주 수화도 다릅니다. (미국에서도 교육을 받았던) 저는 다 알고는 있었는데, 어쨌든 한국어 수화는 잘하지 못했지요.

놀라운 것은 그런 제 설교를 듣고 몇 주 지나 한 청년이 와서 “예수를 영접하고 싶다”고 고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교회가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이 한국 농아들에게 영적 갈급함을 부어 주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지요.”

- 한국에서 1991년에 철수하셨는데, 사역이 성장하던 상황에 비춰 좀 의외로 보입니다.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실은 그럴 계획이 없었는데 우리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희 아이 중에 장애인이 있었는데, 한국내 '국제학교'에서는 전혀 감당하지 못했어요. 결국 아내가 일본에 있는 '노르웨이계' 학교에 보내기로 해서 베이스를 옮겨야 됐고, 덕분에 열린 북구교육의 혜택을 받고 아이들도 크게 좋아졌습니다. 그즈음 한국 내 농아사역도 커져서 거의 자립단계에 이르렀구요. 덕분에 저도 농아사역이 필요한 한국 밖의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교회개척에 중점을 둔 사역이셨는데, 장애자들이 만나는 사회적 소외와 경제적 불이익 등을 볼 때 의식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된 교회가 가능했습니까?

“처음에는 매우 힘들었지요. 과거엔 더 심하게 장애자들을 차별했으니... 그래서 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만들고, 나중에 교회로 자연스럽게 초점이 바뀐 뒤에서도 다양한 직업교육이나 장애자 활용 사업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구제책까지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화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지요. 십일조에 대한 강조 말입니다. 그래서 농아들의 자립기회가 늘어날수록 교회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더구나 농아사역과 교회를 시작하면 엄청나게 몰려드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준비된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교회도 각 장애들의 자립정도와 맞물려있기 때문에 지금도 다양한 사회구제 활동을 교회개척과 병행해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필리핀에서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지요.”

- 지금은 어떤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까?

“그동안 필리핀과 아프리카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많은 사역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처음에는 맨땅에 머리를 부딪히는 느낌이었는데 3~4회 방문 이후부터 놀랄 만한 반응을 발견했습니다. 한번은 난징에서 저를 만나기 원하는 농아들이 있다고 해서 2~3명을 기대하고 나갔더니 30여 명이 모여 기다리고 있더군요. 덕분에 커피숍 하나를 통채로 다 써야 했습니다.”

- 자료를 보니 한국에서 시작된 사역이고 한국교회도 이제 크게 자라났지만 그에 비해 한국교회의 참여는 비중이 작은 편입니다. 이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이나 바램 같은 것이 있습니까?

“절대적 비중은 여전히 호주, 미국, 노르웨이, 독일 등이 주류를 이루지만, 한국교회의 참여 비중은 급속도로 커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이들 지원이 '농아교회'들에서도 나오고 있다는 점이지요. 사실 한국 농아교회들의 자립도 90년대나 되서나 가능했으니 매우 빠른 변화입니다. 이러한 자립모델은 한국교회가 세계에 선물한 좋은 모델입니다.

최근에 아프리카 콩코에서 농아선교를 위한 세미나를 개최한 적 있는데, 그쪽 지도자들은 '받는데 익숙해서' 자립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을 보면서, 한국 모델이 큰 축복이란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자립이 없이는 사역이 더 자라지 않거든요.”

- 요즘처럼 다양한 선교단체들이 다양한 선교분야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농아 사역에 우선순위를 가지고 관심을 가져달라는 설득이 쉽지 않습니다.
농아, 청각장애자에 대한 선교가 가진 의미를 설명하신다면..?

“농아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입니다. 실제로 농아장애자는 같은 가족 안에서 잘 나오기 때문에, 외부사람들이 발견하기가 더 쉽지 않지요. 때문에 이들과 이들 주변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과 차별, 아픔은 훨씬 더 깊고, 사회의 무관심 속에 더 고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 돕고 나서야 겠지요.

또 다른 점은 이제 한국농아문제는 다른 서구사회처럼 비교적 사회적으로 지원도 늘고,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때문에 한국 내 농아교회들도 전처럼 많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와 중국을 보면 너무 많은 농아인들이 우리의 도움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비공식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농아인수만 약 7~8천 명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 한국 교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농아인들에 대한 관심과 이들에 대한 지원은 소외된 이웃을 돌보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이제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때이기도 하구요.

또 이런 사역은 하루아침에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많이 움직입니다. 저의 경우 대부분의 후원자들이 저희 부부를 통해 개인적으로 연결된 노인들입니다. 이점에서 보다 다양한 후원자, 젊은 후원자, 그리고 이 사역에 참여하는 사역자들이 늘어야 할 시점입니다.

저희에게 한인 사역 담당자로 오세황 선교목사를 세워주시고, 호주에서 자라나서 이곳에서 누린 축복은 더 많은 농아들과 나누기 원하는 박영선 선생을 연결해 주셔서 기대가 큽니다.

이번 DMI 후원 음악회도 그 일환이구요. 이를 통해 한국 이민교회와 더 많은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글/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사진/김인화|크리스찬리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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