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활화산 ‘마틴 루터’

기획연재|복음의 불꽃이 되어

원광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10/28 [11:53]
                                                       ▲ 마틴 루터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큰 폭풍우 속에서 벼락이 내려치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죽음이 코앞에 닥치는 것을 예감하고 공포에 질려서 길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서원을 했다.

방향 바뀐 청년 루터의 인생

1505년 7월 2일에 일어난 이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촉망받던 스물두 살의 법학도였던 청년 루터의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 16세기의 위대한 개신교 종교 개혁은 바로 그 사건에서 이미 싹이 트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지 보름 후인 7월 17일, 그는 정말로 자기가 행한 서원을 그대로 지켰다.
 
법학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었다. 법학을 공부하여 법률가로서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랬던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는 아들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로 인하여 아버지의 사망 시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의 앙금을 완전히 풀지 못했다.

훗날 루터는 그 당시 자신의 그런 선택이 조금도 가치 없는 큰 죄였음을 고백하였다. 자유로이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따라 수도사가 된 것이 아니고,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뇌 때문에 떠밀려서 하는 수 없이 즉흥적으로 서원을 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의 죄악된 선택을 통해서도 선한 결과들을 얼마나 많이 이루셨는지 모른다”라고 하였다.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가족은 만스펠트(Mansfeld)로 이주했고 그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그를 막데부르크(Magdeburg)로 보내어 학교를 다니게 했고, 이어 아이제나흐(Eisenach)로 학교를 옮겼다. 

1502년 열아홉 살의 루터는 57명 중 30등으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505년 1월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때는 17명의 후보생 중 2등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법학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바로 그해 여름 그 문제의 폭풍우와 벼락 사건을 만난 것이다.

수도원 생활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수도원 서고(書庫)에서 처음으로 라틴어 성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일반 사람들에게 읽어주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보배요, 또한 장차 그가 그 보배를 발견함으로써 온 세계의 역사를 바꾸게 될 엄청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루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밀하신 은혜의 섭리가 그에게 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영적인 고뇌를 떨치고 안식을 얻기 위한 하나의 노력으로 수도사의 갖가지 임무들을 최선을 다해 철저하게 감당하였다. 훗날 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십 년 가까이 수도사로 있으면서, 기도와 금식과 철야 등으로 나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쳤고, 추위에 내 몸을 얼어붙게 만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다시는 절대로 행하고 싶지 않을 만큼 가혹한 고통들을 나 자신에게 가했다... 혹시 사람이 수도사의 생활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있다면, 바로 내가 그렇게 천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나를 아는 모든 수도원 동료들이 그 점을 증언할 수 있다...  만일 수도원 생활이 더 길어졌더라면, 나는 철야와 기도와 독서와 기타 노동들 때문에 거기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기 위하여 얼마나 힘쓰고 애썼는가를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런 육체적이며 영적인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영적 고뇌

1507년 5월 2일 그는 처음 소위 ‘미사’를 집전하였는데, 그 일로 인하여 크나 큰 영적인 고뇌에 시달리게 되었다. “내가 누구기에 감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살(肉)을 사람들에게 떼어 나누어 줄 수 있단 말인가? 죄인인 내가 감히 어떻게 그리스도의 살을 손에 들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행위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닌가?”

적어도 그는 로마교회가 가르쳐온 소위 ‘화체(化體)의 교리’(doctrine of transubstantiation: 사제가 기도하는 순간 성찬의 떡과 잔이 겉모양은 그대로 있으나 그 본질은 진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가르침)를 마음에서부터 확고히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루터는 평생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생각을 마음 깊이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 연구나 기도나 미사 집전 등의 의무들을 결코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아무렇게나 행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든 일 하나 하나에서 언제나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식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임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던 그에게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임하고 있었다. 바로 요하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 1460-1524)라는 훌륭한 인물을 상관으로 만난 것이다.

루터는 고해 사제인 슈타우피츠에게 날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러나 다른 수도사들과는 달리, 그는 1시간, 2시간, 혹은 심지어 3시간씩 마음으로 지은 갖가지 죄를 낱낱이 고백하였고, 혹시 잊고 고백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면 다시 가서 고백하곤 하였다.

그가 그런 일로 어찌나 괴롭히는지,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죄를 고백하려거든 사람을 죽이던가 하여 진짜 죄를 짓고 와서 고백하게!” 라고 말할 정도였다.

루터의 심중에는 정말 심각한 고뇌가 있었다. “내가 과연 고해성사를 하면서 진정으로 회개한 것일까? 혹시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회개한 것은 아닐까?” 라는 식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진정 완전히 회개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차라리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한탄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이러한 깊은 영적인 고뇌를 이해하였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해 줄까 하여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하였다. 그는 루터에게 신비주의 신앙가들의 글들을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그리하여 루터는 성 베르나르(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의 글도 읽었고, 일종의 신비주의 신학을 체계화시킨 『게르만 신학』(Theologia Germanica)을 읽고 한동안 마음의 평안을 얻기도 했다.〠 <계속>


원광연 시드니영락교회 EM목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