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호주연합교회 NSW & ACT 차기 주총회장 박명화 목사

어린 시절 군인 꿈꿨지만, 이젠 호주연합교회 리더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02/24 [11:00]
 
▲ 호주연합교회 NSW & ACT주 차기 주총회장으로 선출된 박명화 목사                        © 크리스찬리뷰
 
첫 아시안 여성 주총회장, 2014년 9월 임직식
 
박명화(54) 목사는 남다른 기록이 많다. ‘이화여대 대학교회 첫 번째 파송 선교사’ ‘호주 첫 한인 여성 목사’ ‘4개 언어 구사’ ‘호주연합교회 첫 아시안 여성이민자 주총회장이며 첫 한인 주총회장’

호주연합교회는 2013년 4월 15일 시드니 와룽가 소재 녹스 그래머 스쿨(Knox Grammar School)에서 열렸던 NSW & ACT 주총회에서 400여 대의원들은 박명화(54) 목사를 3년 임기(2014-2017)의 차기 주총회장 (Moderator-Elect)으로 선출했다. 박 목사는 2014년 9월에 열리는 주총회에서 임직식을 갖고 2017년 4월까지 주총회장으로 교회를 섬기게 된다.

박 목사는 1990년 12월 호주연합교회 목사로 안수 받고 라켐바연합교회 어번연합교회를 거쳐, 현재 캔버라 세인트 콜롬비아연합교회와 캔버라 시티연합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으며 호주국립대학과 캔버라대학의 교목으로도 일하고 있다.

이번 박 목사의 총회장 선출은 아시안 이민자로는 토니치(Tony Chi) 목사에 이어 두 번째, 첫 아시안 여성 이민자, 그리고 첫 한인 주총회장이 된다.

박 목사는 언론의 주목은 없었지만 그동안 묵묵히 다민족교회를 섬기며 소외계층 지원과 봉사에 앞장서 온 여성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1977년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해 호주연합교회가 생긴 이래 ‘첫 외국인 여성이민자 주총회장’이라는 ‘역사적 인물’다운 행보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파키스탄에서 감리교회 선교사로 장애 아동을 돌보았다.

그렇다면 그런 박명화 목사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인가.

한 송이 국화를 피우는 데도 소쩍새나 천둥이 그렇게 울어야 한다는데 하물며 인간 박명화를 세우는데는 어떠했으랴.

우리는 그녀의 신앙 여정을 들춰 보자마자 무릎을 탁 칠 것이다.
 
▲ 23년 전 목사 안수를 받고 본지와 인터뷰(왼쪽), 지난 해 4월 주총회장 당선 후 기념 촬영(가운데, ⓒInsights) 그리고 최근 본지와인터뷰한 박명화 목사.     © 크리스찬리뷰
 
나눔의 맛을 아는 글로벌 지도자
 
무더위가 한풀 꺾인 지난 2월 중순, 스트라스필드에 위치한 대양주의료선교협회 사무실에서 박 목사를 만났다. 23년 세월은 흘렀지만 그녀는 따뜻함과 순수함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환한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봄비가 정원의 꽃잎을 적시던 날, 창밖을 바라보며 함께 커피를 마신 게 벌써 23년 전 일이군요. 그땐 긴 머리 파마 소녀였었지요.”

1991년 10월 라켐바연합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한 직후 기자와 만나던 순간을 그렇게 떠올리자 그녀는 “그냥 아줌마가 됐다고 그러세요.” 하며 환한 웃음을 띠었다. 왠지 ‘섬김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주총회장에 선출된 소감을 물었다.

“제가 맡은 일과 사역은 최선을 다해 헌신한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어요. 어떤 일을 하든지요. 이것이 제가 자부심을 갖고 하는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총회장이기 때문에 더한다, 그런 것은 없어요.

다만 총회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 총회장으로서 감당해야 되는 책임감은 더 크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많이 공부해야 되고 많이 알아야 되는 그런 것 때문에 부담감은 있어요. 그렇지만 그 부담감만큼 많은 분들이 기도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준비시키신다는 것에 확신을 하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총회에서 누가 뽑혔는지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총회 회장은 박명화 목사로 선출 되었습니다.”라는 소리에 총회는 일제히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박수의 여운 속에 박 목사는 총회장직을 수락하는 연설을 했다.

그녀는 “주총회장으로 하나님과 주총회를 섬기게 된 것에 감사드리며, 내가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나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과 교회를 섬기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4개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어두(인디언 말의 한 종류로 파키스탄에서 주로 쓰임) 그리고 통가 말을 원어처럼 구사하는데 회화뿐만 아니라 문장 구사력도 뛰어나다. 수백 명의 청중이 모인데서 영어로도, 한국어로도, 어두로도, 통가어로도 청중을 압도하는 설교를 한다.

그녀는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기보다는 다른 민족들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것은 호주에 오기 전 파키스탄에서 불쌍한 여성들과 장애 아이들을 위한 사역을 했고 호주 라켐바에서 다민족사역을, 어번지역에서는 통가사람들과, 그리고 캔버라 시티에서는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해온 결과이다.

“총회장 선출은 당일 이름을 내걸고 하는 방식이 아니고요. 물론 그전에는 그렇게 했어요. 총회 때 이름이 나오면 자기 의견을 말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뽑았어요. 그런데 제도가 바뀌었어요. 어느 날 편지를 받았어요. 총회장으로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받아들이겠는지 답해달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때부터 자기 신앙관과 여러 이슈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 의견을 쓰게 하고, 그리고 그동안 사역활동들을 비디오로 찍어서 함께 보내도록 합니다. 그 자료를 가지고 소그룹의 전형위원들이 30명을 인터뷰해서 마지막으로 3명을 뽑아 총회 때 총대들이 선출하게 된 겁니다. 이때 인터뷰하는 모습도 비디오로 찍어 보여줍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후보자에 대해 여러 면을 알 수 있게 되잖아요.”

박 목사는 “앞으로 노회와 각 교회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부서들이 교회 비전에 대해서,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나눌 수 있는 밝고 에너지 넘치는 교회 분위기가 되도록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 한국 여성으로는 호주에서 첫번째로 호주연합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박명화 목사가 죠지스리버 노회에서 초문화목회를 위한 취임예배를 가졌다.(91. 9.27)                     © 크리스찬리뷰
 
첫 사역지 다문화교회
 
박 목사의 첫 부임지는 라켐바 지역을 중심으로 발족한 3년간의 다문화목회였다.

“다문화 목회는 개인적인 창안이 아니고 노회의 프로그램이었어요. 신학공부가 끝날 즈음 어느 길로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조지스 리버 노회장님과 몇몇 목사님들을 모시고 회합을 가지게 되었지요. 거기에서 다문화 목회에 대한 프로그램이 나왔어요.

사실 그곳 교회를 관심있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매주 교회에 새로 참석하시는 분들은 이곳 호주사람들이 아니라 이민자들임을 알았어요. 중국인, 인디안, 아프리카, 베트남인, 중동계 등이었는데 이들이 교회인원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교회에서는 서로의 문화 차이로 이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모르는 거에요.

더군다나 이들은 호주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가기 시작했어요. 어떤 이들은 한번 와보고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게 큰 문제였어요. 한국 사람들처럼 한국인 교회가 있으면 몰라도 그들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의 위한 사역자가 꼭 필요했습니다.”

박 목사의 영적비전은 바로 이들이었다. 아시아 사람들의 영성과 문화를 호주사람들에게 소개하며 가르쳐 주고, 호주의 문화를 이민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서로의 문화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라켐바지역은 이슬람교인뿐만 아니라 가톨릭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지역으로 아시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곳 호주 목사님들은 교회안의 일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각종 행사일도 돌볼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결혼주례며 장례주례 같은 일들 말입니다. 이민자들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로 서로들 호주 목사님들을 꺼리는 거에요.”

그녀는 부임하자마자 이들의 삶과 고통을 자기 속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하우스 그룹’을 만들었다.

하우스 그룹이란 새로운 사람이 교회에 오면 호주인 가정과 연결시켜 신앙을 같이 나누며 서로 간의 문화를 소개하고 이해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외래문화권에 눌러있는 양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였다. 박 목사는 초대교회와도 같은 ‘나누는 삶’이 이곳에서 실현되기를 꿈꿨다. 그녀의 사역은 날개를 달았다. ‘여성의 공간’을 창설하여 위급상황에 빠진 여성들을 지원하는 한편 어려움을 겪는 곳에 지역과 종파를 초월해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날들을 돌이켜 볼 때 계속 건너는 역할을 했어요. 부산에서 서울로 건넜고, 불교 집안에서 기독교 세계로 건넜고, 한국 선교사로 파키스탄으로 건너갔고 또 이곳으로 건너오게 되었어요. 이렇게 하나님이 자꾸만 건너게 하십니다, 건너는 것은 단순히 옛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건너서는 것이 아니라 옛것을 가지고 건너 새것에 접목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자꾸 건너게 하시는 이유가 뭘까. 그녀는 여러 가지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단다.

“많은 이민자들이 옛 문화에 집착하지 말고 그 문화를 뛰어 건너서 새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라는 거였어요.”

박 목사는 이 지역에서의 사역은 마음속으로 울며 젖은 가슴으로 살아온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여성의 공간은 제가 만든 게 아니라 동참한 거지요. 그런데 목사로서 뜻있는 여성들을 격려하고 힘을 줘서 그 사람들에게 지도력을 갖게 하여 리더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보람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통해서 다른 봉사단체들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 저는 독창적인 것보다는 독주하는 것보다는 함께 일을 하는 것이 몸에 밴 것 같아요. 사실 어떤 일을 할 때 나만, 우리만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 그게 연합교회의 또 하나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가톨릭 선교사였던 브랜든 케네디와 결혼하여 두 딸, 시내(21. 멜번 RMIT 대학 재학)와 이타(17. 라벤스우드여고 재학)를 두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왕성한 삶을 살던 남편은 2011년 말 갑작스럽게 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기에 박 목사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배후자를 잃은 슬픔이 어떤 것인지 안다. 캔버라에서 교회 홀을 개조하여 겨울에 집 없는 사람들이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준 그녀다.
 
▲ 죠지스리버노회 초문화 목회 사역자로 취임한 박명화 목사와 듀류리 노회장(91. 9.27)      © 크리스찬리뷰
 
어려서부터 맺어진 호주와의 인연
 
박 목사가 태어난 곳은 부산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부산에 있는 일신기독병원인데 이 병원은 호주선교사가 세운 병원이다. 그래서 호주와 그녀의 인연은 이렇게 남달랐다.

“어머니는 철저한 불교 신자였어요. 그런데 일곱 형제를 낳으면서 일신병원 신세를 지셨는데 헬렌 맥켄지 선교사가 저를 받으셨대요. 저도 이런 사실을 몰랐었죠. 이곳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일신병원이 호주교회가 세웠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 후 어머니에게 일신병원이 호주교회에서 세운 병원이라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이제야 빚을 갚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몸이 약하셨던 어머니가 일신병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나 봐요. 선교사들이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세운 병원이었고 그래서 그 소식을 듣고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어머님이 늘 그 고마움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드렸을 때 어머님이 이제야 네가 빚을 갚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그 병원에서 많은 자식을 낳았으니까 하나쯤은 호주로 보내도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머니는 철저한 불교 신자이셨지만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갖고 계셨어요. 이곳에 몇 번 오셨다 가셨는데 주일마다 꼭 예배에 참석하셨어요. 맨 뒤에 앉으셔서 저는 졸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니는 기도드리셨대요. 그러시면서 네가 영어로 설교하니까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 있느냐, 그래서 기도했다 그러시더라고요.

어머니는 2008년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셔야 하는데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몇 번 교회 나가시라고 권유를 했어요. 그럴 때마다 ‘내가 목사를 낳은 엄마가 아니냐. 내가 만약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를 간다면 내 딸이 세례를 줄 수 있겠지?’ 그러셨어요. 그런데 내가 아일랜드에 다녀오는 중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고 그래요.”

그녀는 걸려온 전화를 받고나서 말을 이었다.

“오래전 일인데요. 한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일신병원 바바라 마틴 선생님이 저를 초대했어요. 당신은 이제 호주 목사니까 우리 병원에 와서 설교를 해달라는 거였죠. 이 병원에서 태어난 사람이 이곳에 와서 설교를 하는 것은 기막힌 인연이라며 내가 태어난 출생 기록 카드를 보여주셨어요.”
 
▲ 캔버라 세인트 콜롬바교회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임시 숙소 마련 캠페인을 위해 지역신문에서 촬영한 사진. 박명화 목사와 동교회 숙소 준비위원회에 참여한 리챠드 그리핀 씨와 론다 블렉 씨.(2012. 8.)      © The Canberra Times
 
소녀의 꿈은 군인이었다.
 
“절도있는 군인이 멋져 보이고 유니폼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군인이 되고자 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는 탐사하고 옛것을 찾는데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에서는 특수교육학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저희 집안이 유전적인 것 같아요. 선조 때부터 학교도 세우고, 교육자 집안이셨어요. 저희 형제들도 모두 교수이고 교사입니다. 저도 자연스럽게 교사 쪽으로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장애자 학교에서 일을 할 때도 ‘어이구, 어려워서 어떡하나’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거든요.”

박 목사가 예수를 영접한 것은 대학시절이다. 기독학교인 이화여자대학교에 입학한 그녀에게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라”며 성경책을 한 권 사서 보내주신 것이다.

“뜻밖의 일이었지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어요. 어머니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불교 신자인 아버지가 성경책을 보내주시며 교회 나가라니 기뻤습니다. 잊었던 고향에 안착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자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지요.”

1982년 이화여대 특수교육과를 졸업한 그녀는 의로운 소망을 펼쳐나간다. 그 첫 번째 시발지가 농아학교였다. 수화통역자로 일하며 농아학생들을 모아 성경공부도 진행시켜 나갔다.
"대학시절에 전공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어렵사리 특수교육으로 전공을 정하고 나니 자연히 제 삶과 선교의 방향도 그렇게 정해졌지요.”

선교에 뜻을 둔 것은 대학 3학년 때 ‘글로리’라는 선교사를 위한 기도회 활동을 하던 중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을 하면서부터다.

그녀는 1984년 이화여대 대학교회 첫 번째 파송선교사로 파키스탄으로 떠난다.

이화여대에서 출간한 ‘이화여대 70년사’는 그때 당시를 언급하고 있는데 좀 길지만 인용해 본다.

<대학교회 교우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기도 속에서 새롭게 추진된 독자적인 파키스탄 선교사 파견사업은 1984년 박명화 선교사를 파견함으로써 마침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1984년 3월 18일 파키스탄으로 떠나는 박명화선교사를 위한 파송예배가 있었고, 박명화선교사는 3월 24일 서울을 출발하여 4월 3일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이것은 대학교회가 독자적으로 파송한 첫 번째 선교사이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인도반도의 동서 양 끝에 있는 무슬림의 왕국으로 국민의 97%가 전통적으로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3%만이 기독교, 배화교, 힌두교 등을 믿고 있다. 특히 정부가 ‘모든 정책의 이슬람체제화’를 선언한 이후 기독교 선교가 과거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 예상되는 지역이었다.

박명화 선교사는 자신의 파견의 의미를 바로 백여 년 전 한국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의 빚을 갚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그때 썩어진 한 알의 밀알이 맺은 열매 중의 하나가 또 다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이라고 파견 소감을 피력했다.

박명화 선교사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그리 멀지않은 라호르 지방에서 TSA(Technical Services Association)라는 일종의 정신지체아들을 위한 특수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박명화 선교사는 외국인이라는 장벽을 극복하고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친구이자 동료로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 그 결과 1985년 9월부터 학교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자신의 전공을 바탕으로 교사들의 교육도 맡았다.

1986년 7월 잠시 귀국한 박 선교사는 인터뷰에서 대학교회의 재정적 지원에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저는 그곳에서 무척 개방된 입장을 취합니다. 개신교회도 가톨릭과도 그리고 무슬림교와도 교통하며 관계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방성은 대학교회와 공통된 것이라고 생각해요.”라고 하며 대학교회의 열린 개방성에도 고마움을 전했다. 박 선교사는 임기인 1987년 3월까지 파키스탄 선교를 계속하다가 그 해 8월 사임했다.>

오래된 글이지만, 박명화 목사의 ‘낮은 자’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글임에는 틀림없다. 그녀가 길어 올리고 있는 사랑의 샘물은 종교와 인종을 초월해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그렇다면 ‘낮은 자’에 대한 사랑이 주총회장으로 피어난 것일까.
 
▲ 주총회장 당선 후 박명화 목사(2013. 4.15)      © Insights
 
또 다른 주총회장의 삶
 
3년간의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앞으로의 길을 찾던 중 태평양선교(PMI)에 입학하여 선교학을 공부하게 된다. 태평양선교원은 호주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이다. 이 신학교의 초청으로 호주에 온 것은 1987년이었다.

“선교경험을 나누며 선교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개신교 출신인 것을 안 신부님이 개신교 신학을 권했어요. 그래서 감리교단을 찾게 된 것인데 지금의 호주연합교회이더군요.”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톨릭 신부에 의하여 다리가 놓여 진 것이다.

“호주연합교회며 연합신학교에 대해서 전혀 몰랐어요. 태평양선교원에서 그저 선교학을 공부하려고 했을 뿐인데 목사가 되었다니 꿈만 같아요.”

그녀가 호주연합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88년 2월. 여기에 대한 사연은 이렇다.

“호주연합교단에 소속된 세계선교부를 무작정 찾아갔어요. 그곳에서 변조은 목사님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도울 수가 없다고 하셨어요. 두 번째로 찾아갔죠. 그때 연합신학교 학장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학장님은 신학교 입학을 허락하셨고요.”

2004년 12월 박 목사는 어번연합교회를 사임하고 가족들과 함께 아일랜드로 훌쩍 떠났다.

“호주교회 사역 15년을 한 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이 연합교회 안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연합교회를 위해서 보내셨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선교에 대해서 잘 증거하고 있는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시간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그동안 사람들의 어려운 이야기만 듣고 몸으로만 뛰었지 예수님처럼 시간을 내서, 제자들을 떠나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는, 그런 시간을 많이 못 가졌던 것 같았어요.
 
그것이 후회스러웠어요. 떠날 때 많은 분들이 염려도 하시고 여기서 하실 역할이 많은데 왜 가시느냐 아쉬워도 하셨어요.

아일랜드에서 4년 동안 있으면서 목사로서가 아니라 봉사자로 커뮤니티에 들어가 섬겼습니다. 그런데 커뮤니티의 한 일원으로 봉사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값진 경험을 했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시야로 교회를 다시 보게 됐어요. 교회가 이제는 개교회보다는 전체 교회를 보는 눈이 생겼어요. 시야가 넓어진 거죠.”

박 목사는 아일랜드대학교에서 생태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 다시 목회지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목회를 할 때 그냥 교회 부흥, 그런 것을 떠나서 이 모든 우주 만물 속에서 우리가 해야 될 역할이 뭔지, 새로운 소명감이 들었어요. 새로운 안목과 새로운 시야, 새로운 각오가 생기니까 빨리 오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공부가 끝나는 대로 이곳으로 왔어요.”

박 목사는 “같은 마음을 모아서 함께 일하는 그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생각한다”며 “그것이 확산되면 타종교와도 같이 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9월에 있을 총회를 준비하고 있고, 주총회 사역에 대해 이해하고 알아가는 그런 과정입니다. 일단 우리 연합교회를 대변하는 얼굴이 이민자이기 때문에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깨달아 도전을 주고, 호주연합교회를 떠나서 정말 신앙을 포커스로 하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 목사는 한인교회에 대해 믿음의 눈으로 신앙의 열정으로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잘 감당했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잘살기 위해서 왔는데 잘사는 건 나만 잘산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도 잘살아야 되고, 내 교회만 잘되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교회도 잘돼야지 내 교회도 잘되는 거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한국교회와 한인사회가 호주 안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는 코리안 오스트렐리안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하나님이 이 땅으로 인도하셨고 이 땅에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이 분명히 있지 않겠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내 자신이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랬다. 박명화 목사는 장거리 선수의 자세로 하루하루를 맞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웃 사랑 하나님 중심의 성품으로 숱한 세월 속에서 무수한 일들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여생을 통해 다시 한 번 증인의 길을 출발하고 있다.〠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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