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컴패션 서정인 대표

절망 위에 희망을 심고 꿈을 거둔다

글|송기태, 사진|한국 컴패션 | 입력 : 2014/02/24 [11:07]
 
▲ 한국컴패션 서정인 대표가 아이티를 방문,  어린이들과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한국컴패션
 
한 사람의 작은 출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6개월간 한국을 방문한 한 미국 목사가 있었다. 그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거대한 ‘죽음의 공장’을 목도했다. 공장의 가동 모습도 다양했다. 총칼로 가동되어 죽음이 양산되는 것도 어마어마한 규모였지만, 전쟁고아와 피난민과 과부들이 기근으로 가동되는 ‘죽음의 공장’은 그칠 줄 몰랐다.

그야말로 이비규환이요 생지옥같은 이 참상은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듬 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군들이 예수를 모르고 죽어간다는 소식에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온 그는 미군부대를 순회하며 미군들에게 복음을 설교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밟힌 것은 길거리에 차고 넘치는 전쟁고아들이었다. 쓰레기가 산더미가 쌓여있던 서울시청 옆을 지나가자 아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깡통을 두들기거나 내밀며 단 한마디 외치는 말이 그의 가슴을 쳤다.
“기브 미!”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탈탈 털어 줄 때까지 아이들은 떠나지 않았다. 한번은 구걸하던 깡통을 딸랑거리며 터벅터벅 걷고 있던 아이가 너무 안쓰러워 자동차 뒷좌석에 태워주었다. 목적지에 이르고 보니 깡통 하나만 남기고 그의 윗도리와 지갑을 훔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비싼 가격’을 지불한 그 빈 깡통을 들고 차 안에서 한참 울었다.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던 날 아침, 그는 그동안 상상을 초월한 경험으로 마음이 어수선하여 여관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먼동이 트고, 멀리서 트럭 소리가 들렸다. 새벽마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미군 트럭이었다. 순간 의아스런 생각이 들었다.

‘미군 트럭이 전쟁 중에 웬 쓰레기를 저렇게 많이 싣고 가지?’

트럭이 멈춰 서자 인부 둘이 내리더니 길거리 쓰레기를 발로 툭툭 찬 후에 쓰레기 뭉치를 트럭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런데 어느 뭉치에서 어린 아이가 툭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여관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멈추세요. 방금 던진 곳에 아이가 있어요. 쓰레기가 아니오!”

떠나려는 트럭을 몸으로 막고, 위를 보았다. 더 큰 충격이 눈앞에 벌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은 매일매일 가득 실어 나른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겨울을 나지 못한 채 동사한 아이들, 굶주림으로 괴로워하다 죽어간 어린아이들의 시체였다. 인부들이 발로 툭툭 찬 것은 아이들이 살았는지 죽음을 확인하며 마지막 치르는 ‘예식’이었다. 아침마다 들려온 트럭 소리는 아이들의 주검을 싣고 가는 장송곡이나 다름없었다.
 
▲ 컴패션 설립자 에버렛 스완슨 목사와 한국 전쟁 고아                     ©한국컴패션
 
이 가공할만한 충격적인 사건을 온몸으로 체험한 그는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란히 앉은 친구이자 선교사에게 도무지 잊히지 않는 아니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몇 장의 스냅사진 같은 그 장면들을 전했다. 친구가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일 수 있어요, 당신이 그것을 봤는데, 이제 그것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미 1년 전에 교회도 사임한 터라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던 그였다. 그러나 친구의 마지막 말이 계시의 음성처럼 들렸다. ‘너는 이제 이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것을 본 사람으로서 너는 어떻게 살려느냐? 너는 보지 않았느냐 어떻게 살려느냐?’ 마침내 친구의 입술을 통해 들려준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순종하기로 작정했다.

‘하나님, 이것이 새로운 주님의 부르심이라면 저에게 확실한 증표를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목적지인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편지가 하나 와있었다. 봉투를 개봉하니 “한국의 전쟁고아를 위해 써주세요”라는 메모가 적힌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인 1,000불짜리 수표가 한 장 들어있었다.

그는 확신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인 것을! 이 수표로 강원도 삼척에 전쟁고아를 위한 보육원인 신애원을 세웠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돌보아야 할 전쟁고아를 위해 그가 가진 것은 그의 양복 윗도리와 지갑과 맞바꾼 깡통 하나였다. 그는 그 깡통을 들고 미국 교회 곳곳을 다니며 외쳤다.

“여러분, 이 깡통이 여러분 보시기엔 버려도 가져가지 않을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한국의 한 어린이에게는 생명줄입니다. 한국의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살립시다!”

이 준엄한 외침이 오늘날 국제적인 규모의 어린이구호기관인 컴패션(Compassion)의 불을 붙이는 작은 불꽃이었다. 이 외침의 주인공이 바로 에버렛 스완슨 목사(Rev. Everett Swanson) 이다.
 
▲ 한국컴패션 대표 서정인 목사      ©한국컴패션
 
재정의 투명성이 최고의 강점
 
한국 전쟁고아의 깡통을 들고 가 긍휼을 외친 그 불꽃같은 음성은 캐나다, 호주, 영국으로 그 불길이 옮겨 붙었다. 60년대가 되자 다른 나라에서도 어린이를 도와달라며 컴패션에 수많은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한국 고아들을 위한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 그런 제안들을 거절했다. 결국 다른 나라 아이들을 돕는 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68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을 배경으로 설립된 아동복지기관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호주에 회의 차 세 번째 온, 컴패션 한국 대표를 맡고 있는 서정인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컴패션은 1952년 6.25 때 한국 고아들을 위해 태동했습니다. 그때부터 93년까지 41년 동안 한국을 어느 기간보다 제일 많이 도와준 단체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에 안 알려진 이유는 컴패션 철학 때문입니다. 컴패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현지 교회들을 내세워 그 교회 이름으로 어린이를 돕게 하지요. 컴패션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오늘날 26개의 수혜국에 5천 8백 교회를 통해 130만 명의 어린이 양육하고 있습니다. 양육은 태아부터 철저한 후원 양육 시스템을 컴패션이 제공하고 양육의 실제는 현지 교회가 담당합니다. 컴패션은 이름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를 위해, 교회를 통해서 일합니다. 인력 관리나 회계의 투명성 등은 컴패션의 심장과 같은 시스템입니다. 컴패션은 이 시스템을 현지 교회에 적용하기 위해 3년을 준비합니다. 컴패션이 했다고 안하고, 교회가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컴패션은 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 동안 공백기가 있다. 93년까지 수혜국일 때는 교회 이름으로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혜국에서 후원국이 되었으니 컴패션을 알려야 후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한국은 수혜국에서 최초로 후원국이 된 나라이자, 11개 후원국 가운데 10번째 후원국이 되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후원국으로서 뿌리내리면서 12만 명의 후원자가 생겨난 것은 기적과 가까운 일이었다. 그 이유를 여러 면에서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한국 컴패션 대표 서 목사의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단체든지 리더의 역할에 따라 흥망성쇠와 명멸을 거듭해 온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그는 한국 컴패션의 성장 원인을 무엇보다 재정의 투명성을 꼽았다.

“한국에서 컴패션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재정의 투명성입니다. 후원자의 입장에서는 ‘내가 쓰는 지출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입니다. 컴패션의 현지를 다녀오면 사람들은 그것을 체감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기관 중 하나로, 돈 걷는 쪽 뿐만 아니라, 쓰는 쪽에서도 이걸 후원하는 분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이 후원하는 곳을 직접 가보는 것입니다. 제일 앞장 서는 분들이 목사님들입니다.

그런 곳을 보고 와서는 ‘컴패션 선데이’(컴패션주일)를 하며 교회 차원에서 후원에 나섭니다. 이런 일이라면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열정적인 후원자가 되지요, 호주 한인교회 중에는 열린문교회에서 2년 동안 150명 후원하고 있고, 그 다음 동산교회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호주 한인교회는 아직 컴패션에 본격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호주 컴패션에 한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호주 컴패션은 전 세계 규모로 3위입니다. 사이즈가 10만 명이나 되지요, 한국은 10년이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2위로 12만이 됩니다. 여전히 미국이 1위로 70만 명을 후원합니다. 호주는 힐송교회가 수천 명을 후원합니다. 호주 개신교 신자들은 컴패션 설립 당시부터 오랜 세월 후원과 양육을 해온 분들이니 마치 자기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합니다.

돈의 규모로 보면 10만 명의 규모일 때 10명 이상이 후원할 것입니다. 한국이 수혜국일 때 호주에서 한국으로 비전트립을 많이 갔습니다. 한국의 어린이를 많이 돌보았습니다. 호주 컴패션 대표도 목사님이시고, 한국 어린이 둘을 입양해서 키웠습니다.”

▲ 컴패션 설립자 에버렛 스완슨 목사      © 한국컴패션
 
사랑은 생명의 꽃이다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77년 도미, UCLA(경영학) 졸업 후 바이올라대학의 탈봇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 석사과정을 거쳐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1.5세이다. 한국으로 돌아가 성결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명문 신학교인 시카고의 트리니티와 미시간의 코너스톤 신학교에서 교수 청빙을 받고 기도하던 때였다. 마흔 앞두고 미국에서의 안정된 미래가 시작되려는 순간, 처음으로 들어보는 ‘국제컴패션’ 부총재로부터 한국 컴패션 초대 대표 제안을 받아 순종, 그의 인생은 새롭게 바뀌기 시작했다. 안정된 생활이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는 고생문이 훤한 가시밭길이었다.

“제 방에서 노트북 하나 놓고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었어요. 보건복지부에 법인 설립 신고를 하러 갔는데 수십억 원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좌절이었죠. 한국에는 아무런 끈이 없으니 첫 2년 반은 정말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매일 실패하는 꿈만 꿨죠. 그러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그런지 하나님이 펼치시더라고요.”

그때마다 컴패션 설립자인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일기장에 남긴 고백, “한 어린이의 손을 잡은 내게 한 나라가 바뀌는 것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구절이 연상됐다.
우여곡절 끝에 설립허가를 받자 드디어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살려 조직을 키울 꿈으로 부풀었다.

▲ 한국컴패션 홍보대사 신애라, 후원자 차인표 부부      © 한국컴패션
 
‘그래 일단 컴패션의 수혜자들을 찾아가자. 그분들이 컴패션의 도움으로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일간지에 <나를 만든 컴패션>이란 코너를 만들고 하루에 한 사람씩 사연을 담아 기사를 내면 후원자들이 밀물처럼 밀려들겠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수혜자들을 만나면 컴패션일이라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줄 알았던 그들의 반응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제가 그렇게 비참하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네요.”

“죄송하지만 가족과 돌봐야 할 사람들에게 그 시절의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상처가 되겠군요.”

다들 그럴 듯한 이유로 빠져나갔다. 마음껏 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날개가 꺾기는 기분이었다. 차선책으로 국제 컴패션에서 소개해준 ‘유력인사’들도 일일이 찾아다녔지만, 갖가지 이유를 달았지만 결론은 ‘약간 세련된 거절’이었다. 하루하루 실망이 이어졌다. 과연 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까지 들었다.

한국컴패션 창립 초기 주변에는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 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신앙과 학업, 영양개선 등을 종합 지원하는 컴패션은 지속적인 일대일 결연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반해, 당시 한국의 나눔 문화는 1회성에 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 한국컴패션 서정인 대표가 필리핀 어린이들과 함께 했다.     © 한국컴패션
 
“주변에서는 제가 일 년도 못하고 떠날 거라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일대일 양육이라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돕는 단체가 사실상 컴패션 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물질적인 도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 아이를 내 아이처럼 기도하면서 관심을 갖고 기르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이 그런 꾸준한 사랑을 보내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여러 날 고심 끝에 손에 들고 있던 명단을 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을 그만 두었다. 오직 빈손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작정했다.

며칠 후 이민가기 전 주일학교를 다녔던 왕십리삼성교회를 찾아갔다. 어릴 적 키워준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다 그대로 있었다. 오래 전 코흘리개 어린 주일학생이 목사가 되고, 이름은 생소하지만 국제기관의 대표가 되어 방문하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영상을 보여주며 1:1 어린이 사역에 대한 열변을 토했다, 환갑을 넘긴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어린이를 결연해 주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29명의 후원자가 첫 결연자(후원자)였고, 10년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결연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이 기간이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게 하셨고, 컴패션이 우리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임을 분명히 하셨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방법과 섭리로 이루심을 신뢰하게 하셨습니다. 이 깨달음 이후 하나님께서는 저와 함께 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그분의 사랑을 흘러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컴패션 홍보대사로 활약하는 신애라, 후원자 차인표 부부를 비롯하여 ‘구두닦이 목사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구두닦이를 해서 번 돈으로 5명의 어린이를 후원하던 경기도 성남의 김정하 목사님이 루게릭병에 걸렸습니다. 컴패션은 김 목사님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 그가 후원하던 어린이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사연을 접한 이들은 ‘후원자분들이 다 부자인 줄로만 알았다’며 펑펑 울더군요. 이분들의 사랑은 연약한 생명을 살리는 원천수이며, 생명의 꽃입니다.”

그는 또 “자녀가 주리고 다치면 가슴이 아프듯, 또한 나 대신 누군가가 내 자식 싸매주고 밥을 떠먹이면 눈물 나게 고맙듯, 오늘도 이 땅 어디선가 긍휼이 필요한 하늘 아버지의 아이들을 가슴에 품을 때마다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라고 밝혔다.
 
▲ 한국컴패션 서정인 대표      © 한국컴패션
 
당당하게 밝힌다
 
유교사상에 배어있는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컴패션의 도움으로 성장한 것을 숨기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당당히 밝히면서 성장해서는 컴패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고 한다.

“우간다같은 경우는 최연소 국회의원이 컴패션 출신입니다. 우간다의 경우 로스쿨 졸업생이 전부 컴패션 출신이었습니다. 존 오셋이란 형제가 간증을 하니, 한 사람이 ‘스톱’ 하더니, ‘질문이 있다. 왜 변호사가 되었나? 나는 우간다의 법이 미국의 법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법으로 이 땅을 다스리길 원한다고 간증해요. 지금도 그런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이티도 국회의원 중에 컴패션 출신이 있습니다. 필리핀은 대법원 검사 중에 컴패션 출신이 있습니다. 얼마 전 처음으로 필리핀에서 컴패션 홈커밍데이를 할 때, 7백 명을 예상했는데 1천 명이 넘는 컴패션 출신이 왔습니다. 컴패션은 끝까지 양육을 하니 모두들 ‘바로 이거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모든 양육이 이루어지지만 개종주의적 접근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보여준 사랑과 긍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양육하며 가르칩니다. 분명한 것은 컴패션이 들어가면서 지역 주민의 60∼70%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컴패션이 전하는 예수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예수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라고 밝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컴패션의 방식은 공산권이나 힌두권, 중남미권 등지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교회들에게도 돌파구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과격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던 스리랑카의 한 교회가 컴패션 사역을 시작하기로 하고 주민들에게 광고를 했다. 어린이 1백 명을 보내주면 대학생이 될 때까지 책임지고 양육하겠다는 내용이었다. 26명의 아이들이 등록해 양육을 받았다.

6개월 후 교회는 나머지 74명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냈다. 다음날 무려 7백 명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몰렸다. 6개월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동네 인근 과격주의자들은 더 이상 교회와 목회자를 괴롭히지 못했다. 주민들이 발벗고 나서며 교회를 보호했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컴패션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어떤 선교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

“미전도종족 선교는 더 이상 지역 범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궁핍한 사람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 모두가 미전도종족입니다. 선교는 예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눔은 내 것을 떼어내는 것이라 생각하기보다 나에게 맡겨진 누군가의 몫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 달에 45불(4만 5천 원) 안팎의 돈을 가장 값지게 사용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한 어린이 후원금으로 한 아이를 한 후원자가 되어 그와 연결하여 서로 편지 오가게 한다.

“지금 섬기는 나라의 어린이는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아이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키워내는 일을 합니다. 수많은 호주의 성도들이 미국처럼 한국을 30년 이상을 도우면서, 한국을 잊지 않고 고아원들을 찾아가요. 후원하는 아이들의 사진 옛날 흑백사진을 보여주면서 눈물을 닦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섬김을 받는 사람에서 섬기는 자로, 사랑의 빚진 자로서 그 빚을 듬뿍 이자를 더하여 갚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그 빚을 가장 효과적으로 갚는 방법이 컴패션에 있는 듯했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한국컴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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