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차세대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 선교대회 대양주 편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땅끝에서 찾는다

글|주정오, 사진|권순형 | 입력 : 2014/02/24 [12:06]
대양주(Oceania)라는 말은 호주와 뉴질랜드를 비롯하여 주변에 흩어져 있는 말레이제도의 여러 섬나라를 포함하는 단어다.
한국인이 이 지역의 섬나라로 방문하거나 이주를 시작한 정확한 시점은 아직도 그 연구가 진행 중이다.
▲ 금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차세대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대회 홍보차 시드니를 방문한 횃불재단 관계자들.(2013. 7.)     © 크리스찬리뷰
 
A. 호주로, 호주로
 
필자가 호주로 처음 유학을 떠날 때 한 장로님께서 ‘주 목사는 좋겠다. 우리 나라의 국모가 태어나신 나라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으니...’라고 축하를 해 주신 일이 있었다. 그때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을 ‘호주댁’이라 불렀던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같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그렇게 혼돈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익숙하지 않았던 나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지구의 남쪽 끝, 조금만 더 가면 어떤 생명체도 견뎌낼 수 없는 동토의 땅, 남극을 만나게 되는 지구의 남쪽 끝이다.

언제부터 이 땅에 한국인이 살게 된 것일까?
 
▲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기록에 의하면 1910년대에 미국 거주 한인들이 호주를 방문하였다고 하고 있고, 우사 김규식은 1920년 호주를 방문하여 호주 수상을 만나 대한민국 독립을 청원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한 한인 청년이 유학을 목적으로 호주에 첫 입국하였다는 연구 기록이 있다.

호주에 첫발을 딛었던 최초 한인 유학생에 관한 기록은 1921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주 선교사가 세운 마산의 창신학교 교사였던 김호열이 호주장로교의 후원으로 호주에 입국하게 되는데 그가 멜본대학에서 학교행정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되니 한인으로서는 그가 첫 번째 호주 방문자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1926년 호주 선교사 에이미 스키너(Skinner)가 호주에 휴가차 올 때 그의 한국어 교사이자 친구인 양한나 (1893-1976)와 동행함으로써 그도 호주 땅을 밟은 첫 한국 여성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첫 한국인이 호주땅을 밟았던 1921년보다 훨씬 이전에 호주인이 이미 한국 땅을 밟았다는 것이다.

1889년 10월 2일, 조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Rev. Joseph H. Davies, 1856-1890)였다. 그는 복음을 들고 혈혈단신 이 낯선 땅,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 첫 가족 이민자로 알려진 최영길 씨는 호주군인들이 입양한 전쟁고아로 ‘시드니 모닝 헤럴드’ 신문에 보도됐다.(1968. 6.21)  
 
비록 그가 한국어 훈련을 겨우 마치고 임지에 도착했지만 33살 젊은 나이에, 선교지에서 사역의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채 하나님 나라로 불려 갔지만 한국인에게 호주는 결코 먼 나라가 아닌 복음으로 연결된 그리스도의 형제 국가라는 사실이 놀랍다.

데이비스 선교사 사후에도 호주 선교부는 복음의 진군을 멈추지 않았고 경상남도 일대를 집중적 선교 대상지역으로 삼아 활동을 펼침으로 그 흔적이 지금까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곳 복음의 그 후손들이 사랑의 빚을 갚겠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호주로 한인 이민 첫 걸음
 
지난 2008년 시드니한인회는 호주 한인 50년사를 발간했다. 호주 한인 이민 역사가 5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호주 한인 이민 역사 50년의 근거는 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곽묘임이라는 여인이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호주 군인 리챠드 가렛(Richard Garett)을 만나 호주로 입국하고 그 후 결혼식을 갖고 시민권을 받게 되는데 그해가 1958년이었기에 그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첫 가족 이민은 최영길 씨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8년 가족과 함께 호주에 입국한다. 당시의 이야기를 1968년 6월 21일자 시드니 모닝 헤럴드 (Sydney Morning Herald) 신문은 이 가족을 사진과 함께 보도하면서 그를 호주 군인들이 ‘입양한 전쟁고아’로 소개하며 한국에서 함께 일했던 그들과 호주에서 재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 최초의 한인교회인 멜본한인교회 창립예배에 참석한 가족들 (1973년 7.8)     © 크리스찬리뷰
 
본격적인 호주로의 이민은 호주 정부가 백호주의 정책을 공식 철폐하였던 1973년을 전후가 된다. 그때로부터 호주의 광산과 유전개발에 필요한 지질학자 및 헬리콥터 조종사, 보석 디자이너, 그리고 태권도 사범 등 소수의 전문기술자들이 호주로 입국하게 된다. 당시의 이민은 기술이민으로 호주에 필요한 인력을 원칙으로 하였기에 이공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 이후 특별히 1980년 이후 한국인의 호주 이민은 급격하게 늘어갔고 호주 전역에서 삶의 터전을 넓혀가게 된다.

1990년 이후 호주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여행 국가 중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많은 한인들이 관광으로 혹은 공부를 위해 호주를 방문하고 있다. 한인 유학생들이 여러 모양의 교육과 미래의 발전을 위해 호주의 주요 도시로 들어오게 되고 그의 부모들도 함께 동행하여 호주에서 삶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민성의 자료에 의하면 2002-2003년에 11,270명의 한인 학생들이, 2003-2004년에는 14,375명으로 27.5퍼센트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다음으로 가장 큰 유학생 숫자이다.
 
▲ 지역별 목회자 부부 초청 간담회      © 크리스찬리뷰
 
호주 한인교회의 시작

호주의 첫 한인교회는 멜본에서 시작

첫 목사, 첫 교인들...
1910년대 한국인들이 호주를 처음 방문한 이래 약 60년이 지난 후인 1973년에 들어서 첫 한인교회가 멜본에 설립된다. 1973년 7월 8일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마산과 부산 등지에서 헌신했던 서두화 목사(Rev. Alan Stuar)와 한국인 여섯 가정이 버우드장로교회(Burwood Presbyterian Church)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되니 호주에 세워진 최초 한인교회가 된다.

멜본에 첫 교회가 세워진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특별히 타 대륙의 이민교회들의 역사를 볼 때 이민 역사와 한인교회 역사가 일치하는 것을 보는데 호주에서는 늦은 감이 있다. 그것은 호주의 백호주의 장벽과 전반적으로 본격적인 이민이 늦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고, 멜본에서 첫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정부 초청 이민자(콜롬보 플랜) 대부분이 멜본에서 정착을 시작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호주 한인교회의 역사는 해를 거듭해 가며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 퍼스지역 간담회     © 크리스찬리뷰
 
현재 한인교회의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공식적인 등록 기관이 없고, 개신교 특성상 교회의 설립이 자유롭다는 점이고 아직도 각 교단별 활동이 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호주의 한인 기독교 월간지인 ‘크리스찬리뷰’가 파악하고 있는 각 주별 교회의 수는 다음과 같다.(크리스찬리뷰는 1990년 1월에 창간되어 대양주 전역에 배포되는 기독교 월간지다)
각 주별로 정리하면 NSW 300여 교회, VICTORIA-40여 교회, QUEENSLAND-50여 교회, WESTERN AUSTRALIA-20여 교회, SOUTH AUSTRALIA-20여 교회, NORTHERN TERRITORY-5개 교회, CANBERRA-10여 교회, TASMANIA-5개 교회로서 총 450여 교회가 된다.
 
▲ 뉴질랜드 최초의 한인교회는 웰링톤에 세워졌다.(1985. 12)     © 크리스찬리뷰
 
호주내 한인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어명
 
올해(2014년)는 호주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지 12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125년 전인 1889년 한국은 호주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은 복음의 수혜국이었다. 한마디로 복음에 빚을 진 나라였다.

그때 전해 준 그 복음의 능력으로 이제는 전 세계로 선교사를 2만 5천여 명을 파송하여 복음으로 세계를 섬기는 나라가 되었다. 세계 곳곳에 한인들이 복음으로 힘있게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125년 전 한국을 위시해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던 호주교회의 열정은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현재의 호주 기독교 실태는 자랑스럽지 못하다고 지적되고 있다. 이미 교회당들이 레스토랑이 되고 무도회장이 되고 술집이 되어가고 심지어 이단과 타종교의 집회시설로까지 전락하고 있는 현실이다. 호주 기독교회도 이미 서양에서 시작된 후기 기독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한인교회, 한민족을 향하신 우주의 왕되신 그분의 부르심으로, 그리고 결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어명으로 듣게 된다.
 
▲ 뉴질랜드에 최초의 한인교회를 세운 김용환 목사는 현재 남태평양에 위치한 바누아트 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왜 우리를 이곳 지구의 땅 끝으로 보내셨는가? 과연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이것이 세계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흩으심이 아닌가? 이미 세계 선교의 횃불은 차세대 디아스포라에게 쥐어졌다.

얼마 전, 아니 25년 전 당시 호주장로교 총회의 선교 책임자는 한국에서 온 총회 임원과 선교 책임자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던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들고 달렸던 선교의 횃불을 이제는 다음 주자인 한국교회가 이 선교의 횃불을 받아 주십시오.”
이렇게 고백하는 그의 두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세계 복음화의 다음 주자인 한인 디아스포라여!
176개국에 흩어진 726만 한인 디아스포라들이여,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이미 한민족의 이민 역사가 150년을 넘어섰고, 미주와 유럽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이민 역사도 100년을 훌쩍 넘어섰다. 문화 충격에 익숙해진, 그리고 세계 공용어에 능통해진 우리의 차세대들이 힘있게 일어서도록 장을 마련해야 한다. 발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명실공히 세계 선교의 주역은 750만 한민족 디아스포라 차세대의 몫이다.
 
▲ 오클랜드 지역 목회자 부부 간담회를 마친 후 참석자들의 기념촬영 (2014년 2월)     © 크리스찬리뷰
 
B. 뉴질랜드의 한인 이민 역사
 
한국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남태평양에 거주하는 한인 숫자는 호주 : 약 12만 명, 뉴질랜드 : 32,000명, 피지 : 약 1,000명, 파푸아뉴기니 : 199명, 팔라우 : 80여 명, 솔로몬 군도 : 약 60명, 통가 : 40명, 바누아투 : 39명, 마이크로네시아 : 약 25명, 키라바시와 쿡 아이랜드 : 각 1명 등이다. (외교통상부 홈페이지, 국가 지역 정보, 2011).

뉴질랜드에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입국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뉴질랜드 정부의 이민법 개정을 통해서다. 뉴질랜드 정부는 이민정책에 관한한 영국계 중심주의를 표방하여 오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경제적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백인중심의 이민정책에 대한 변화 요구와 해외자본 유입을 필요로 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다. 마침내 새 이민법이 1987년 공포되고 유색인종에게도 이민문호가 개방되게 된다. 이후 뉴질랜드는 여러 인종을 아우르는 다문화정책 (Multiculturalism)을 수용하게 된다.

이민법이 개정되기 전 한국인의 뉴질랜드 유입은 주로 취업, 결혼, 연수, 입양 등의 목적이었는데 초기에는 남태평양에 진출한 원양어선 선원들이 대부분이었고, 1950년대부터는 콜롬보 플랜에 의하여 입국한 한국유학생이 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뉴질랜드 정부간의 공식 외교관계는 1962년 수립되고, 1971년 뉴질랜드 수도인 웰링톤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면서 본격화된다. 한인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오클랜드에는 1996년 대사관 분관 형식의 공관이 개설되었다.

뉴질랜드에서의 첫 한인교회는 웰링톤에서 시작된다. 원양어선의 선원들을 위한 예배가 1960년대에도 있었지만 첫 교회는 웰링톤 한인연합교회가 된다.

1987년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투자이민제도가 실시된 이후 유입된 전문직 사무직의 젊은 층의 인력들로 뉴질랜드 한인사회를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한국인들의 뉴질랜드 방문을 더욱 촉진시키는 기회는 1993년도에 시작된다. 대한항공의 직항 취항으로 양국간의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증대가 일어나고 다음 해인 1994년에는 양국간 사증 면제협정 체결이 이루어짐으로 뉴질랜드에 입국하는 한국인의 수가 1995년에서 1997년까지는 연간 10만 명에서 13만 명에 이르게 된다.

2006년 인구조사에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가 17,600명, 일반체류자가 5,400명, 유학생이 10,000명으로 총 33,000명 정도로 나타나 있고, 이 중 79%는 북섬에, 21%는 남섬에 분포되어 있다고 보고되었다.

주 뉴질랜드 대한민국 대사관이 밝힌 최근 인구 통계에 따르면 현재의 교민수는 약 3만 명이며 이는 뉴질랜드 인구의 거의 1%에 육박하고 한국계 국회의원(Melissa Lee)을 배출하는 등 뉴질랜드 사회 각계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한인 유학생의 수는 약 1만 3천여 명 정도이며 매년 5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뉴질랜드를 방문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이와 함께 뉴질랜드인의 한국 방문도 크게 늘어 2012년에는 약 2만 명이 한국을 방문하고 이중 1천 여명이 영어교사로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뉴 양국은 외교관계 수립 50주년인 2012년을 “한-뉴질랜드 우호의 해”로 지정하여 양국에서 각종 축하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양국 관계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전환점을 마련한 바 있어 양국 관계가 긴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한민족 커뮤니티가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중국, 인도 다음으로 뉴질랜드에서 큰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구 일인당 비율로 보았을 때도, 뉴질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동포사회를 가진 나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호주와 뉴질랜드 6개 도시를 순회하며 간담회를 개최한 주정오 목사가 지난 2011년 선교대회를 설명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뉴질랜드의 한인 교회 실태
 
현재 오클랜드와 크리이스트쳐치를 중심으로 파악되고 있는 한인교회는 대략 오클랜드에 120여 개, 크라이스트쳐치에 10개 정도, 그 외 지역에 약 20여 개로 뉴질랜드 전체 150여 개 교회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호주 6대 도시와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를 방문하여 디아스포라 선교대회를 설명하던 긴 여정 중에서 유독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의 목회자들의 뜨거운 환영과 적극적 반응을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그 어떤 지역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력했던 곳이 아니었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대와 확신을 갖고서...
 
이번에 각주의 대표 도시들을 선교집회 홍보차 방문하면서 확인했던 것은 모든 한인교회들의 공동의 관심사는 역시 차세대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기대였다는 것이었다.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갖고 땅끝을 향해 그리고 열방을 향해 달려가던 그들이 이제 잠시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부르심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디아스포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부르심을 설명하고 선교역량을 집대화하는 일에 대한 계획을 설명할 때 한결같이 말하기를 누군가가 시작해 주기를 학수고대했다고 이구동성이었다.

문제도 알고 답도 알았지만 이민교회의 현실이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 허둥거리던 차에 횃불 선교회를 통해 차세대 디아스포라를 향한 선교 동원령이 내린 것을 들으면서 모두들 흥분하고 기뻐하며 기대감을 아낌없이 표출했다.

이번 집회에 대한 기대는 물론 계속해서 후속 모임이 만들어져서 각 대륙별로 혹은 각 나라별로 보다 효과적이고도 구체적인 네트워크를 위한 로드맵이 만들어 지기를 소망하며 기대한다.〠
 
글/주정오|차세대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 대양주 준비위원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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