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한민족 이민

The First Korean Immigration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8/25 [11:04]
그곳에 갔다. 한국에 가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인천역에 내리면, 역  앞에 월미도 가는 45번 버스가 있다.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한국 이민사 박물관'이 보인다. '한국 이민사 박물관'은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해외 활약상과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인천광역시 시민들과 재외 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 2008년 6월 13일에 건립하였다.
 
박물관 입구에 한국 근대 이민의 현황이 세계지도에 위에 그려져 있다. 근대 이후 한민족은 1860년 중국 간도, 1864년 러시아 연해주 등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정부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동이 아니었기에 이민(emigration)이란 단어 대신 이주(moving)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공식적으로 이민 업무를 시작하게 된 것은 고종황제의 승인 직후 여권 발급 등 이민 관련 업무를 담당할 정부의 공식기관으로 1902년 '수민원'(綏民院)이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수민원 (綏民院, Office of Emigration Service)

고종 황제의 승인 직후 여권 발급 등 이민 관련 업무를 담당할 정부의 공식 기관으로 '수민원'이 설치되었다. 관원으로는 책임관인 총재, 부총재, 감독 각 1인, 주임관인 총무국장 1인과 참서관 3인을 두고, 참서관이 비서과장,문서과장, 회계과장을 각각 맡았다. 그 밖에 판임관인 주사 6인을 두고 위원은 수시로 증감하였다.
 
'수민원'(綏民院)의 발음에 대하여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공식적인 한문 발음은 '수민원'이다. 하지만 박물관에는 '유민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윤치호 선생의 영문일지에 '유민원'이라고 표기된 것을 근거로 한 것 같다.
 
초대 총재는 민영환이고 사무실은 서울 계동 한옥이었으며, 오늘날의 외무부 여권 업무와 해외개발공사의 기능을 합한 것과 같은 기구였다. 수민원은 제도적으로는 근대적인 행정 체제를 갖추었으나, 안타깝게 1903년 10월에 폐지되었다.
 
한편 총재였던 민영환은 고종에게 '을사늑약'을 주도한 '을사 5적'을 처형하고 늑약을 폐기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한국 이민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최초의 하와이 이민자들의 사진.     © 김환기

왜, 하와이 (Why, Hawaii )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때는 19세기 중엽이다. 설탕 수요는 증가했지만 미국 남부에서의 공급이 어렵게 되자, 기후 조건이 최적인 하와이가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인 재배로 확장되었다. 원래 초기 농장 노동력은 원주민이었으나 기대에 못 미치자 그 대안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통과되자 중국인을 더 이상 고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이민자 역시 빠르게 증가하면서 노동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자 농장주들이 일본인의 이주를 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장주들은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미국 공사이자 선교사인 알렌(H. N. Allen)의 활동이다. 그는 1884년 조선에 도착한 이후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발탁되어 황실의 신망을 얻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정치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양국 정부 간의 핵심적인 중재자로 큰 역할을 하였다.

▲ 한국 이민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최초의 하와이 이민자들의 여권과 결혼증명서, 사진신부들.     © 김환기


갤릭호를 타고 (On Board of S.S. Gaelic)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이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우선회사 '현해환'에 승선하여 일본 나가사키 항을 향해 2일간의 항해에 올랐다. 이 중 19명은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102명 만이 이민선 '갤릭호'(S.S. Gaelic)를 타고 하와이로 향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May Flower)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한 청교도 숫자와 동일하다.
 
드디어 그들은 1903년 1월 13일 갤릭호(S.S. Gaelic)는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당일 '하와이안 스타지'는 한국 이민 노동자들의 하와이 도착 기사를 크게 다루었다. 
 
"갤릭호 편으로 1월 13일 아침 도착하였고, 이민은 102명으로 부인 21명, 아동 25명과 나머지 56명의 성인 남자로 이루어졌으며, 한국으로부터의 농장 노동자 도입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 당면하고 있는 노동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보도하였고 이들은 검역과 입국수속을 배에서 받았다.
 
여기서 신체검사를 다시 받았는데, 16명이 상륙 허가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고, 결국 86명(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만이 호놀룰루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후 1903년 1월 13일부터 1905년 8월 8일까지 총 64회에 걸친 항해에 모두 7천415명이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1905년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면서 집단 이민은 정지되었다.

사진 신부 (Picture Brides)

하와이에 살고 있는 혼기를 훌쩍 넘긴 노동자들의 결혼 문제는 초기 이민자들의 정착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남성의 수가 여성보다 10배나 더 많아 배우자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궁여지책이 '사진결혼'이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약 7백여 명 정도의 사진 신부들이 결혼하기 위해 하와이로 건너갔다. 사진 신부나 사진 결혼이라는 것은 신랑 신부가 중매쟁이를 통하여 사진을 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에 신랑 신부가 합의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여비를 지불하면, 신부는 하와이로 와서 사진에서 본 그 얼굴의 주인공과 이민국 건물에서 결혼하는 것이다.
 
사진만 보고 결혼을 하다 보니 그들의 평균 나이 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대거 입국한 동기는 다양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여성들도 있었으며,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 떠난 여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전통적인 인습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꿈을 펼칠 새로운 지평을 찾고자 했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사진신부는 내일을 위하여 하와이행 배에 몸을 실었다.

교회의 역할 (Role of Church)

교회는 한인 공동체의 구심점이자 초기 이민자들의 안식처였다. 이민 한인들의 교회 공동체 활동은 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하면서 바로 시작되었다. 1903년 호놀룰루에서 정기적인 예배가 시작되어 1905년 해외 최초의 한인 교회가 에바 농장에 세워졌다. 감리교 외에도 한인 성공회와 한인 구세군이 활발하게 종교 활동을 펼쳤다.
 
1918년 이승만이 한인 기독교회를 설립하자 많은 교인들이 한인 기독교회로 모였다. 따라서 감리교회와 한인 기독교회는 각각 하와이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양대 종교 조직으로 형성, 발전하였고, 교회 내 활동 등을 통해 친목 도모 및 자녀의 한글교육, 민족교육, 역사교육 등을 하였으며, 독립 자금 모금 운동도 펼쳤다.
 
교회는 종교 생활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한인사회의 센터 역할을 감당했다. 이민 사회에 이런 말이 있다. 중국인이 이민 가면 식당을 세우고, 일본인이 이민 가면 공장을 세우고, 한국인이 이민 가면 교회를 세운다고 한다. 한민족은 종교성이 깊은 민족인 것 같다. 세계의 디아스포라 코리안은 예외 없이 교회 중심으로 모이고, 믿음으로 하나되어 이민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 구세군 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ian, Detention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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