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에너지 가족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김영주 회장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4/09 [13:22]
▲ 이명박 대통령 국빈 방문시 수행기업인으로 호주를 방문한 대성그룹 김영주 부회장이 본지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크리스찬리뷰

감성(Feeling), 유명(Famous), 그리고 가족(Family) - 소위 3F라 불리는 이들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최근 발표한 '2008 문화계 10대 히트상품'의 키워드다. 여기서 '히트상품'이란 말 대신에 '히트인물'이란 말로 이 '3F'의 키워드를 대입시켜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한 사람을 만난다. 바로 그 한 사람이 김영주 권사(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회장, 대성그룹 부회장)이다. 

필자가 그의 명성을 처음 대한 것은 20년도 더 지난 86년 초가을 덕수궁에서 한국 기독교 미술인협회 작품전시회가 열렸을 때 그의 작품과 당시 발간된 도록(圖錄)을 통해서이다. 소위 그의 감성과 명성을 접한 것이다. 그러다가 몇년 후 대한기독교 여자절제회(이하 절제회)에서 한국 기독교계 대모인 여귀옥 여사를 뵈면서,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오찬을 겸한 절제회 어떤 행사에서 장신의 한복 차림에 시종일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모임을 이끌어 가던 모습이 강인하게 각인되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당시 한국기독실업인회 이성재 총무로부터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모델처럼 살고 있는 실업인 몇 명의 명단을 넘겨받은 적이 있는데, 최태섭(한국유리), 김수근(대성그룹), 장치혁(고려합섬)...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는데, '첫 3인방'을 아직까지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여기 한국 기독실업인의 모델같은 김수근 장로와 기독교 여성운동의 대모 여귀옥 권사 사이에 출생한 장녀가 바로 김영주 권사이다. 이쯤되면 기독교 명문가의 가족으로 손색이 없다. 

한 가지 재능를 갈고 닦기에도 만만치 않은 세상, 여러 가지 재능을 능수능란하게 발휘하는 이들은 범인(凡人)의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소위 이 '팔방미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다반사다. 그래서 예부터 어른들은 '재주 많은 사람이 밥 굶는다'는 말을 들면서 '한 우물만 파라'고 채근하곤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우물을 파면서도 각각의 우물에서 양질의 물을 퍼올리는 '능력자'도 분명히 있다.

  김영주 권사 가족이 분명 그런 반열에 설 수 있었다. 훌륭하게 기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형제들(대성그룹 회장을 비롯하여 그룹 계열사 회장들), 자매들 김정주(연세대 신학과 교수, 세계기독교 여자절제회 수석부회장), 김성주(성주 인터내셔널 대표. '나는 행복한 왕따이고 싶다'의 저자) 집사가 바로 그들이다. 

어쨌거나 김영주 권사는 화가이자 기업인이며 여성운동가이기도 하다. 이번 이명박 대통령 국빈 방문시 수행기업인으로 호주에 온 그가 펼치는 구수한 입담에는 인생의 가족 사랑이 있고, 여성운동이 있고, 예술이 있고,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한호 그린비즈니스 경제포럼이 열렸던 샹그리라 호텔에서 호주 기독교여자절제회장인 백영숙 권사와 만찬을 겸해 만났다. '음식의 향연'과 밥의 힘은 굉장히 컸다. 함께 밥을 먹으면 대화의 밀착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어머니를 회상함 

김 권사는 어머니, 여귀옥 권사에 대한 이야기라면 끝이 없었다. 여 권사는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선각자이다. 선교사들이 세운 대구 신명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다녔는데,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하자 대구로 내려와 교회를 섬기다 여성운동에 뛰어 든다. 현재 한국 교계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평양신학교를 다니거나 문턱이라도 밟아본 사람이 거의 유명을 달리했다. 교계 원로인 방지일 목사 등 한두 분 정도이다. 

 
▲ 김영주 회장이 대한 기독교 여자절제회 평생동지인 호주지회장 백영숙 권사(앞줄 오른쪽)가족들과  함께 자리했다.   © 크리스찬리뷰

김 권사는 이미 출생 이전부터 4대째 기독교 집안이었다. 할머니도 성경교사, 어머니(여귀옥 권사)도 성경교사였다.

"어머니는 5남 1녀의 외동딸로 할머니가 증조모까지 전도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양갓집 며느리로서 지나가던 전도 부인의 전도를 받고 혼자서 교회를 찾아 나가셨습니다. 첫 날 교회에 참석하고서, 여기에 참 진리가 있구나 깨달으시고는 어떤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고 교회를 나가셨어요. 처음에는 증조모님은 성경도 찢으시고 매도 때리셨는데, 워낙 며느리가 착하게 시집을 사니, 하루는 증조모께서 교회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여 며느리의 뒤를 쫓아 몰래 가보셨다고 해요. 교회 뒤에 앉아서 살펴보시다가 그만 은혜를 받으셨어요. 

나중에 증조모님께서 어찌나 잘 믿게 되었던지 교회 종소리만 나면, '에미야! 저 종소리가 천당, 천당하제' 하시며 기뻐하셨다고 해요. 그 후 증조부님도 믿고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믿어서 온 가정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13세 때 대구 신명학교 졸업하고, 처녀 미국 선교사로 환갑을 맞으신 교장 선생님이 평양신학교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를 다니고 나니 유일하게 신사참배하지 않은 학교라고 일본경찰들이 학교를 폐교를 했습니다. 그 길로 대구로 내려오셔서 교회 일을 도우셨습니다."

▲ 평화(Peace) / 김영주 / 수채화 / 54cmX39cm   © 크리스찬리뷰

한 학기의 평양신학교 경험이 여귀옥 여사에게는 엄청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인생의 목표가 생겼고,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을 만났다. 당시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할 만큼 크고 놀라운 믿음의 사건들이 터졌고, 한국 교계의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평양의 영성을 맑게 하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순교 역사상 존귀한 대열에 서는 길선주 목사의 육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학교 소풍 때는 한국 교회 첫 순교자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현장에 세워진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 교회를 방문하고는 소풍이 아니라 큰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오는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또 신학생 여귀옥 양은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에서 유년 주일학교를 지도하고, 서문교회에서 찬양대를 도왔다. 어느 날 하루는 외출하려고 막 나가는데 길거리에서 누가 그를 가로막아 서면서, "예수! 천당!"하고 외치길래 보니 바로 최권능 목사였다. 여귀옥 양은 수줍게 "목사님! 저는 신학생이에요"하고 대답하니, 대뜸 "버버리(벙어리) 신학생이 어딨어?"하더란다. 

그는 최 목사와 헤여져 일을 보고, 학교로 돌아오는데 큰길에서 다시 최 목사가 "예수! 천당!"하고 여전히 외치고 있는 걸 보고, 또 야단 맞을까봐 겁이 나 다른 길로 피해서 돌아왔다고 하면서, 훗날 "그 귀한 어른을 손이라도 한 번 잡아 보았을 걸..."하고 후회하더란 말을 김 권사가 들려주었다. 


▲ 절제회 제36차 세계대회가 지난 2004년 4월 뉴질랜드에서 개최됐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백영숙 권사, 네번 째 김영주 회장, 5번째 김정주 박사    © 백영숙

절제운동의 시작 

"대구 남산교회에 외할머니가 성경교사로 가르치시던 반에 친할머니가 학생으로 나오셨어요. 할머니들의 호감과 인도하심으로 나중에 부모님의 결혼이 이루어졌어요. 어머니는 여학교 시절인 13세 때 하나님께 순교하겠다는 약속을 못지키고 사업가의 아내가 되어 항상 빚진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사업 확장을 위해 출장을 가셨을 적에 크게 도둑을 만났습니다." 

6․25 직후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도둑이 집에 있던 옷을 몽땅 다 가져갔다. 입고 나갈 옷이 없을 정도로 다 가져가 버렸다. 

"어머니는 도둑 맞은 것을 발견하고 나서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일찍 모태에서 나서, 머리털 하나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빠지는 줄 아는데 오늘 다 가져 가게 허락하심은 하나님께서 내 겨레를 위해서 일하라는 경고이시다. 너희들은 엄마가 예수를 믿고 아빠는 부지런히 일하시니 지상낙원에 살고 있다. 

그러나 어젯밤에 우리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가져간 불쌍한 이웃들을 위해서 누가 일할꼬?'물으세요 그래서 '우리가 일하지요'하니,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고 하시며 기도하셨어요. '하나님 아버지! 이 불쌍한 민족을 구원하는데 저희 가정을 써 주시옵소서. 이 한 생명을 바치고 내 민족의 교도소가 빈다면 찬미하며 바치겠나이다'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날은 하나님이 '영의 잠을 깨운 날이자,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신 날'이라고 김 권사는 회상했다. 그 사건 이후, 여 권사는 대구 시내에 나가서 '기독교 여자 절제회'란 간판을 발견했다. "Home for every land"란 너무 구호가 아름답고 좋았다. 순결, 봉사, 평화, 절제 등등 모두가 성령의 열매운동인 절제회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 1923년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로 발족한 대한기독교여자 절제회는 1970년 용산구 동자동에 대지 172평, 건평 262평의 회관을 완공했다.   ©백영숙

그 때부터 기독교 절제운동에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제일 먼저 교회 옆을 빌려 마음맞는 청년들을 불러 모아 공부를 시키고, 술과 담배에 중독되지 않게 복음을 전했다. 교복을 만들어 입히고, 낮에는 전도지를 뿌렸다. 그해 절제회는 가장 전도지를 많이 뿌린 단체가 되어 무료로 가져오던 전도지를 나중엔 미안하여 약간의 돈을 지불하기도 했다 한다. 절제회의 활동은 계속하여 국산품 장려운동으로 번져갔다. 

"자유당 당시 한 나라의 경제는 그 나라의 피와 같은데, 피가 다 빠져버리면 안되니, 실과 바늘부터 우리 것을 쓰자고 조합운동을 벌였습니다. 자원봉사하여 들어온 수입으로 절제회가 돌보는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사주었습니다." 

절제회 운동은 급속도로 확장되어 갔다. 신명학교 옆에 절제회관을 짓고, 교도소 전도, 고아들을 모아 공부를 시켰다. 그 당시는 아직 6․25의 상흔이 지워지지 않아, 각처에 고아들이 득실거렸다. 12세까지는 고아원에 있을 수 있었으나 그 후는 다 자립하게 되어 있었다. 고아원을 나온 아이들이 거처가 없으니 강둑 다리 밑에서 잠을 자면서, 낮에는 구두를 닦고 밤이면 이곳저곳에서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 

절제회는 이 아이들이게 주목했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야학을 벌여 중등과정 공부를 시켰다. 중학생 모자를 씌워주고, 각 교회 신실한 대학생들이 교사로 봉사했다. 이제까지 시간 있는 대로 남의 주머니의 돈만 넘보던 심령에도 성령이 임하니 그들의 인생 목표가 변화되었다. 2년 속성반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고, 이곳 저곳에 취직도 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던 그의 가정에 경사가 넘쳤다. 먼저 아이들이 입학시험만 치면 척척 붙었다. 형제들이 모두 서울대 법대에 붙었다. 김 권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구에서 명문 경북사대 부중을 졸업하고 이화여고에 시험을 쳐서 입학했고, 나중에 서울 미대는 수석으로 입학했다. 


▲ 2004년 4월 뉴질랜드에서 개최된 절제회 제36차 세계대회에서 인사하는 김영주 회장(오른쪽)   © 백영숙

화가로서의 활동 

어렸을 적부터 다재다능했던 영주 양은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대구에서 당시 효성여대 김기욱 교수에게 사사를 받았다. 서울에서는 피아노의 대가 김성복 선생께 사사 받았다. 김성복 선생은 그의 피아노 소질을 인정하여 음대 보내라고 권할 정도였다. 그러던 영주 양이 '어머니! 이제 피아노는 많이 배웠으니 미술 공부가 하고 싶어요.'라는 말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꾸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어머니는 '얘, 너는 손만 대면 작품이 나오냐?'할 정도였다. 10분만이면 두 시간 그려도 안되는 것을 다 100점을 받을 정도였다. 아이들을 도와주라고 하여 아이들 도와주면 그렇게 도와준 그림이 교실 벽에 다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입학 원서를 작성 당시, 미술 교사는 영주 양이 미대에 원서내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 서울 미대같이 어려운 학교에 과외도 받지 않고 원서를 내는 것은 무모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떨어지면 엄마가 책임지겠다'는 '엄마의 보증'에 의해 겨우 원서를 쓸 수 있었다. 시험 결과 수석합격이었다. 

"그때 경쟁률이 제일 셌던 9대 1이었습니다. 너무 거창한 할아버지같은 스킬을 가진 5수 6수까지 한 사람들이 오던 66년도였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제가 서울미대 수석으로 합격하는 꿈을 꾸셨습니다. 사람들이 새벽에 2월인데 돈암장(이승만 박사의 거처였지만 나중에 그의 친정이 된다) 산에 지었던 고목 벚꽃이 바닷가를 지나가다 보니 너무 아름답게 피워 머리에 꽂으려고 하나 딱 따서 머리에 꽂고 오는데, 하나님이 '너희 집에도 벚꽃이 막 피었다'고 하시더래요. 아니나 다를까 아침 일찍 한국일보 기자가 인터뷰하려고 집에 밀어닥쳤어요." 

서울 미대를 졸업한 그는 대학원에 입학하며 공부하던 중, 미국 유학을 갔다. 처음에는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 시에 있는 클리브랜드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여기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어 그 학교에서 추천 받아 미국에서 미술 대학원으로 제일 명성이 높은 디트로이트 시의 블룸필드 힐에 위치한, 세계각국에서 몰려오는 학생들로 평균 입학경쟁률이 400대 1이 되는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 대학원에 입학했다. 

입학하자 처음 전시회가 있었다. 선후배 모두 100점의 그림을 내어서 외부 인사를 초청했다. 그의 그림 두 장이 제일 먼저 수집가들에게 팔렸다. 그때 어떤 부인이 그의 그림을 사고 싶어 안타까워했다. 그 부인은 그를 찾아와서 방금 팔린 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다. 그는 사진이 아니니까 똑같이는 안된다고 해도 아무튼 부탁한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교수들도 놀랐다. 학교가 위치한 동네는 포드 자동차 회사가 있는 공업도시 옆이라 부자 동네였다. 그 부잣집들은 세계의 저명한 화가들의 그림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이 동네 부인들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이러다가 너 백만장자가 되겠다. 나는 교수를 오래 해도 이 동네에서는 그림을 팔아 본 일이 없는데...'하고 부러워할 정도였다. 

많은 귀부인들이 그를 초청하여 그들의 집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였다. 공부도 바쁜데 주문 받은 그림도 그리려고 하니, 하루에 세 시간씩 잘 때도 많았다. 졸업 작품도 훌륭해서 카나다 몬트리올 대학에도 소장되었다. 

그는 졸업 후 쇄도하는 그림 주문도 있고 해서 미국에서 화가 생활을 더 하려다가 1974년 봄에 귀국했다. 귀국 직전 그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후부터 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항상 찬양과 말씀, 기도로 준비하고 모든 그림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생각하면서 그리고 있습니다. 1980년에 세종문화회관 제 1, 제 3전시실을 빌려서 첫 국내 개인전을 가졌는데, 그 작품들 제목이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망라하고 있어서 그 개인전의 규모도 크고 작품도 많은 호평을 받았지만, 이 전시회를 통해서 전도 받은 화가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강정완 화백, 변응원 화백 등 모두 이 첫 국내전에서 제가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1980년 파리에서 3개월 동안 개인전을 가졌을 때에도 매일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불란서 공사로 계시던 강신조 공사님이 예수님을 믿게 되셨고, 재불화가, 교포 사회에 수십 명의 전도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도 완전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했다. 여러 가지로 바쁠 때도 그림은 그의 분신이었다. 

"시간은 하나님이 요리하시기 때문에 바쁘면 밀린 일을 마치고 나서 며칠 동안 고요한 시간을 갖습니다. 그 시간에 기도도 하고, 작품도 하고, 아이디어가 퐁퐁 솟아납니다. 작년에 24작품 마치고, 올해도 한 작품, 한 작품 마치고, 감격을 노래합니다. 하나님 주시는 자연 속에서 피조물에서 섭리를 발견해 내고 감격을 노래합니다. 

개나리가 작은 꽃같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실 때 조금만이라고 인간적인 욕심, 가식적이면 그 작품이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손맛으로 알듯이 하나님이 정확한 시간에 해주시는 것을, 작품을 아주 신선하게 끝내라고 할 때 끝냅니다. 

하나님 주시는 영감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걱정이 앞서면 하나님을 앞서가는 월권행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아닌데 저를 통해서 색깔을 내주세요. 새벽하늘에 기도하고 북한산을 내려다 보니 아름다운 색깔이 20초 있었다. 그 순간 , 짧은 시간에 아름다움을 포착합니다." 

▲ 김영주 회장은 절제회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 사회적인 지위를 철저히 절제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절제회 운동에 투신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한 여귀옥 여사는 서울에서도 절제운동을 정력적으로 했다. 당시 연세대 이사장이던 원일한 박사 모친인 언더우드 목사 사모가 절제회장이었는데, 절제회관을 교회에 가지라는 유언을 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자 교회와 절제회가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밤새도록 우시면서 기도하셨어요, '하나님, 교회와 믿는 선한 단체가 싸우면 제일 기뻐하는 것은 마귀겠지요? 마귀가 젤 좋아하겠지요, 제가 대신 십자가를 지겠습니다'하신 다음 격앙되었던 절제회원들을 설득하셨습니다. '여러분들, 교회에는 그냥 헌금도 하는데 10년 동안 우리가 무료로 쓰고 집세 안낸 것 감사하고, 다른 데로 안가고 교회로 들어가는 것 감사합시다. 우리가 서로 허리를 조르고 절약하고 땀을 흘려 회관을 짓기로 합시다'하여 동자동 정일학원 그 골목에 절제회관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 지저분한 동네가 KTX가 생기고 나서, 꿈나무 동산이 생기고, 앞에는 6미터 도로 확장되고, 이제는 서울에서 제일 아름다운 땅이 되었고, 교회 유적이 되었습니다." 

필자가 방문했던 바로 그 회관이었다. 그 당시는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처녀들이 많아 서울역 앞에 있으면 사창가에서 유혹되어 가는 여성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그 땅 값을 묻지도 않고 샀다고 한다. 건물이라고는 생전 처음 지어보는 여성, 일꾼들은 일을 조금씩 하고 도망가곤 했다. 굶어가면서 가족들의 모든 용돈 다 그곳에 바칠 정도였다. 이 일을 하면서 많은 기적들도 경험했다. 

"돈이 없어 모진주 선교사 찾아가 3천 불만 빌려달라고 부탁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선교사님께서 화들짝 놀라며 '우리는 그런 큰 돈이 없어요'하길래, 미안해서 나오다가 아이디어가 나서 '그러면 본국에 편지 하나만 써주세요'했어요. 그거는 해드리지요그래요. 편지 보내고 깜빡 잊었는데 얼마 후에 5천 불이 왔더라고. 중국 출신 처녀 선교사가 평생 모은 돈을 이 돈은 아시아의 선교를 위해 써달라고 유언하고 소천했는데, 그 돈이 어머니 손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가장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동생 정주가 68년도에 이화여대 전체 수석 합격했습니다. 3년만에 두 딸이 수석입학 했다고 어느 신문의 휴지통 난에 났습니다. 하늘나라에 간 총무님과 어머니가 마루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실 정도였습니다. 

정주 양은 그렇게 받은 장학금까지도 절제회관 짓는데 쓰도록 어머니의 손에 쥐어드렸다. 

"어디든지 유일하게 하나님 말씀 안에서 십일조하고, 주일성수하며, 하나님을 믿는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어머니에게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영적인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기쁨을 잃고, 거역하는 행동을 하면 안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십자가를 보시면 우셨고, 못잡수셨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를 평생 마음판에 새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한 것을 아니까, 교육에 오래 참고, 다 오래 참고 다 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 회관을 지으시고, 새마을 운동이 흡수되고, 구치소 돕고, 결손 가정을 도와주고, 고아들은 꼴찌라도 장학금을 주어 학교를 다니게 하고, 30년째 계속 장학사업, 유아원 사업을 하셨습니다."

140년 전, 청교도 정신으로 살만한데 자꾸 고아들이 생겨났다. 아버지들이 월급을 받고 오다 카바레로 가서 다 쓰고, 그러는 중에 아버지는 알콜 중독이 되고, 엄마는 산아제한이 없으니 엄마는 폐병이 걸리는 피폐한 상황에서 세계여자절제회가 생겨났다. 아버지의 알콜 중독이 가장 큰 원인이었음을 발견하고, 알콜 유통을 금지하자고 하여 일어선 것이다. 남자들만 투표권이 있는 것을 보고, 여성참정권을 주장하여 여성참정권을 찾아 금주법을 시카고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유치원 사업을 절제회가 제일 먼저 시작했다. 

여귀옥 여사 생전에는 부회장으로 섬기다 소천 후부터, 김영주 권사는 어머니의 유업인 대한기독교 여자절제회를 벌써 몇 년 째 이어오며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지금은 절제 예방운동, 초중고 대학에 자료를 가지고 6주간 훈련시키는 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 김영주 부회장은 어머니 여귀옥 권사에 대한 이야기라면 끝이 없다. 그는 어머니의 유업인 절제회를 수 년째 이어오며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크리스찬리뷰
가업의 축복 

그런 신앙의 표적은 그 집안의 사업을 일으키는 데도 밑바탕이 되었다. 처음 대성그룹의 시작은 참으로 미약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처음 사업 시작하실 때, 연탄 석탄 2톤을 사놓고,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하시자 '여보, 대성이라고 지으면 어떨까요? 큰 대, 이룰성' 그렇게 하여 대성은 태어났는데, 그날이 5월 10일 어머니 생신일이었습니다. 마침 이승만 대통령께서 산림녹화 때문에 나무를 못때게 하면서 조개탄을 생산한 우리 회사 물건이 불티나게 팔려 대구은행 행장이 퇴근 때 시커먼 돈을 가마니에 싣고 갈 정도였습니다. 돈이 가마니로 들어온다고 하면, 그래 그렇게 되기를 기도드렸지 하면서 하나님의 격려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창고를 맡고... 말입니다. 

60년 전통의 대성은 24개 계열사로 성장한 에너지와 환경 문화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해외계열사만도 5개이며 3개 연구소가 있다. 

"기업은 때가 되니 오히려 상주시는 것같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형제들이 분담하여 세계를 무대로 다닙니다. 세계를 무대로 출장을 다니니 항상 가방에 사철 옷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철저하게 절제의 에너지 가족임을 실감할 수 있는 말을 한다. 

옷감은 동대문에 가서 사서 만들어 입습니다. 자기가 절제하지 않으면 절대 남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어머니께서 절약하는 것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께 도배비도 받으면 대구 절제회관 길을 낸나고 그 돈을 그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도배지는 동대문 가서 비단 대신 나이론을 사서 일꾼 쓰지 않고, 혼자서 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외국 손님 온다고 옷 사입으라고 아버지께서 돈 주시면 그 돈을 고황경 박사께서 서울여대 모금하실 때 그대로 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하루만에 50분의 1가격으로 한복을 해 입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하나님, 남편이 이것 얼마 줬냐고 안묻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아버지는 '아, 그 색깔 더 좋다'고 하면, '그렇지요?'하고는 빨리 앞서 걸어가셨습니다. 혹 아버지께서 알아보실까 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모으고 아껴, 박영창 목사님께 선교비 드리곤 했습니다. 없는 사람이 굶을 수 없고, 얼마나 슬픕니까? 있을 때 돕자는 것이 철칙입니다. 죽기까지 절약하는 방법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었다. 김 권사는 사회적인 지위에 있어서도 절제회 회장답게 철저히 절제하고 있다. 그만한 능력과 위치에 있을 때 맡겨지는 사회의 감투는 부지기수이다. 

여성 몫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로 가는 지름길인 '여성단체 협의회 회장' 단일 후보로 올라갔지만 이미 4년 전에 사양했다. 지금은 여당 국회의원 출신인 김정숙 씨가 맡고 있다. 그만큼 하고 모두가 하고 싶어하는, 대우받는 자리를 거절했다. 바로 절제회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그 대신 여성단체 협의회 국제위원장을 맡아 각국 대사들 부인들 나오는 영접파티는 한다고 하였다. 

"일할 때 하나님 말씀이 클로즈업되게 해야 합니다. 절제회도 우상이 되면 안됩니다. 술 담배 마약으로부터 교인들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교회지도자들, 성가대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그만큼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제일 먼저 유혹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환경에 마귀들이 끌고 가고 있고, 언론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습니다." 

고도의 절제된 에너지 가족의 장녀,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회고만큼은 절제되지 않은 듯했다. 거기에 아름다움이 넘씬 풍겼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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